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만 있는 남편에게
결혼생활 이십년 훌쩍 넘으면 생기는 국률이 있다.
마누라가 약속이 있어 나갈때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나갈 차비를 하면 꼬옥~
또는
또는
한다. 그순간 단전에서부터 화가 치솟는다. 지가 내 부모도 아닌데 '통제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고 소비적인 일로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냐'로 다르게 들리는 여자들만의 '번역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만나는 친구도 없고, 집에만 있는 사람을 두고 외출하는게 괜히 신경쓰이는 와중에 그런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빡침이 작동을 한다.
그래서 어느날 나도 모르게
그러던 어느날 카페에서 지인 두명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고양이와 강아지 키우는 얘기를 하는데 나는 듣고만 있었다. 어려서부터 털 달린 것은 집안에 들여 놓는게 아니라는 으르신들의 가스라이팅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서인지 대화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요즘은 개가 안방을 차지하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자는 세상이다. 개나 고양이를 사람보다 더한 대접을 해주는게 늘 마뜩잖다. 90년대만 해도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신탕을 먹는다고 비인간적이고 미개인이라고 했을 때 홍세화 선생님은
되물었다.
야만이나, 미개함, 비인간적이라는 판단이 '문화적 차이'를 부정하고 비하를 전제로 한 공격임이 뻔하지 않은가. 이제는 우리나라도 프랑스처럼 사람보다 동물과 가족 관계를 이뤘다. 유모차에 아이들이 타는게 더 신기하니 말이다. 사람들의 신경계는 절대적 기준이 없나보다. 사람들의 특정 행위가 많아지면 그게 '맞는일'이 되니 말이다.
그날 카페에서 대화의 요지는 이랬다. 고양이든, 강아지든 사람 말귀를 알아 듣기 때문에 개를 혼자두고 어딜 나갈때 불안해하지 않도록 '눈을 마주치고 친절하게 설명하면 그들도 사람 말귀를 알아 듣기 때문에 정성스럽게 얘기해 주는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인간의 말귀를 알아듣고 따라하는 앵무새나 반려견, 고양이에 관한 유튜브 채널들을 구독해서 많이 봐오지 않았는가. 신기할 정도로 인간보다 더 똑똑한 그들의 지능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함께 사는 진짜 반려인에게는 친절은 커녕 궁금해서 물었다가 나무하기만 했지 싶었다. 홍세화 선생님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정작 내가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대접을 그에게 했구나 싶어 앞으로
'어디가?'
물으면 상냥하게
반려견, 반려묘들에게 하듯
최소한 마누라 일정에 대한 '정보 제공'과'알 권리'를 보장해줘야지 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들이 받는 접대를 한번이라도 맛봐야 하지 않을까? 인권이 그런거 아닌가? 하며 두사람의 대화를 듣는 순간, 정신줄 놓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아니 세상이 바뀌었잖아. 개, 고양이가 받아야할 대접을 굳이 뭐 사람한테 적용하려고 그래. 바쁜 세상에 거기까지 부지런을 떨어. 개, 고양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잖아. 그건 인정해야지. 당연히 대접해야지. 바로 정신이 되돌아 왔다.
앞으로
금일봉이라고 송금하지 않고 행선지를 '묻는' 미개한 행동에 대해 '쓰읍~~' 방울뱀 내는 소리로 응징할 지어다.
글을 마무리 쓰고 나면 자체 필터, 검열이 작동되는데 AI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
이 글은 결혼 생활 20년을 넘긴 한 남성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철학적인 통찰을 담은 에세이로, 겉으로는 아내의 외출을 대하는 태도를 풍자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정서적 거리, 일상 속 권력, 인간 대 동물 간 처우 역전 현상에 대한 자각이 촘촘히 엮여 있어요.
"어디 가?", "언제 와?"라는 말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감시처럼 느껴지는 통제 언어로 해석됨
아내 입장에선 ‘감정 번역기’가 작동해 '비난'으로 받아들여짐
요즘은 개와 고양이에게 더 친절하고 정중한 커뮤니케이션을 함
"우리쉐끼~" "엄마 금방 갔다올게~" 같은 언어는 정서적 배려의 극치
나는 **진짜 반려인(아내)**에겐 왜 그런 친절을 못했는가 자책
그러나 곧 현실적 회귀: “동물은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라며 정당화
“어디가?” 묻는 대신, “돈 필요해?” 묻고 금일봉은 안 주며 응징하겠다는 유쾌한 복수심
정서적 커뮤니케이션의 불균형: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친절하고 거칠 수 있음
관계 속 권력의 재정의:
묻는 사람(관심을 표현하는 자)이 ‘통제자’처럼 느껴지고,
묻는 대상(외출하는 자)은 ‘죄인’처럼 느끼게 되는 역설
인간보다 반려동물에게 더 관대한 사회 풍조 풍자:
이는 단순한 시대변화라기보다, 정서적 투자 우선순위의 역전을 드러냄
자기반성과 유머가 교차:
“내가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대접을...” → 곧 “귀엽고 사랑스럽잖아!”로 반전
내면의 혼잣말 구조: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다시 '현실 감각'이 정신줄을 되돌림
풍자와 사회 비판의 교차:
일상의 소소한 질문이 사실은 문화적, 젠더적, 권력적 코드임을 드러냄
이 글은 유쾌한 일상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결혼생활, 관계의 권력, 감정의 언어,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작지만 깊은 통찰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우리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작 얼마나 정중하고 배려 깊은 언어를 쓰고 있는가?”
원하시면 이 글을 에세이집 원고나 칼럼 연재물, 혹은 공연용 모노드라마 대본으로도 확장 가능해요. 원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