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산행을 다니고 있었다. 은퇴를 하신 남자분 두 분과 직장을 다니거나 미용실을 운영하시는 분, 가정주부 등이 모였다. 그중 '려옥'은 커트 머리에 캐모마일을 우린 노란빛으로 염색을 했다. 산행 중간에 쉬는데 가방에서 계란 '한 판'을 꺼냈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했다. 나는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소금을 많이 가져갔다. 소금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가져갔는데 일곱명이 충분히 먹었다. 그녀는 두번째 쉬는 시간에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언니일 것 같아서 놀란 눈을 하며 '어머 언니 맥주 가져오셨네요?' 했다. 그러나 나이를 따져 보니 내가 언니였고 그녀가 한 살 어렸다. 초면이라 반말, 긴말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자꾸 나보고 말을 놓으라고 했다. 그런데 해가 내리쬐는데 모자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왜 그러냐 물으니
여자 강호동 느낌의 덩빨이 있고 커트 머리를 해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찬찬히 들여다 보면 눈도 코도 올망지게 예뻤다. '누가 그런 소릴 하냐, 우리 려옥이 너무 예쁜데~~' 하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쑥스러워하며 그런소리 말라며 수줍어 했다.
내 몸이 피곤해서인지 웅변하듯 말하는 그녀의 수다가 귀에 거슬렸지만 피할길이 없었다. 꽤 들을만한 정보도 아니고 시숙의 삼촌의 조카의 이모의 고모의 오촌의 육촌들 사이에 있는 개인사였다. 그렇게 첫번째 산행을 마쳤다.
그 다음주 화요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위아래 검정색으로 깔맞춤을 하고 여전히 커트 머리에 씩씩한 톤으로 인사를 하며 김밥 한 줄을 내밀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우람한 소리를 감내하고 들으며 산행을 시작했다. 숨을 고르고 첫번째 쉬는 장소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안양 시내를 내려다 봤다. 그녀는 네모반듯하게 썰어온 빨간 수박을 꺼내 한 사람씩 가져다 줬다.
듬직한 그녀에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있었지만 시덥지 않은 시댁의 당숙의 고모의 조카의 족보 얘기는 맥이 빠졌다. 그런데 발에 족저근막염과 허리디스크가 있어서 고생한 얘기를 했다. 나는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묻지도 않은 '민간요법'을 떠벌린다. 그제야 그녀의 얘기에 귀기울였다
그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스 안전 점검을 하는 검침원이었다.
본인 잘못도 아닌데 겪어야 할 일이 많겠다 했더니 '우리는 일 끝내고 오면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난리도 아녀요' 어느 누가 정돈되지 않은 살림 살이를 보여주고 싶겠는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가스검침이 귀찮기만 한데 그걸 방지하겠다고 애쓰니 누구보다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앞단에서 사람들과 검침 약속을 잡느라 실갱이를 하고 말도 안되는 민원처리에 몸을 사리니 보통의 배포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할테다. '려옥'이처럼 단단한 마음과 넓은 아량이 있어 가능하다 싶다.
사람의 안전과 직결되는 일을 하니 '려옥이 복 받겠다~' 했다. 누군가 '그 복 다 누리고 가야할텐데' 맞장구 쳤다. 시댁의 팔촌의 사촌의 당숙의 고모의 사촌까지 대가족에 둘려싸여 일상을 행복하게 보내는걸 보면 누리고 있는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