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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Apr 28. 2024

나의 글쓰기를 향한 인력과 척력

물리쳐야 할 것은 결국 나였다

아직 대학생이었던 어느 날, 가족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나에게 '언니는 뭐 하고 살 거야?' 물었고 나는 '글쎄, 글 쓰면서 살면 좋겠는데'라고 대답했죠. 늘 하던 대로 식사에 술 한 잔 즐기던 아버지가 픽 웃으며,

'글 쓰는 걸로 사는 게 쉬운 줄 아냐,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어야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에 나는 꺾였을까요, 안 꺾였을까요?

그 말에 꺾이는 게 맞겠습니까, 안 꺾이는 게 맞겠습니까? 꺾이기에는, 그건 너무 우리 아빠다운 말투라 익숙한 탓에, 나를 꺾으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겠고. 안 꺾이기에는, 뭘 써서 밥벌이를 해결해 본 적이 없으니 떳떳하지가 않고요. 평소에 칼 벼리듯이 뭘 막 써놓은 것도 아니고, 습작도 없고, 어디 배우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딱히 꺾이지도, 안 꺾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어중간한 나를 충격받게 할 일화가 못 되었거든요.

다만 안 쓰는 핑계로 이 일화를 써먹곤 했습니다.

"글쎄, 우리 아빠는 글 쓰고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어야 한다던데?"

내 재능은 비범치 않고, 우리 아빠 기준으로는 날더러 글 쓰라고 하지 않는다는, 그런 함의가 담긴 말로 글 쓰라는 권유를 떨치고, 뒤돌아 혼자 있을 때면 과연 내가 글 쓸 수 있는 게 맞나, 이쯤이면 괜찮지 않나 근데 지금도 안 괜찮은 것 같고, 어떡하지? 줄줄이 필요 없는 생각만 하다 하루를 마치기도 했어요.

이쯤 되면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하죠.

아니, 쓰라고. 일단 쓰면 뭐든 나오긴 하잖아.

맞아요... 맞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머리로는 아는데 실천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글쓰기를 향해 근근이 이어지는 내 갈증과 결국 못 쓰는 내 타성은 오랫동안 서로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실천역행이 안 된다는 점은 내 인생을 괴롭히는 문제이고요.

저 MBTI는 T 나오는 사람입니다. 과외할 때 학생이 '시험을 잘 보고 싶어요' 하면 '그럼 공부를 해'라고 대답합니다. 아니, 시험범위가 있고, 그걸 공부해서, 문제를 맞히면 되잖아. 아 선생님, 말이 쉽죠.

저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거든요. 아니, 주제를 정하고, 그에 관하여 쓰고, 몇 번 퇴고하고. 그러면 되잖아.

근데 말이 쉽죠, 그게 그렇게 줄줄이 쓰는 게 안 돼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내 글 깎기가 안 된다고요.


공부를 못하다가 잘하게 되는 건 어떤 깨달음의 문턱을 저도 모르게 지나가면서 가능해집니다. 성적 향상을 이뤄본 친구들은 알 것입니다. 국어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매번 80점 맞다가 갑자기 저도 모르게 뭔가를 깨달아요. 그러고 90점대의 벽을 넘어 올라가요. 그 뭔가가 뭔가인지는 각자 다릅니다. 어떤 이는 개념이 확실히 이해가 되어서, 어떤 이는 문해력이 조금 나아져서, 어떤 이는 드디어 지문 속의 정보를 연결하는 논리력이 생겨서! 그거 하나가 해결되니까 점수가 날아올랐어!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그 하나가 내 것이 되는 게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비가 될 때가 있어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그 전의 내 머릿속에 안개 같은 것이 끼어 있다가 이제야 걷혔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몹시 답답하죠. 답답한 상황인 줄은 알지만 나를 가둔 안개가 있는 줄은 모른 채 하던 대로의 노력만을 계속합니다. 어떤 우연한 계기 같은 것으로 한 단계 나아간 뒤에야 알게 됩니다. 나는 안갯속을 걷고 있었다! 그 안개가 걷히고 내가 원하던 것 하나를 얻었다! 안개의 존재를 안개를 제거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겁니다.


