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분류된 조금 어려운 일상 생활 지침서
사실 수업해야 해서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글쓰기를 해 올 때 '수업하려고 읽었다.' 내지는 '읽으라고 해서 읽었다.' 이렇게 글 시작하지 말라고 주구장창 혼냈는데 사실 이 것 말고는 쓸 말이 없더라. 아이들의 심정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사실이었다. 수업이 아니었으면 이미 몇 년전에 대~충 읽고, 분석도 한 책을 다시 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류의 글이다. 말이 좋아 유,불,도의 사상을 종합하여 쓴 글이지 그냥 수박 겉핥기 아닌가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공자의 논어, 혹은 장자의 장자처럼 자신이 설파하는 하나의 도를 가지고 쓴 글을 읽으며 분석하는 글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시작부터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명나라 때 홍자성이 쓴 채근담과 청나라 때 홍응명이 쓴 채근담 이렇게 판본이 두개라고 알려져 있는데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있었고, 궁금해서 찾아 본 결과 최근 연구를 통해 동일인물이라고 밝혀진 것 같았다. 정확히 원문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번역본만으로는 두 책의 흐름이 꽤 달라서 신기했다. 한용운이 번역한 청나라 채근담, 혹은 최근에 홍응명의 저서로 번역된 판본을 살펴보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부분에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확장되는 형태로 목차화돼서 정리되어있다. 보통 이런 형태의 책을 좋아함에도 묘하게 읽기가 힘들어서 결국 명나라 채근담의 판본으로 왔는데 이 책은 전혀 반대로 아주 단순히 전편과 후편으로 나눠져있고 글도 두서없이 정리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훨씬 읽기 편했고 폐부를 찌르는 글들이 많아서 좀 놀라웠다. 문득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동일 인물이라면 분명 담겨져 있는 내용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같을텐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의 형태에 따라 이렇게 다른 느낌을 느끼게 되다니. 신기하기도 했고 정말 같은 저자라면 어떻게 같은 내용을 이렇게 다른 형태로 담았는지 저자에게 영향을 주었던 환경이나 혹은 상황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각설하고, 책을 다 읽은 지금에야 이렇게 흥미롭게 글을 쓰지만 사실 처음 책을 폈을 때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쭉쭉 읽어내려가기만 했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끌고 조금 더 채근담에 관심을 갖게 만든 구절이 등장했다.
입에 상쾌한 맛은 모두 창자를 문드러지게 하고 뼈를 썩게 하는 약이지만, 절반 정도면 탈이 없다. 마음에 유쾌한 일은 모두 몸을 망가지게 하고 덕을 잃게 하는 매개지만, 절반 정도면 후회가 없다.
책을 읽다 눈이 번쩍 뜨인 느낌. 약간 뒷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부제가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야 할 삶의 지혜'였다.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은 많다. 아주 깊은 근원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정말 실생활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 만한 실용적인 지식까지. 계속 싫어한다는 말만 하는 것 같지만 자기계발서 종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 삶의 변화를 얻어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성공한 누군가의 어느 일면만을 부각시키고 모두에게 천편일률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 따라와 라는 글 같아서 선호하지 않는 책의 형태다. 동일한 이유로 근래에 많이 나오는 에세이의 탈을 쓴 자기위안서도 그다지 읽지 않는다. 가볍게 읽을 수 있고 그 가운데 충분히 위로도 있지만 읽고 나서 그래서 나한테 어쩌라는 거지? 라는 질문은 두 분야 다 동일하게 나에게 남겨지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현실도, 낭만도, 용기도 없는 나한테는 가슴에 얹혀진 하나의 돌 같았다. 그런데 채근담에서 저 글을 읽는 순간 '자기계발서'에서 '자기위안서'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달콤한 음식은 내 몸에 해롭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실천하기 어려울 뿐. 좋은 음식은 입에 쓰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인생에서 매번 좋지만 쓴 음식만으로 괴롭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흥청망청 내 입에 좋은 것만 먹고 살자니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몸이 좋아지지 않는 것은 내가 가장 잘 느낀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한 쪽에서는 너 그렇게 살면 안돼, 라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너 인생이 아깝지 않아?라고 묻는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질문에 홍자성이 답을 던진다. 반만 하라고. 치킨 반반보다 더 진리의 말.
