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영화 그리스
/ tell me more tell me more, did you get very far?
후- 너무 오래전이다. 영화 그리스가 처음 개봉됐을 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와서 얘기하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대목은 언니가 친구랑 영화 얘기를 하면서,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속닥이던 일이다. 내가 ‘뭔데? 뭐?’ 하며 채근해도, ‘아냐 너 알면 안 돼. 너 충격받아’ 하고 제법 어른인 척 입을 다물었는데, 훗날 알고 보니 그건 영화 속 여학생 리조의 임신 소동이었다. 고등학생이 임신이라니. 80년대 대한민국 어리바리 청소년에겐 꽤나 쇼킹해서 지들끼리도 쉬쉬했던 거다.
아무튼 그 당시 영화 '그리스'는 나에게, 잘 나가는 부자나라 미국 청춘에 대한 부러움 그 자체였다.
와 미국 고등학생들은 저렇게 멋쟁이들이구나.
차도 모는구나.
담배도 피우는구나.
파티란 것도 하네.
쟤네는 연애도 실컷 하고 놀러 다닐 곳도 많구나.
한마디로, 영화 속 세상은 닿을 수 없는 즐거움의 성전이자 뼛속 깊이 동경하는 발할라 그 자체.
뒤집어 말하면 그건, 80년대 대한민국 중학생이 느끼던 결핍과 우울이었다.
그때의 내 심정을 대신 짚어준 시가 한 편 있다.
벤지, 바비, 휴이
고등학교 다니는 말썽꾸러기 삼총사
하라는 공부는 항상 뒷전인 채
록큰롤의 정신 사나운 리듬에 젖어
삐밥바룰라 술 담배 즐기고
기껏 가는 곳은 미성년자불가 영화관이나
또래 여학생 꼬시는 댄스 파티장
(중략)
미어 터지는 288 버스 속
역한 김치국물 냄새로 시작하는 아침
지도부의 검문에 아슬아슬 통과하여
겨우겨우 교문에 들어서면
웅장하게 울려퍼지던 영광 영광 대한민국
조회시간 수천 명 검은 제복의 아이들
획일의 미덕을 손끝에 싣고 일제히
충성!
(하략)
90년대에 '신선한 감성'으로 주목받았던 시인 유하(그는 감독 이전에 시인으로 데뷔했었다)의 데뷔 시집에 실린 '그로잉 업'이란 작품 중 일부분이다. '그로잉 업'은 '그리스'와 비슷한 때에 나온 우당탕탕 미국 청춘영화인데, 시인은 그걸 보며 킬킬 대면서도 한편으로 구질구질한 현실을 뼈아프게 느꼈나 보다. 그리스를 볼 때 내가 바로 그랬다. ‘와 부럽다’ 다음엔 ‘아 시시해’로 이어지는 프레이즈.
세월이 흘러 정우성과 고소영이 찍은 지오다노 광고에서, 대니와 샌디가 summer night를 부르는 장면을 패러디했을 때, 난 이미 애엄마였건만 막 설렜었다. 그들의 재연이, 한때 느낀 서글픈 부러움을 쬐끔 상쇄해주는 기분이었다랄까.
즐거운 환상을 안겨줌과 동시에 저개발의 열패감을 실감하게 했던, 영화 '그리스'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세상을 떴다.
샌디 역의 올리비아 뉴튼 존.
고등학생 샌디 역을 했을 때 그녀 나이 서른이었다.선진국 안티에이징의 승리였었나.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안티에이징은 비주얼이 아니라 목소리.
세상을 향한 의심이 1도 없는 순진한 여학생의 목소리를 나이 서른에 놀랍게 재생했었다. 사실 올리비아 언니의 매력은 원래 순진함과 맑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Physical’이란 노래에서 제법 섹시한 눈빛과 표정으로 'Let me hear your body talk'이란 가사를 읊조렸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이 눈과 귀를 의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밌는 건 ‘Physical’이란 노래가 꽤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그녀는 결국 섹시 컨셉보다는 청순 순수 이미지로 남았다는 거. 그만큼 그녀의 아름다운 청순은 힘이 셌다. 그녀가 떠나면서 전해진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인류의 암 극복을 위해 힘을 보탰다는 그녀의 뒤안길이 '그리스'에 나오는 샌디만큼 씩씩하고 진실됐었다는 후일담이 고마웠다. 내 어린 시절 스타들의 황혼이 아름다웠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지.
