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빛 제주 함덕해수욕장에서
추석 연휴가 끝나고 제주 함덕해수욕장에 갔다. 그동안 서해안 바닷가만 다녀서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중국 관광객들이 더 많은 바닷가는 주차 공간도 여유로울만큼 일시적인 비수기였다. 솜이불처럼 푹신한 모래 사장을 걸어 바닷가에 다다르니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이탈리아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바닷가 같았다. 베스킨라빈스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에메랄드 바다에 초코칩 같은 사람들이 둥둥 떠 있었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청바지, 반팔차림 그대로 뛰어 들었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온수처럼 미지근했다. 개구리 수영을 하며 전진했다. 물속에서 본 수백미터 너머 해평선은 연탄처럼 까맸다. 삼십센치 자만한 두께로 검은색은 짙은 청록색으로 변해 반투명의 에메랄드 빛으로 내 몸을 감쌌다. 모래사장은 민트색 돗자리가 펼쳐졌다가 되말리듯 치는 파도가 하얀 포말로 사라졌다.
문신을 한 동남아시아 청년들 서너명이 자맥질을 했다. 성대에서 광활한 벌판에 흩어진 양떼들을 불러 모으듯 우~우~우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들과 나는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스카이 콩콩을 탄 것처럼 점핑하며 만세를 불렀다. 미리 뛰다가 높은 파도에 잠겨 물을 마셨다. 짭짤하지도 쓰지도 않았다. 이십여분을 그렇게 국적이 다른 사람들과 신나게 놀았는데 젊은 부부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모래사장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아지니 신명이 났다. 나는 한없이 우우거리며 모르는 사람들과 파도를 즐겼다.
아쉽게도 하늘은 진회색 암막커튼을 친 것처럼 흐렸다. 얇은 이쑤시개 크기의 비가 내렸고 이층, 삼층을 이룬 먹구름이 이어 달리기를 하며 사라졌다. 대머리 백인 남성이 육중한 가슴이 돋보이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과 들어왔다. 살찐 엉덩이를 모으고 파도가 칠 때마다 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나도 따라했다. 검은색 긴팔 래쉬가드와 농사용 차양 모자, 검은 선글라스로 셋팅한 커플이 들어왔다. 안봐도 나와 같은 국적일 것이다.
습관처럼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해변' 또는 '바닷가로 오다'라는 영어의 '비치(beach)'가 '비취(翡翠)'라는 반투명의 초록색 옥빛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비치(beach)색과 '비취(翡翠)'색이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물 속에 있으니 오십년전 제주 해안가를 거닐던 이모의 신혼 여행 사진이 떠올랐다. 한 손으로 옥빛 치마 저고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통통한 뺨은 복숭아 빛을 띄었다. 그 옆에 진청색 양복을 입은 젊은 이모부가 웃고 있었다. 딸 둘을 낳아 기르며 검은 머리 파뿌리 되고 투명한 피부는 검버섯이 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여름이 되면 안면도로 달려갔다. 아들과 시커먼 뻘밭에서 애끼 손톱만한 게들을 만지며 재빛 모래에 살찐 손등을 묻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왜 그곳이 좋은지 떠들었다. 물이 따듯해, 아기들이 놀아도 안전해, 자갈이 없어, 파도가 거세지 않아, 서울에서 가까워 등 일평생 서해안을 전도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그날 이후 잠을 자다가도 함덕, 숲을 가도 함덕, 대화의 결론을 함덕으로 몰고 갔다. 다음날 제주에 정착한 '와니 언니'가 일러준 김녕 해수욕장을 갔다. 그 다음날은 곽지 해수욕장을 갔다. 함덕의 옥빛보다 진한 색을 띄었는데 그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도가 서울의 세 배 크기라고 한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하며 손에 손을 맞잡고 섬으로 달려드는 파도가 왜 저마다 다른 색일까.
제주를 여행하는 동안 소면과 중면 크기의 비가 내리거나 안개비가 내렸다. 여행 마지막날 우리가 떠나는 것을 반기듯 맑게 갰다. 공항으로 가기전 마지막으로 함덕 해수욕장을 갔다. 화창하니 에메랄드 빛이 얼마나 더 신비롭고 아름다울지 설렜다. 무작정 뛰어들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짙은 청록색이었다.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과 이모의 옥빛 치마 저고리 같았던 바다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날이 맑을수록 짙고 흐릴수록 에메랄드인게 아이러니 했다. 화창해서 그런지 첫날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했다. 초코칩이든, 대머리든, 농사용 차양 모자든 여기저기 트램폴린을 탄 사람들이 파도에 일렁였다.
젊은 시절, 광속으로 지나갔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키우며 어느덧 중년이 돼보니 맑은 날보다 흐린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날씨처럼 어두웠던 순간에도 에메랄드 빛처럼 눈부신게 있었겠구나 싶었다. 어두워야 보이는 고운 것, 흐려야 드러나는 기특한 것들이 있음을 함덕 해수욕장이 계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