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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쇼 Sep 24. 2024

흐린날은 에메랄드 빛을 만든다

에메랄드 빛 제주 함덕해수욕장에서

제주 함덕해수욕장에 갔다. 무채색의 서해안 바닷가를 연상했다. 바다는 아무래도 좋다. 공항에서 동쪽으로 렌트카를 몰고 40분 뒤 도착했다. 이럴수가. 솜이불처럼 푹신한 모래사장을 걸어 해안가에 다가서니 베스킨라빈스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트색 물에 까만 초코칩이 떠 있었다. 


나는 흰색 반팔과 청바지의 공항 패션으로 뛰어 들었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온수처럼 미지근했다. 개구리 수영을 하며 전진했다. 물속에서 본 해평선은 새까맸다. 삼십센치 두께 자만한 검정색에서 짙은 청록색으로 서서히 변해 반투명의 녹색으로 흐려졌다. 몸 가까이 옥빛으로 옅어져 황홀했다. 모래사장에 닿은 파도는 민트색 돗자리가 펼쳐지듯 하다가 되말리더니 모래와 뒤섞이며 하얀 포말로 사라졌다.


문신을 한 동남아시아 청년들 서너명이 자맥질을 했다. 성대에서 광활한 벌판에 흩어진 양떼들을 불러 모으듯 우~우~우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들과 나는 파도가 일렁일 때 스카이 콩콩을 탄 것처럼 점핑하며 만세를 불렀다. 미리 뛰다가 높은 파도에 잠겨 물을 마셨다. 너무 짭짤하지도 쓰지도 않았다. 얼마뒤 젊은 부부가 양쪽에서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모래사장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앉아 있던 사람들 한 명, 두 명 늘어났다.


하늘은 회색 커튼을 친 것처럼 흐렸다. 얇은 이쑤시개 크기의 비가 내렸고 이층, 삼층을 이룬 먹구름이 달리기를 하며 사라졌다. 대머리 백인 남성이 비키니를 입어 육중한 가슴이 돋보이는 여성과 들어왔다. 살찐 엉덩이를 모으고 파도가 칠 때 물 속으로 들어갔다. 따라했다. 검은색 긴팔 래쉬가드와 농사용 차양 모자, 검은 선글라스로 셋팅한 커플은 확인 안해도 나와 같은 국적이다.


습관처럼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해변' 또는 '바닷가로 오다'라는 영어의 '비치(beach)'가 '비취(翡翠)'라는 반투명의 초록색 옥을 뜻하는 빛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 비치(beach)색과 '비취(翡翠)'색이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제주 함덕해수욕장



물 속에 있으니 오십년전 제주 해안가를 거닐던 이모의 신혼 여행 사진이 떠올랐다. 한 손으로 옥빛 치마 저고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통통한 뺨은 복숭아 빛을 띄었다. 그 옆에 진청색 양복을 입은 이모부는 웃고 있었다. 딸 둘을 낳아 기르며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고 투명한 피부는 검버섯이 폈다. 


나는 지난 이십년간 8월이 되면 안면도로 달려갔다. 아들과 벌 밭에서 애끼 손톱만한 게들을 만지며 재빛 모래에 살찐 손등을 묻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왜 그곳이 좋은지 떠들었다. 물이 따듯해, 아기들이 놀아도 안전해, 자갈이 없어, 파도가 거세지 않아, 서울에서 가까워 등 일평생 전도를 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그날 이후 잠을 자다가도 함덕, 숲을 가도 함덕, 수다를 떨어도 함덕뿐이었다. 다음날 제주에 정착한 '와니 언니'가 일러준 김녕 해수욕장을 갔다. 세쨋날은 곽지 해수욕장을 갔다. 함덕의 옥빛보다 진했다. 처음 느낀 민트 아이스크림의 함덕과 달라 아쉬웠다. 그래도 여전히 옥색이었다.


김령 해수욕장


서울의 세 배 크기라는 제주도를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하며 손에 손을 맞잡고 해안가로 오는 파도는 한 몸일텐데 왜 저마다 다를까.


여행 마지막날은 장막을 걷은 것처럼 하늘이 갰다. 학교 수업 때문에 먼저 떠난 예지에게 사진을 보내주니 '날씨가 치사'하다고 푸념을 늘어 놓았다. 제주에 있는 내내 중면 같은 빗줄기와 소면 같은 비, 안개비가 번갈아 내렸었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반기듯 이러기냐. 공항을 가기전 함덕 해수욕장을 다시 갔다. 날이 개었으니 에메랄드 빛이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설렜다.


곽지 해수욕장


그러나 기대와 달리 짙은 청록색으로 바뀌었다. 매일 새로운 옷으로 환복하나? 강렬한 태양이 불러 일으킨 착시인가?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 이모의 옥빛 치마 저고리, 친구의 민트색 우산 같던 그 바다빛은 아니지만 신비로웠다. 짐작해 보면 조명을 낮춰야 에메랄드 빛으로 보이는게 아닐까? 또 뛰어 들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30분밖에 놀 수 없었다. 날이 맑아서 첫날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했다. 초코칩이든, 대머리든, 농사용 차양 모자든 여기저기 트램폴린을 탄 사람들이 일렁거렸다. 


제주에 있는 동안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딸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내 자식이 재미있게 놀면 좋을 것 같은데 자식 입장에게 그렇지 않은 처지가 됐다. 집으로 돌아와 먹을 것과 가을 옷가지를 사서 요양원으로 향했다. 


재작년까지 제주은행에서 일했던 오빠 생각이 났다. 그가 세상을 등지기전 마지막 근무지였다. 그곳에 계속 있길 원했다고 문상온 동료들이 전했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그가 일했던 제주에 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했다. 제주의 외진 길은 현란한 간판이나 건물이 없어 눈이 피로하지 않았다. 오솔길 같은 길을 달리다 조금이라도 번화한 시내가 나오면 '제주은행' 간판을 찾았다. 


젊은 시절은 과속이 아닌 광속으로 지나갔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키우며 중년이 되니 맑은 날보다 흐린날이 더 많은 것 같다. 흐렸기 때문에 보이는 에메랄드 빛처럼 어둡고 캄캄한 날이면 그 속에 빛나는 것을 찾아야겠다. 흐린날도 소중하게 누려야 할 시간이었다.


날이 갠 청록색의 함덕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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