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가을 #나뭇잎 #상속 #죽음 #증권
"계좌 삭제 하겠습니다"
오빠가 거래하던 증권회사 중 한 곳을 찾아갔다. 생전에 갈 일이 없던 나는 긴장이 됐다. 창구 직원에서 어떻게 설명할까. 뭐부터 얘기를 해야 하나. 머리속으로 할 얘기를 정리하면서 사무실 자동 버튼을 눌렀다. 에어컨 바람이 서늘해서 더운 바람과 교차했다. 복사기 잉크 냄새가 나고 공기 청정기 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어서 오세요'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무뎌진 코로나의 투명 아크릴 가림막에 대고 '상속 업무를 보러 왔다'고 했다. 오빠와 나, 엄마의 신분증을 내밀면서 엄마가 상속을 받아야 하고 내가 대신하러 왔다고 했다. 엄마의 '성년후견인' 서류를 보여 달라고 했다.
상냥한 말씨의 직원은 A4 종이가 들락거릴만한 크기의 공간으로 신상 정보를 기입할 곳을 형광펜으로 표시해 내밀었다. 이름, 생년월일, 주소, 연락처를 적었다. 내게 딸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들 나이겠구나 싶었다. '지금 대하는 직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안내문이 아크릴 판 태플릿 모니터에 보였다. 사인할 서류들은 망자의 계좌를 폐쇄하고 상속 받을 사람 계좌를 신설하는 것들이라고 했다.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직원은 '마지막으로 000님 계좌를 삭제하겠습니다'는 안내 멘트를 하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갑자기 눈 자위가 팽팽해졌다. 마지막으로 오빠의 흔적이 지워지는구나. 빨리 정리를 했어야 했다. 햇수로 2년째다. 데이타 베이스에서 오빠의 이름이 지워졌다.
새벽에 맨발 걷기를 하는데 하늘에서 초록빛 마른 낙엽 하나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10층 건물 높이의 키가 큰 참나무들이다. 내 키의 열배가 넘어 천장을 만들었다. 나뭇가지들이 겹겹이 포개지고 엇갈려 하늘을 가렸다. 아무리 키가 커도 낙엽은 떨어진다. 아무리 작아도 그렇다.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에 닿아 더이상 부서지지 않는 입자로 모여 고운 흙이 된다. 엄마에게 아들의 목소리와 안부 대신 대기업 종목의 주식들로 남았다. 사람들이 죽으면 제일 먼저 '명의 이전'부터 된다는 교회 집사님 말이 떠오른다. 먼저 간 사람들이 남긴 기반 시설위에 살아간다. 왜 살고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평생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모든 시간을 썼던 오빠의 삶이 결혼도, 자녀도 아내도 일궈보지 못하고 떠난게 가장 서글프다.
영원히 자신의 시스템을 꺼버린 오빠는 삭제됐다. 생각하면 이게 다 아픈 엄마 때문인 것 같고 기억도 없는 아빠 때문인 것 같다. 아니 엄마 돈을 모조리 가져간 큰 외삼촌 때문같다. 그래서 벌을 받았는지 큰외삼촌의 첫째딸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다. 아니다. 엄마에게 못씁말을 해서 마음의 상처를 낸 미용실 손님 때문이다. 초기 치료를 잘못한 병원과 제약회사 때문같다.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워야 하는 싱글맘에게 사회가 도움을 주지 않아서이다. 아니다.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받을 상속을 포기해서 그렇다. 자식을 위해 평생 일했지만 낮은 임금 때문에 생긴 문제다. 아니다. 아니다. 때가 돼서 낙엽이 떨어진 것 뿐이다. 누구나 다 떨어진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마지막으로 오빠의 집을 정리하러 갔다. 1년이 지나서인지 덤덤했다. 먼지가 쌓인 짐은 그대로였다. 침대, 책상, 옷가지, 냉장고, 세탁기, 전자렌지 등 단촐하고 정돈돼 있다. 아파트 인근 중고센터에 전화를 걸어 필요한 것은 가져가라고 했다. 워낙 쓰지도 않은 새 것들이라 아까웠다. 가전제품을 수거하러 온 분께 침대 프레임과 책상을 밑에 내려다 달라고 했다. 얼마간의 돈을 요구하길래 '돈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당근마켓에 팔면 오십만원은 넘게 받을 수 있는 것들인데 돈을 달라고 하다니 괘씸했다. 이럴땐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나? 염치도 없지. 다른 업체를 부를까 하다가 말았다. 아저씨는 집에 남아 있는 생활용품과 프린트 등 몹시 신이났다.
오빠의 가장 무거운 짐은 '앨범'이었다. 아주 어렸을때부터 대학교, 직장생활, 최근에 여행간 사진까지 평소 성격대로 정리 정돈이 잘 돼 있었다. 나는 아빠와 엄마, 내가 아주 어릴적 사진만 빼고 모두 버렸다. 오빠가 남긴 새 수건들, 양말, 옷가지 모두 깨끗하고 바르다. 왜 이런 사람에게 짝지가 없었을까. 엄마의 정신병으로 여자를 만나서 결혼한다는 것을 엄두낼 수 없었다. 나는 둘째라서 엄마에 대한 책임감이 덜했지만 오빠는 뼈속 깊게 엄마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했다. 내가 엄마를 요양원에 모셨을때 불 같이 화를 냈다. 그 벌을 달게 받고 있다. 엄마가 최근 요양원을 탈출해 내게 왔다. 나에게는 '재난'과 같은 일이다. 자유, 평화, 평온 모든게 깨졌다. 요양원에서 몸이 망가진 엄마를 돌보며 엄마에 대한 구박과 노여움의 기록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