뭔가를 못하는 이 답답한 상황에서 나에게 낀 안개는 정체를 알기 어렵습니다. 나는 그간 나 자신이 나에게 지독한 안개를 씌웠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 그게 나에겐 추진력이 되지 못하고 독소가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로 글을 쓸까, 이게 멋진 것 같은데. 하지만 난 그에 대해 잘 모르는데, 뭐라고 쓰지... 그러면 이 분야에 관해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하는 동안은 못 쓰는 건가? 난 바로 쓰고 싶고 빨리 칭찬받고 싶어. 이런 조급증. 공부도, 노력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조급증. 하지만 내가 쓴 글은 칭찬받아야 해. 잘 썼다고. 이런 자기 기대. 인지부조화가 있는 상태를 못 이기는 것도 문제고, 그런 상태에 내가 있다는 걸 인지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예요.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저렇게 한심할 수가 있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이게 도저히 안 풀리는 문제인 상태로 계속 끌어안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네, 그렇답니다.


글 여러 편에 걸쳐서 내 안의 가장 큰 적에 관해서 말하곤 했습니다. 결국 내 안이 가장 병든 부분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곪아버린 나를 그림자처럼 계속 붙이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명암이 있어요. 조급증과 붙어 다니는 게으름. 이 둘은 내 응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안 되는 이유를 또 찾아내려고 들지도 모르죠.

이게 내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척력이었습니다.


삶의 역설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역설적인 것들을 꽤 좋아합니다. '나의 글쓰기' 시리즈를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왜 쓰지 못하는지를 속속들이 까발리고 있고, 이렇게 자세히 나를 반추하면서, 나는 진짜 부끄러운 구석이 있는, 정말 깊고 깊은 찌질함을 가진 사람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나를 둘러싼 긍정적인 삶의 신호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내핵을 끌어안고 글쓰기에 좌절하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해줬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블로그를 열심히 쓰던 시절 그걸 읽어 준 친구, 글 쓰라며 연필이나 펜을 선물하던 연애 상대, 동아리 카페에 작성한 공연 후기를 보고 곧장 기형도 시집을 사다 주시던 까마득한 고학번의 선배님, 브런치 플랫폼이 처음 생겼을 때 나에게 이것을 알려주며 작가 지원해 보라고 권하던 친구, 초등학교 때 썼던 동시 노트는 대체 어디를 간 거냐고 몇 번이고 찾으시던 엄마... 네 권쯤 되던 동시 노트는 제가 몰래 버렸어요, 엄마. 나는 그 공책들이 부끄러운 건 줄 알았는데, 간직하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을. 엄마가 옳았어요.

사실 아빠는 밖에 나가서 나에 관해 '걔는 책 보고 글 쓰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라고 표현했다는 것을, 어렸을 때 내가 봄날 나뭇잎에 대해 말하던 감상을 듣고는 엄마더러 '나 같으면 그런 표현은 생각 못 해낸다'라고 칭찬했다는 것을, 알아요. 글 쓰며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내게 핀잔을 주듯이 한 마디 던졌던 것은 사실 나를 걱정한 말이라는 것을, 알죠. 내가 나 자신을 반신반의하는 것처럼, 아빠도 딱 그 정도 반신반의였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그 반반의 징조 중에서, 안 되는 쪽으로만 징조를 고른 건 내가 책임져야 할 과거이고, 이제부터 그 징조들을 되는 쪽으로 재발견하고 양분으로 삼고자 하는 건 새로운 선택입니다.


신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시도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신의 계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이 나에게 자꾸 던져 주는 힌트가 있다면 이런 걸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도 동료 중에 한 분이 나더러 자꾸 쓰라고 하십니다. 조금씩이라도 쓰라고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글 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체한 듯 거북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그런 말을 들으면 아주 깔끔한 기분으로 '네, 쓸게요'라고 대답합니다. 쓰는 것에 거리낌이 줄었기 때문에, 대답할 때에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졌어요. 어때요? 내 안의 안개를 걷어나가는 개운함을 느끼고 꼭 풀고 싶었던 인생 숙제를 해결해 가는 재미를 맛보려 하는 나. 좀 그럴싸하죠? 기분이 좋겠죠? 두근두근, 설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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