흔히 어느 한 쪽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박쥐같다고 비판하고는 한다. 나 또한 처음에 생각했던 채근담의 이미지가 그러했다.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도교도 아닌 이것저것 섞어서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뭘까 싶었는데 이 글을 읽는 순간 알았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바탕으로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하고자 하는 책. 혼란스럽고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채근' 식물의 뿌리처럼 소탈하되, '극단적인 성공이나 성취를 이루고 급격히 추락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이루었을 때 뒤를 돌아보고 내려놓고 물러서는 미덕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 역자의 말 발췌 - 이제서야 그 제목이 이해되었고 때로는 좀 소심한 것 아니야 싶었던 채근담의 글 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기쁨을 틈타 경솔하게 승낙해서는 안 되며, 술에 취했다고 해서 화를 내서는 안 되고, 유쾌함을 틈타 많은 일을 벌려서는 안 되며, 싫증난다고 해서 제대로 끝내지 않아서도 안 된다.
은혜는 박하게 베풀기 시작해서 후해져야 하니, 먼저 후하게 하고 나중에 박하게 하면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잊는다. 위엄은 엄격하게 시작해서 너그러워져야 하니, 먼저 너그럽게 하다가 나중에 엄격하게 하면 사람들이 그 가혹함을 원망한다.
가볍지만 깊은 말들. 그리고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하고 다짐했던 말들이 다시 한 번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또 느꼈다. 알고 있지만 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구나. 늘 이런 글들은 알면서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읽는 것 자체를 거리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어차피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이 책이 위안이 되었던 것은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다 그래.'라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역경과 곤궁은 호걸을 달련시키는 하나의 화로와 쇠망치이니, 그 단련을 감수할 수 있으면 몸과 마음에 모두 이롭고, 그 단련을 감수하지 못하면 몸과 마음에 모두 손해가 된다.
모든 사람이 영웅이나 호걸은 될 수 없다. 역경과 곤경을 너를 단련시킨다고들 말하지만, 때로는 그 곳에서 더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렇듯 너만 그런게 아니야, 남들은 다 멀쩡하게 대처하는 것을 너만 어리석게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위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세속과 너무 같게 해서도 안 되지만, 또한 세속과 너무 다르게 해서도 안 된다. 일을 하는 데 있어 남이 싫어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또한 남을 기쁘게만 해서도 안 된다.
가끔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희망과 절망의 틈새에서 때로는 열심과 게으름 사이에서 스스로를 다그칠 때가 있다. 너 이렇게 살면 안돼. 너는 왜 꿈이 없어?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이 그게 끝이야? 나 자신을 채찍질하다가도 나는 이제 틀렸어, 현실에 안주할래, 그냥 여기 있는게 좋아. 포기하고 눌러앉는 내가 싫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갈등하는 내가 싫어 가끔 나를 극단으로 몰아넣을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삶이라는 게 다 그런거다. 모두 다 현실의 괴리에서 매일매일 한 발씩 내딛고 있다는 것.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길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았던 책에서 생각보다 많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다. 책 속에 담긴 생각을 제대로 해석했는지 못했는지 잘 모르겠고 누군가는 그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나중에 이 글을 다시보고 이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떨까. 그것 또한 괜찮지 않을까 싶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이 생각이 빛을 발하는 것은 내가 이 다짐대로 살아갈 때 아닐까. 어떤 좋은 책을 읽어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니까 말이다.
베 이불을 덮고 움집에 살아도 마음이 즐거우면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얻고, 명아주 국에 밥을 먹고 나서도 입맛이 만족스러우면 인생의 담박한 참맛을 안다. <채근담>, 홍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