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다. 이안네 차를 얻어타고 공항버스 정류소에 가기로 했다. 남편과 6시 30분에 인사를 나누고 길을 나섰다. 새벽공기를 참 오랜만에 맞는다.
7시 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한다. 공항에 도착하여 캐리어를 열고 짐정리를 한바탕 했다. 전날 밤까지 정리하던 가방인데, 왜 지금도 정리할 게 남아있는 걸까? 보조배터리는 들고 타기, 당장 신지 않을 신발은 캐리어에... 가방을 정리하고, 현금을 통장에 입금하고 표를 발권하고 수하물을 맡긴 뒤 이날의 첫 끼를 먹었다. 공항에서 먹는 비빔밥이 왜 이렇게 귀하게 느껴지는지! 그 사이에 여유롭던 시간이 왜 갑자기 빠듯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지? 출국장으로 긴 줄을 기다렸다가 면세점에서 주문한 물건까지 수령하고 나니 비행기 탑승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3시 북경행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비행 후 도착. 북경 수도공항에서 공항철도를 타고 왕푸징 거리로 나간다. 공항철도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1시간 남짓 걸렸다.
왕푸징 거리에는 우리나라의 한옥마을, 경복궁 등 관광지에서 한복을 입고 노는 것처럼 젊은 여자들이 옛날 복식에 머리, 화장으로 한껏 치장한 채 거리를 누비고 있다. 왕푸징 거리가 자금성의 동쪽이니 궁궐 근처 길에서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즐기는가 싶다. 우리나라 서울의 인사동, 북촌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걸까.
왕푸징 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미니소였다. 에어차이나 항공사를 이용하는 우리는 북경을 경유하여 카이로에 도착할 것인데, 비록 경유지만 공항을 나가 잠시 체류하고 오는 우리는 입국심사와 출국심사를 다시 받는다. 이때 북경공항에서는 보조배터리 소지에 관해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고 한다. 이미 집에서 짐을 쌀 때부터 배터리는 KC 인증을 받은 것으로 신경써 챙기긴 했지만, 최근에는 기내에 가지고 탈 수 있으려면 KC인증으로 모자라고 CCC인증을 마친 것이어야 한다고. 이런 규제국가가 있느냐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배터리를 버리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데, 그럼에도 혹시나 만약에 말이다, 'CCC인증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터리를 버려야 하는 상황을 당할 수도 있지 않으냐. 이런 이유로 미니소에서 보조배터리를 샀다.
미니소에는 다양한 캐릭터 상품이 많아 눈을 많이 빼앗겼다. 탐나는 캐릭터용품이 꽤 많았지만(산리오 캐릭터 상품 앞에서 나는 정말 오래 망설였다), 아주 필요한 배터리와 적당히 필요한 지퍼백과 필요는 없지만 그저 귀엽기만 한 어린이용 칫솔을 샀다. 휴대용 물병을 아이에게 사다 주고 싶었지만 앞으로 기념품을 많이 사 챙기려면 벌써부터 짐을 늘릴 수 없다.
늦은 오후를 지나고 있던 거리는 미니소 구경을 마치고 나오자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연말연시여서인지 거리에 가로수들이 전구 옷을 입고 있다. 넓고 평평하게 정비된 길은 쓰레기나 오물 없이 깨끗하다. 2008년에 북경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 서울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곳이로 여겼으며, 그저 대륙인지라 모든 게 넓고 크다는 점만 기억할 뿐이었다. 나는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옛 북경 방문의 기억에 이런 장면은 없었다고 연신 놀란다. 깨끗한 거리, 무선통신망 인프라, 밝은 가로수. 크고 시끄럽고 지저분하다는 인상만 남았던 예전 이야기는 더이상 하면 안되겠다. 왕푸징 거리는 걷기 좋고 반짝반짝 빛났다.
저녁식사를 위해 전취덕 왕푸징점을 찾아갔다. 이안은 대만에서 북경오리를 먹어봤으나 그저 그랬다고 한다. 나는 거의 20년 전에 북경에서 처음 그 요리를 먹어본 기억이 좋았다. 북경식 오리인데 북경에서 먹어보자고 말하며 지도를 따라 걸었다. 식당이 5층짜리 건물 한 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5층으로 안내받아 오리 반마리와 절인 오이, 북경식 자장면을 먹었다. 한참 먹고 식사 마친 후에야 내가 예전에 방문한 전취덕 식당은 천안문 남쪽으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본점이었음이 생각났다. 어쩐지 그때 그곳과 다른 거 같더라.
반드시 본점에 가야한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으니 상관없고, 음식은 맛있었다.
항공사에서 예약해준 숙소로 돌아와 씻고 한 시간쯤 눈을 붙였다.
오는 길에 보니 북경 시내에는 스쿠터와 오토바이, 전차와 승용차가 모두 다닌다. 스쿠터가 아주 많다. 날이 추워서 스쿠터 손잡이부터 무릎까지 가릴 수 있는 얇은 이불이 스쿠터마다 끼워져 있었다.
스쿠터, 오토바이가 많아서인지, 경차가 드물다. 도로를 달리는 차는 대부분 중형 이상이었다. 역시 대국은 큰 것을 좋아해. 또한 전기차가 많다. 독일 3사의 차량과 BYD, 체리 등 중국 차들이 많고 한국 회사의 차는 거의 없었다.
음식점마다 배달 라이더들이 바삐 드나드는 모습은 우리네 사는 모습과 같았다.
1월 4일 새벽 2시, 카이로행 비행기를 탄다.
다행히도 보조배터리를 하나도 압수당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출국 심사에서 여권 사진과 내 실물을 골똘히 비교당하는 일을 겪었다. 8년 전에 발급한 여권이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다름이 있기야 하겠지만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진까지 요구하다니, 거 참. 집에도 못 갈 뻔했네.
드디어 진짜 목적지로 떠난다.
12시간 동안의 비행은 12시간의 밤을 지내는 것과 같았다. 북경의 새벽 2시에서 카이로의 아침 8시까지. 밤이 지나는 길을 우리 비행기가 따라가는 것처럼 하늘이 검었다. 창가에 앉은 덕분에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내내 야경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내려앉은 산맥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있었과, 산맥을 따라 불이 밝혀진 곳도 있었다. 넓은 고원지대를 지나고 키르기스스탄과 우주베키스탄을 지날 즈음부터는 마을이나 도시가 구분될 정도로 빛이 보였다. 각 나라 상공마다 야경의 생김새는 조금씩 달랐다. 튀르키예를 지날 때쯤의 야경은 화려하기까지 했다. 어떤 도시는 정말 불붙은 불사조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양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