영혼을 뒤흔들었던 이들이 말도 안 되게 휘청대고 망가져서,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추억마저 빛이 바래게 될 때면 무척 속상하다. 딸 앞에서, 내가 사랑했던 스타의 이름을 입에 담기 민망해지거나 눈치 보일 때의 쓰린 속. 아는 사람은 안다.
그런 의미에서,
고마워요 올리비아 언니. 훼손되지 않은 샌디로 남아줘서.
/ 하이틴은 로망이고 입시가 현실이다
예습복습 N회독 반복학습
동네 막론하고 전교 1등을 붙잡고 비결을 묻는다면 나올 말들이다. 보고 또 보고, 쓰고 또 쓰는 일은 지겨워도 뇌리에 남는다. 90년 대생들에게 ‘지토’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열명 중 아홉 명은 헬로 지토 헬로~ 하고 노래를 부를 것이다. 지토는 7차 교육과정 초등영어 교과서 속 캐릭터이자 수많은 영어 후크송의 아이콘이다. 지토를 마지막으로 본 지 10년도 넘었지만 매일 교실에서 부르던 노래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리스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봤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 영화가 먼저였는지 한국판 뮤지컬이 먼저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영화 장면들 뿐. 썸머 나이츠를 부르며 뒷짐 지고 사뿐사뿐 뛰어다니는 여학생들과 건들건들 개다리춤을 추던 남학생들, 자동차 경주, 뷰티스쿨을 그만두라고 감미롭게 노래하던 아저씨, 하이힐을 신고 아슬아슬하게 놀이기구를 돌아다니던 엔딩씬의 샌디.
초등학교 이후엔 본 적도 없는데 장면들이 저절로 그려지는 건 그만큼 재밌게 봤다는 거겠지? 흥겨운 영화고 노래는 종종 들었으니깐. 그런데 브런치를 쓰면서 알았다. 내가 어렸을 때 그리스를 수차례 봤다는 사실을. 그것도 내가 너무 좋아해서 부모님이 부러 DVD도 사 여러 번 틀어줬고 OST 앨범도 구비해 이동할 때면 차에서 곧잘 틀어줬다는 걸. 많아야 2번 본 줄 알았는데. 반복관람을 통한 각인이었다니. 소소하지만 충격이었다.
그리스를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처음 본 하이틴물에 홀딱 빠져버린 거 일지도 모른다. 쌈박한 가죽재킷과 가죽바지, 알록달록 색색의 옷들. 놀이기구와 풍선이 있는 졸업식. 미국 고등학생들의 날고 기는 댄스 배틀 (말 그대로 날고 긴다) 그리스 하면 주로 노래를 얘기하지만 시각적인 즐거움도 한국 어린이에겐 센세이셔널했다. 물론 그중 제일은 존 트라볼타의 골반.
아갓츄~ 데모떨쁠라이어.. 앤담루즈~ 쎈컨뜨로올
20년 전 외운 가사는 아직도 저 발음으로 부른다. 실제 영어 가사는 찾아본 적 없다. 유려한 영어 발음보단 어린이의 자체 필터가 뱉어낸 된소리로 불러야 맛이 산다. 잊었던 취향의 역사, 하이틴에 대한 선망, 몰라도 대충 목청껏 부르던 추억의 맛 말이다.
다른 건 다 까먹어도 샌디와 대니, 그들의 친구들은 기억한다. 여전히 여름밤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생생한데, 올리비아 뉴튼 존의 사망 소식에 기분이 텁텁했다. 누군가의 마지막으로 시대의 변화를 체감하는 건 정말이지 슬프다. 그보단 그리스의 노래를 들으며 시대가 변해도 닳지 않는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