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그미 May 03. 2024

나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이유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스마트폰, 태블릿, tv, 컴퓨터... 사무실에서 문서 생산용으로 다루는 업무용 컴퓨터 말고는 다 오락기기입니다. 저는 이 전자기기들 가지고 뭔가를 생산하거나 창작해 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태블릿 가지고 만화 몇 개 그리다가 관둔 거, 노트북으로 어쭙잖은 브이로그 편집하다가 관둔 거, 진짜 뭔가를 '만들어본' 경험이 이 정도로 일천합니다. 그러면 이 기기들로 뭘 했느냐?

소비요.


유튜브 소비, 게임 소비, 웹소설 소비, 쇼핑, 기차표 예매, 등등. 저는 손에 쥔 돈으로 소비만 하는 편이에요. 틈만 나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자, 이 세계의 변화를 무지성으로 따라가는 평범한 이. 식과 정보가 아닌 밈을 학습하고, 그 말초적 재미를 위해 때로 아기와의 교감도 뒷전으로 할 정도로 한심하며, 뉴런이 점점 짧아지는 사태를 미지근한 물속의 개구리처럼 둔감하게 받아들이는 자. 생산자들이 도파민을 제공하며 내 주머니를 노리고 있고, 나는 아무 저항 없이 가진 대로 끝없이 털리고 있고. 그렇습니다, 예. 저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잖아요? 나 같은 사람이 많으니까 콘텐츠 생산자들이 돈을 버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었어요. 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질투할 때도 있었다고 했죠. 그런 질투심에 비해 자괴감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는 다시 콘텐츠 소비자로 성실하게 소비할 뿐이었어요. 조회수를 올려주고, 어떤 채널, 계정, 작가, 등등 아무튼 창작주체들의 성장과 성공을 부러워하면서, 그냥 콘텐츠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만으로 보람찬 시간을 보내면서. 전형적인 감상자로 머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아요? 능동적으로 나서보기도 하지만, 그중에 창작자로 입장을 진짜 바꿔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봅니다. 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 그런지 세상 사람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저는 즐기고 있었어요.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얄팍한 흥미를 따라. 그런데 무슨 변고인지 즐기던 것들에서 자꾸 다른 교훈을 얻게 되더군요. 별일이야, 진짜.


작년 리그오브레전드 월즈 경기를 챙겨보기 시작한 건 분명 흥미 때문이었습니다. 가끔씩 즐겨 듣던 월즈 테마곡을, 2023년에는 무려 뉴진스가 가창했다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2022년 월즈 우승을 차지한 데프트 선수의 이야기가 담긴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그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롤판을 사로잡은 우승 이야기에 감동을 받으면서, 2023년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슬슬 키웠어요. 그러다가 롤 선수들의 이야기가 차츰 더욱 흥미로워지고, 유명한 선수들의 다큐멘터리를 몇 편 보다 보니 롤을 종목으로 하는 e스포츠 리그가 너무 재미있어요. 몇 달 내내 그 선수들과 관련한 콘텐츠를 소비했습니다.

페이커 선수는 천재적인 실력으로 처음부터 조명받았지만, 선수생명이 짧은 e스포츠계에서 오랫동안 현역으로 남아 귀감이 되더군요. 축구계의 리베로처럼.

표식 선수는 인터넷 방송을 하다가 프로 선수로 우뚝 섰다는군요. 데프트 선수와 함께 월즈 우승을 차지했고요.

데프트 선수와 케리아 선수는 같은 팀에서 동고동락하다 '22년 월즈 결승에서는 상대 팀으로 맞붙었다는군요. 승부가 결정된 뒤 두 선수가 포옹하는 짧은 장면이 여러 사람들의 댓글에 회자되더라고요. 역시 스포츠에는 드라마틱한 감동이 있어요.

정말 재미있다. 생중계를 조금씩 챙겨보자 유튜브 알고리즘은 눈치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너 롤 좋아해? 이것도 봐. 저것도 봐. 맛만 봐. 잡숴 봐'하는 양 쇼츠며 영상이며 제안하더군요. 무지성 소비자답게 떠먹여 주는 대로 먹었어요. 그러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꾸 '노력'에 관한 개념이 생겨나더군요. 선수들의, 노력. 선수들 각자의 커리어가 획득한 서사. 서사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의 연습, 노력. 서사를 곱씹다 보니 자꾸 그들의 노력에 대해 짐작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어쩌면 나는 적당히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일지도? 그래서 이 정도 적당한 결과만 누리며 사는 것일지도 몰라.' 이런 반성인지 자기 긍정인지 모르겠는 생각도 하고요.

