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튜터 후기
출근한지 이틀 되던 날 학생이 디벗을 들고와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컴퓨터와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안심하며 디벗을 열었다. 내가 해결하지 못하면 단톡방 튜터들이 있으니 괜찮다며 스스로 다독였지만 심장이 요동쳤다. 옆에서 정보부장 선생님과 실무사 선생님, 학생이 지켜보고 있었다.
겉은 전문가처럼 속으로는 '해결 하지 못하면 어쩌지'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만큼 바빠서 하교해서 학원 일정이 있을텐데 그전에 못 고치면 어쩌지 걱정됐다. 다행이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고 너무 기쁜 나머지 학생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디벗이 안돼서 많이 당황했지?' 하니 '네~'하며 환하게 웃었다. 정보부장 선생님이 '어떻게 해결했냐!'며 자신에게도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교장 선생님처럼 손을 뻗어 좌우로 흔들며 외쳤다. 부실에 계신 선생님들이 웃었다. 정보부장 선생님은 '어떻게 해결했냐?' 재차 물으셨다. '아 그게 뭐...' 설명하기 힘든 기능상 큰 문제가 아닌 오류였다. 내게는 학생의 민원 해결을 향한 불타는 긴장감, 압박감에 속이 후련한 마음뿐이었다.
한번은 양품화 디벗이 도착하기전이라 2,3학년 학번을 승진시키는데 자퇴한 학생의 디벗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보호자와 통화를 했는데 남편이 일을 하다 크게 다쳐 입원해 간병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 검정고시요...' 어떤 사유가 있어 학교를 그만뒀나 짐작하고 아이한테 들려 보내겠다고 확답을 받았다.
며칠 뒤 키가 장대처럼 여학생이 부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뜻 봐도 농구선수처럼 컸고 운동을 권유 받았을 것 같았다. 그 덩치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디벗을 반납하러 왔다'며 겁이 든 말투로 소리가 안으로 말려 들었다.
디벗 반납증에 사인을 받으며 정적이 흘렀고 '검정고시 합격했다고 엄마가 좋아하시더라' 했더니 '점수가 잘 나왔다'며 뿌듯한 표정으로 바뀌며 안도를 했다. '운동선수 권유 받았겠다' 했더니 체격 때문에 친구 관계가 수월치 않음을 내비쳤다.
마음속으로 아이의 앞날을 빌어줬다. 디벗이 분실된지도 몰랐던 것을 찾은 덕에 또한번 나의 주가는 상승세.
테크빌에 지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볼 때 학교 선생님과 부딪힐 경우 '어떻게 대처하겠냐'고 했을 때 선생님들이 나보다 어려서 불편해 하실까 염려된다고 하자 오히려 유연성이 있다며 좋게 평가해 줬었다. 그런데 두번째 간 학교에서 정보부장 선생님은조카뻘 되는 젊은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면접에서 우려했던게 현실로 드러났다.
출근하자마자 양품화 업체에서 디벗을 갖고 왔다. 뭔가 뭔지도 모르며 일단 받아서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모르는 기능들을 익혀가며 단톡방과 카페 글들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3주차 넘어갔을 때 부장 선생님이 오더니 격양된 목소리로 '왜 아직도 디벗을 배포하지 않았느냐, 이해가 안된다, 얼마 되지도 않은데' 핀잔을 들었다. '네? 어...'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변명을 늘어 놓았는데 내가 그렇게 의기 양양했던 '젊은 선생님이 나보다 어릴까 걱정했던' 것이 오히려 핀잔을 듣고 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같은 부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이 광경을 지켜봤고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런데 다행히 디벗 업무를 총괄하던 스물 후반의 젊은 남자 선생님이 사물함과 충전함에 방치돼 있던 디벗을 찾아내 선생님들께 다시 배포를 하며 해결이 됐다. 인수인계가 안되다 보니 업무를 맡은 젊은 선생님도 발령 받은지 얼마안돼 아무것도 몰라 '맨땅에 헤딩'하며 해결중이라고 했다. 나 또한 모르는 기능들을 아는척 알려드리려고 찾아서 해결하기전에 '단톡방 튜터분들'에게 매달렸고 그 고마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 내 주가를 회복시켜 놓았다.
처음 일을 이 일을 해보라며 권유 받았을때는 어떻게든 하기 싫어서 이리빼고 저리 뺐는데 안하면 어쩔뻔 했나 싶을 정도로 학교 가는게 즐거웠다. 내 평생 학교가 재미있는 날이 오다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가 규칙적으로 돌아가면서 몸에 활력도 생기고 튜터일 외에 뭐라고 일이 있으면 하고 싶었다.
가까이 일했던 선생님들과 실무사 선생님들의 업무량과 일처리 능력을 보며 존경스러웠다. 2학기때도 또 오냐는 질문에 '내가 싫지 않은가... 또 오길 바라는 마음이시겠지' 넘겨 짚으며 소꼽장난같은 쫑파티를 했다. 첫날부터 주가가 높았던 학교에서는 설빙을 배달시켜 먹으며 말랑말랑한 시간을 가졌다. 다른 학교에서는 친하게 지낸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커피 쿠폰 선물을 받았다.
맨처음이자 마지막을 여닫을 출근앱 '샤플' 내겐 넘사벽이었다. 출근해서 선생님들과 인사 나누고 수다삼매경을 누리다가 아이들을 응대하면 어느새 지각중이었다. 세상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데 서툰 내가 '어디서든 업무를 덜겠다' 는 태도로 임했는데 앱 담당자들에게 미안했다가 나중에는 농담까지 하며 느슨해졌다. 함께 일했던 분들처럼 출근앱도 정들자 이별이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 속에 밤낮으로 움직였을 손길들을 봤다. 보상없이 전력을 다한 사람들, 작은일에도 힘쓰는 마음을 체감했다. 튜터라는 존재가 그속에서 솜사탕 입자처럼 가늘게 연결된 실체로 참여 했다는게 뜻깊었다. 내 선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외면했던 가벼운 일들이 없었다면 그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일을 완벽하게 해나갈 수 있겠나 싶다.
마지막 퇴근길, 학교 근처 유명한 호주 브런치 맛집에서 남편과 친구를 불러 밥을 먹기로 했다. 백만년에 출퇴근 하는 일을 하다보니 버거웠다. 사회가 다변화 되면서 연속성 없는 일자리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그 일에 종사할 경우 마음이 쓰였다.
매번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이 들어서면 희망을 갖고 그렇지 않으면 절망에 빠진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하는 환경은 그것과 상관없이 안정성은 떨어졌다. 결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시간제는 데이트 비용에 부담을 가졌다.
내 아이도 예외가 아니기에 자유 시간을 되찾아 홀가분하면서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