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좋아하지만 카페인에 잠을 빼앗긴 자의 주문
오후 12시를 넘겨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수 없다.
남들은 카페인을 먹으면 각성 효과라도 있다던데 나는 잠이 깨거나 일의 능률이 오르는 일은 전혀 없고, 그냥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큰 소리로 쿵쿵댄다. 맛을 즐기고 싶어 먹은 거니 그러려니 하는데, 그래 놓고는 한 밤중에 각성이 찾아온다. ‘엄청나게 졸린데 잠이.. 안 오네.... 왜지?!’ 뭔가 이상해 하루를 되짚다 보면 오후에 마신 커피, 밀크티, 심지어는 초코 우유 때문인 적도 있다. 아.. 세상에. 초코우유는 진짜 너무하지 않나? 그런 날에는 침대 밖에서 2시, 3시까지 나를 지치게 한 후 다시 누워도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우게 된다.
8시간의 수면이 인생을 크게 좌지우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밤을 몇 번 지내고, 커피 마시는 시간을 확인해 가며 내린 결론은 오전에 마시는 커피만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침잠이 많다. ㅎㅎ...ㅎㅎㅎ.
커피 맛을 좋아한다. 고소하고, 은은하고, 다양하고, 향긋하고, 맛있다. 커피를 먹고는 싶고, 잠은 자야 하고, 함부로 먹을 수는 없고. 그렇게 나는 ‘맛있는 디카페인 커피’라는 환상의 무언가를 찾아 돌아다니는 슬픈 운명이 된 것이다.
디카페인 원두는 비싸다. 잔에 500원, 700원을 더해야 한다. 한 번은 추가금 1200원을 보고 ‘아 이건 아니지!!!’ 하고 카페를 뛰쳐나온 적도 있다. 과금이 없는 곳을 만나면 사장님에게 악수라도 청하고 싶은 마음이다. 추가금을 내고 마실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한참 걸려 제일 맛있어 보이는 카페를 찾았는데 메뉴판에 디카페인 옵션이 없다면 다시 카페를 찾아야 한다. 한참이나 카카오맵과 뽈레 앱을 뒤적이는 방랑자가 되곤 한다.
디카페인을 팔지 않지만 너무 아름다운 카페고, 만날 사람과의 위치도 적절하고, 영업시간도 적당하다면 더 이상 까다로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냥 밀크티나 자몽에이드 같은 걸 시킨다. 커피 향이 진동을 하는 카페에서 눈물을 머금고 일행이 마시는 커피를 한 입만 얻어먹는 일도 종종 생긴다. 사실 디카페인 커피를 팔더라도 대체로 카페인 커피보다는 싱겁고 맛이 없으므로 카페인 따위가 잠을 방해하지 않는 튼튼한 심장의 주인들에게 한 입 적선을 받는다.
디카페인 커피를 시키면 가끔은 탄 맛만 나는 곳도, 알 수 없는 맛이 나는 곳도, 정말 그냥 아무 맛이 안나는 곳도 있다. 색과 향과 형태는 내가 좋아하는 그 커피지만 이 속에 어떤 것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서스펜스. 맛있어라.. 맛있어라.. 기도를 하고, 맛 기준에 통과한 곳을 만나면 행복한 눈물을 속으로 흘린다. 다음에 또 만나요 우리.
원래는 바닐라 라떼 파였다. 대체로 맛이 없기 마련인 디카페인 커피에 바닐라빈 시럽의 축복이 내리면 비슷비슷하게 맛있는 안전한 선택지가 되어 줬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액상 과당’의 무서움을 슬슬 느끼면서.. 거기에 정기 검진에서 당뇨 주의군까지 뜨면서 양심상 바닐라빈 시럽을 잔뜩 넣은 커피를 시키기기엔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마침 동네 카페였던 ‘솔이네 커피 볶는 집’에서 별 기대 없이 라떼를 시켰다가 진득하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 따끈하고 담백한 라떼에 맛을 들일 수 있었다. 맛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된 후로는 맛이 대충 그 근처에만 가도 먹어줄 수 있게 된다. 신묘한 일이다.
마시는 사람의 혀를 생각해 적당히 따뜻한 라떼를 내어 주는 섬세한 카페도 있지만, 대체로 커피가 뜨겁다. 어묵 국물을 마시다가도 잘 데는 내 혀는 거품을 즐기다 불쑥 나온 커피에도 자꾸 데곤 한다. 마시기 적당한 온도로 주세요,, 라는 주문은 좀 과한 것 같고. 그러다 또 끝내주게 향긋하고 맛있는 아이스라떼를 ‘자고로 커피’에서 맛본 후 지금은 아이스 라떼를 더 자주 시킨다. 사실 그냥 맛있으면 먹는 것 같다. 줏대가 그리 강한 편은 아닌듯. 또 추워지면 따뜻한 라떼를 먹겠지 뭐.
아이스라떼를 시킬 때마다 태국 카페에 적혀 있던 ‘Iced coffee kills barista(아이스커피는 바리스타를 죽이는 짓이다)'라는 문구를 떠올리며 약간 으음 했다가, 그곳 직원들도 아이스 라떼를 먹고 있어서 안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당당히 주문한다. 단, 내 기준 보통의 카페에서 아이스 라떼에 담아주는 얼음의 양은 너무 과하다. 일단 너무 차가워서 처음 마실 때부터 입술과 입 속이 차고 둔해져버린다. 머리가 쨍하게 차가운 맥주를 사랑하지만 다른 차가운 액체는 썩 빨리 들이킬 수도, 그렇고 싶어 하지도 않는 특이 체질이라 이 온도가 싫다. 게다가 음료를 엄청 천천히 마시는 사람이라, 두 모금에 벌써 물 맛이 나기도 하고,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커피도 아니고 물도 아닌 얼음 버무리가 남아있기도 하다. 역시 여러 시도를 해본 결과, 청량하고 깔끔한 라떼의 맛을 끝까지 즐기려면 얼음 3개 정도가 적당하다는 결론을 냈다.
어찌 되었건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카페에서, 나의 주문은 이렇게 자꾸 길어진다.
“아이스 라떼 디카페인으로 주시고요, 혹시 얼음 3개만 넣어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ㅎㅎ 아 텀블러에 담아 주시겠어요? 빨대 주지 마시구요..!”
물론 이 중에 하나는 빠지곤 한다. 디카페인만 사수했다면.. 그 외에 것을 빼먹는 나, 그리고 한 가지를 누락한 바쁜 카페 점원 분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려 한다.
오늘도 맛있는 라떼를 찾아 떠나는 나에게 ,, 치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