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동의 생일
가을 맛이 물씬 느껴지는 밤 라떼를 한 모금 마신다.
나는 지금 보라매 공원을 달리기 전에, 밥 먹은 지 3시간은 지나고 뛰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내가 달리기를 하러
이따가 일하러도 가야 하는데
달릴 때 좋을 옷을 입고 양말, 신발을 챙겨 신고는
모자도 쓰고 애플워치를 차고
충전기와 겉옷과
바람 빠진 자전거에 바람 넣을 펌프까지 챙겨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계단을 내려
처음 해봐서 진땀 빼며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이제 땡글해진 자전거를 타고 15분을 달려
달리기를 하러 왔다.
해야 해서도 아니다. 피티 쌤이 오늘은 제발 달리세요 한 것도 아니다.
어제도 근력 운동에 달리기까지 해서 몸에는 알이 배겨 있다.
오늘은 그냥 밖에서 달리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두근대며 여기와 앉아 있는 것이다.
세상에, 나 정말 많이 바뀌었구나.
올해 봄, 나의 몸에 대한 정말 진지한 고찰을 안겨 준 사건 3개가 연달아 터졌다.
사건 1, 나의 체력 부족과 데이트 불가의 건
남자친구가 데이트 계획을 짜오지 않는 게 늘 은은하게 불만이어서 작게 터트린 날, 남자친구가 정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무슨 계획을 짜려고 해도 네가 체력이 너무 힘들까 봐 가자고 못하겠어.’
띠용 대용.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물론 체력이 좀 부족한 편이긴 하지만... 무슨 할머니 모시고 가족 여행 가며 등산은 좀 무리겠지? 하듯이 내 체력 때문에 데이트 계획을 못 짜겠다니??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사건 2, ‘누리가 요새 조금 불필요하게 많이 쪄있지?’
온 가족이 모여 술을 한 잔 걸치다 말고 아빠가 던진 저 말에 나는 충격으로 멈춰 있었다. 뭐 그런 소리를 하냐부터 ‘에이 그 정도는 아냐’라는 말들이 흐릿하게 기억난다. 앉아서 일하는 개발자가 되면서, 잦은 야근과 야식으로 한 5킬로 정도 쪄있기는 했지만 ‘불필요하게 많이?’ 아빠가 나한테 저렇게 직접적으로 살이 쪄있다는 말을.. 한다고?? 우리 가족은 서로의 신체 구성에 대해 지적을 하지 않는다. 평생 얼굴이 어떻다거나 키가 작아서 걱정이라거나 옷을 어떻게 좀 입으라거나 살을 빼라거나 찌우라거나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역사가 없다. 엄마가 지나가듯이 맨날 그렇게 큰 옷만 입어서 살찌는 거 아냐?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직접적이잖아. 불필요하게라니??
사건 3. 꽃구경
밖에 봄꽃이 한창인데 나는 며칠째 집에서 거의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몇 주 칼퇴하고 쉬고, 주말 내내 누워서 쉬었더니 힘이 좀 나는 것 같아 꽃구경에 나섰는데, 굼벵이처럼 걷다가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8주간 회사일과 ‘나 찾기 프로젝트’를 병행한 후유증이었다. 퇴근 후 11시까지 에세이를 쓰고 집에 와서 또 2-3시까지 글을 쓰고, 주말에는 8시간씩 강도 높게 토론을 이어갔으니 힘들 만 하긴 했지.
세상은 다 빠르게 굴러가는데 나의 몸은 세상 천천히 움직였다. 몸도, 발도, 얼굴도 무거웠다. 발을 들어서 내려놓고, 다시 다음 발을 들어 내려놓는 하나하나가 슬로우 모션이었다. 시야도 뭔가 뿌옇고 흐릿하고, 귀도 웅웅 거리고. 흩날리는 꽃잎보다 의자를 더 열심히 찾아 걷자니 등과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 겨우 의자에 앉아 몇 그루의 벚꽃나무와 목련과 개나리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아무리 저질 체력이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나의 꿈은 개발에 있지 않다! 외치며 퇴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체력의 영향이 상당했지만. 아무튼 돈과 시간적 여유, 문제의 심각성 인지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졌으니 운동 앞에 늘 붙어 있던 ‘언젠가’를 지금으로 바꿀 때였다. 나를 조금이라도 아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했던 ‘누리야.. 운동해’가 이런 느낌으로 한 말이었나. ‘난 먹는 게 좋은데 식단을 어떻게 해요~’라고 쳐내거나, ‘아 술 잘 마시려고 운동하려고요!’하고 웃었는데 이번에는, 진짜, 운동을 한다. 심지어 나와 헤어지던 남자친구들도, 헤어지는 마당에도 한 명도 빠짐없이 내 건강을 걱정했었지. 허허. 이제는 신경도 안 쓰겠지만 나 이제 운동한단다.
꽃구경 때 바닥을 친 체력은 그래도 제법 회복이 되어 느릿느릿 헬스장에 등록하러 다녀올 수 있었다. 한 달 정도 운동을 최우선순위로 두고 그다음부터는 다른 거 해야지. PT를 받으면 체력이 좋아질 것이고, 운동하는 법도 알 테니, 두 달쯤 PT를 받은 다음에는 저렴한 헬스장을 끊어서 혼자 운동을 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허허. 운동도 안 해본 무지렁이는 무식하고 용감했다.
태어나 처음 인바디를 재고 결과 설명을 듣는데, 지금은 담당 선생님이 된 그때의 선생님은 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안 돼요..’를 연발했다. 아니 사람 몸에 대고 안된다뇨 선생님. 체지방률은 40퍼센트가 넘었고, 근육은 20킬로도 되지 않는다고. ‘지금 헬스장에 근육이 20킬로 안 넘는 분이 3분 정도 계시는데, 그래도 그중에는 제일 근육이 많으시네요’ 웃는 건지 한숨을 쉬는 건지 애매한 얼굴로 쌤이 작은 응원..? 을 해주셨다. 그게 어느 정도의 수치인지, 얼마나 심각한 건지 그땐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할 건 아니니까 조금 비싸도 제일 자주 운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하자! 그렇게 2달치를 결제하고 또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이든 시작하고 계속하면 그 일에 생일을 만들어주는 일이라던데, 귀여운 이야기라서 좋아한다. 아마도 김미경 선생님이 어느 유튜브에서 했던 말이다. 얼마나 늦게 시작을 하건, 얼마나 띄엄띄엄 이건 상관없이 그냥 계속한다면 생일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별생각 없이,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잘 모르고, 그냥 4월엔 운동해야지~~ 하며 ‘무제한 PT’를 결제하고 온 이 날이 내 운동의 생일이 되었다. 꾸준히 7개월간 나의 인생에 점점 크게 자리하고 있는 건강과 운동, 튼튼한 몸, 날이 좋으니 꼭 뛰어야겠다며 근처 공원으로 박차고 나올 수 있는 몸의 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