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만났던 사랑스러운 아이들과의 일화입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만나는 아이들, 한 두 살 터울이 뭐라고 5세부터 7세까지 제각기 다르다. 처음 만났던 그때에 내가 머릿속으로 이 아이들을 모두 잔뜩 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아이들은 그런 고민 없이 내게 와락 안기고 귓속말로 "사랑해요."라고 했다. 어찌나 예쁘던지 마음이 뻐근했다. 한 명, 한 명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기분.
지난 금요일에 6살 반 아이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해주던 때의 일이다.
우리는 요즘 "The Big Red Barn"을 읽고 있는데, 내용 중 밤이 돼서 동물 친구들이 모두 자러 갔다. 저녁부터 밤까지 시간 개념을 가르쳐주던 때, 연우라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깜깜하면 망태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잡아가요."
'망태 할아버지', 아직도 이 괴담이 아이들에게 도는구나 싶으면서 웃겼다.
내가 어릴 때 말 안 듣는 어린이들, 늦게까지 잠 안 자는 어린이들을 망태에 담아서 잡아간다는 무서운 할아버지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 괴담이 2010년대 생의 아이들에게도 먹이는구나.
어디서 시작된 망태 할아버지일까? 갑자기 궁금해져 생각해보니, 시작은 만화 '꼬비 꼬비'에서 나오는 도깨비였다. 낮에는 망태기였다가 할아버지로 변해서 실제로 아이들을 잡아가는 장면도 방영되었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는 그 만화를 내가 직접 보아서 그런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캐릭터가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런데 지금의 어린이들은 꼬비 꼬비의 망태 할아버지가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지는 어떤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공포심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주는 묘한 부정적인 어감이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차별의 언어가 되고 있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에이지즘(ageism)'이라고 부르는 그 차별은 인종차별, 성차별과 더불어 매우 심각하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아이들을 훈육하는 수단으로써의 괴담에서 출발해 너무 사소한 것에서 내가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닌가 하는 혹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이들에게야 말로 워딩은 너무도 중요하지 않은가. 차라리 도깨비가 나을지도 모른다. '도깨비'는 공유가 얼마든지 순화시켜 놓았으니까.
'영감탱이' '할망구' '늙으면 죽어야 돼.' '노친네' 등의 마음이 아픈 말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도깨비뿐이다. 죽기 위해 인간은 모두 늙는다. 늙은 이, 그러니까 '노인'을 하나의 조롱이나 배척,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말은 삼가길.
우리가 한 때 모두 어린이 었듯이, 노인 또한 우리 개개인의 생애주기적 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것.
나는 그날 연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붙잡고 망태 할아버지의 어원을 알려주지도 못했고, 도깨비로 정정해 주지도 못했지만 사소한 것에 사로잡힌 나의 금요일의 생각은 이렇게 일요일 밤에야 마침표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