그냥, 웃고 싶었는데, 자꾸, 경건해지려고 하니까, 노력과 결과의 드라마에 자꾸 감정이입하게 되고, 그러니까... 드러누워 있을 수가 없어지려고 하네... 이거 뭐, 어떡해야 돼요?


최근 새로 빠져들게 된 유튜브 채널이 있습니다. 이 유튜버는 음악교육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면서, 본인의 경험과 유머감각을 살린 영상을 만듭니다. 제가 피식대학 다음으로 재미있어하는 채널이에요. 힙합 경연프로그램인 '쇼 미 더 머니'를 따서 '쇼 미 더 클래식'을 기획해 1인 다역 연기를 하더군요.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를 잘하는데 다른 연주자를 익살맞게 따라 하기도 하고요. 연주실력에 감탄 반, 능청스러움에 웃음 반, 그렇게 영상을 또 하나, 둘, 아니 새로 발견한 이 채널이 아직 궁금하니 몇 편 더... 이런 식으로 평소처럼 영상을 소비하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머리를 감다가 그 웃긴 영상이 불현듯 떠올랐고, 머리를 뒤집은 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그렇겠구나. 거장의 연주를 듣는 것도 노력이고, 직접 연주를 연습하는 것도 노력이네.' 각해 보니 그렇겠더라고요. 잘하는 사람들의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도, 자기 몸으로 그 음악을 실현하기 위한 연습 역시 계속하고 있었겠어요. 그게 그 분야를 연마하는 방법인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제껏 보고, 읽기만 했지 쓰는 건 잘 안 했어요. 그러면 글쓰기를 연마하는 게 아닌 거죠. 나는 계속 소비자인 채로만 존재하게 되는 거죠.

읽고, 보고, 즐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그것만 보느라 쓰지 않으면, 난 영원히 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악기 연주자들은 거장의 연주든, 동료의 연주든, 들으면서도 내 연주를 위한 연습을 계속하죠. 그래야 나로부터 좋은 음악이 나오니까요. 오...! 나는 사고방식부터 글러먹어 있었다! 오늘도 또 다른 내 잘못을 발견하고 말았어요! 나는 내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것이 내 글이니까!


잘못 찾기는 이제 그만하고, 내가 글을 안 썼다고 해서 나만의 언어유희를 안 하고 살았던 것도 아니에요. 가족,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내 머릿속에 튀어 오르고 날아내리던 생각들을 조금씩 드러냈고, 그 배출을 통해 글을 쓰지 않고도 평온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대화할 시간은 갈수록 턱없이 부족해지고, 나는 출산과 육아로 삶의 격변을 겪으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점점 쌓이고 있습니다. 아이의 발달을 지켜보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남동생에게 '아이가 자라는 동안, 우리는 함께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더니, 남동생이 날 빤히 쳐다보더니, '난 요즘, 지나친 미사여구가 든 말을 들으면, 어우 개똥철학! 이렇게 한마디 해.' 이러는 거예요. 아니, 아무리 제 한 몸 먹여 살리기 바쁜 미혼 청년이라고 해도 그렇지, 내가 미사여구로 내 삶을 한 번 치장했기로서니, '개똥철학'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합니까? 예? 에? 저 너무 속상해요. 좌충우돌하는 나의 육아생활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 마음을 참고 참아서, 함축적으로 전달해 청자의 이해를 받고 싶었던 것뿐인데, 개애또옹철학이라니요, 개똥철학이!

 

잠시 흥분했군요. 이제 심호흡을 하고, 이번 편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세 줄 요약할게요. 1. 나는 평소대로 타성에 젖은 채 콘텐츠 소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2. 어떤 콘텐츠들이 오락적 효용을 넘어서 나에게 노력의 가치를 일깨우며 삶의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3. 덕분에 나는 콘텐츠 소비자에 그치지 못하고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웃다 보니 갑자기 싸하게 깨달음이 오는 바람에, 요즘은 좀 더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글 잘 써지네요. 대화를 많이 못하고 살다 보니 이렇게 내 이야기를 적어 놓는 것이 점점 더 즐거워져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것 같아요. 숨기고 싶었던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어딘지 조금 후련하기도 해요. 전 지금 이대로 세상에게, 내 삶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멀리까지 어느 표면에 닿을지 모르는 상태로 내 빛을 보내는 기분이에요. 누가 이걸 받아 반사파를 보내줄지 모르겠는데, 아니 그런 반응 없이 내가 쏘아 보내는 파동은 그냥 암흑 에너지가 되어 버릴 수도 있긴 한데요, 근데 제가 재미있네요. 예, 이것도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 것만큼 재미있어요.

작가의 이전글 나의 글쓰기를 향한 인력과 척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