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록출판사 Nov 22. 2023

[인터뷰] 황규영 "나는 문제없어"

2019년 레전드매거진 게재

[취재/글: 이준동]

[사진: 황규영 제공]


[황규영]

1993년 발표되어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응원가’로 사랑받고 있는 ‘나는 문제없어’의 주인고 황규영.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과를 졸업해 라이브 클럽의 가수를 거쳐 1993년 정규 1집을 발표하며 데뷔한다.


1집 수록곡 ‘나는 문제없어’는 국민 작곡가인 ‘김성호’의 곡에 황규영 자신이 가사를 붙인 앨범 타이틀 곡으로 많은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특히 IMF 시절 고초를 겪던 대한민국 모든 가장에게 큰 힘을 주며 국민응원가로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을 응원하던 그가 이번에 오랜 공백을 깨고 ‘재즈 아티스트’로 다시 한번 국민 곁으로 돌아왔다. 가수에서 재즈 아티스트로 거듭나고 있는 황규영을 만나 음악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봤다.



대한민국에 계신 모든 국민 여러분. 안녕하세요. 가수 황규영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다시 인사드립니다. 먼저 저를 잊지 않고 인터뷰 요청을 해주셔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이름 ‘황규영’은 아직도 생소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웃음) 하지만 노래 ‘나는 문제없어’는 아마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1993년 저는 ‘나는 문제없어’란 곡으로 여러분께 처음 인사드렸는데 벌써 어언 30여 년이란 시간이 다 되어 가네요. 세월 참 빠르죠 (웃음) 오랜 시간 많은 분들께서 저의 노래를 들으며 힘을 얻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정말 뿌듯하고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유튜브에서는 제 노래에 맞춰 초등학생들이 자기가 그린 그림으로 뮤직비디오까지 만들어 올리더군요. 누군가 저에게 농담으로 ‘나는 문제없어는 5살만 되면 아는 노래’라 했는데 그 말을 정말 실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황규영, 음악을 만나다]


제가 졸업한 서울예대는 말 그대로 당시 ‘예술의 메카’였습니다. 탄탄한 실력을 갖춘 많은 예비 연예인들이 함께 모여 음악의 꿈을 펼치는 곳이죠. 저는 초기에 친한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며 데모 음반을 만들었습니다. 이 데모 음반을 여러 곳에 보내며 가수의 꿈에 다가가려 노력했죠.


오랜 기다림 끝에 당시 대한민국 가요계의 '마이더스의 손' 강인중 대표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워너뮤직 코리아 초대 사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음악계의 거물이셨죠.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강인중 대표님은 노래를 잘 못하는 제가 매력적이었다 하셨다네요 (웃음) 당시는 신인들이 노래를 너무 잘하는 것보다는 신인다운 풋풋함이 제작자 입장으로서는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나 봐요.


그렇게 강인중 대표님과의 인연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직배사인 워너뮤직코리아에서 앨범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음악가가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작업 과정 중에 강인중 대표님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저를 챙겨주시기 힘든 상황이 되어 결국 저의 앨범 작업은 ‘발렌타인뮤직’이라는 곳으로 이관되어 그곳에서 1집을 발매하게 되죠.


작업하는 동안 제작사와 저와의 음악적 갈등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저의 노래가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강했고, 저는 제가 만든 노래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이어갔죠. 타협점을 찾은 것이 ‘그럼 딱 한 곡만 다른 작곡가의 노래를 받자’였습니다.


회사에서도 그만큼 양보했으니 저도 한걸음 물러나 앨범 수록곡 중 ‘딱 한곡’만 타 작곡가의 노래를 넣기로 하고 긴 시간을 이어오던 음악적 갈등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그 ‘딱 한곡’이 바로 ‘나는 문제없어’입니다. 당시 최고의 작곡가 ‘김성호’님의 작품이죠.


사실 저는 이 노래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든 노래들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김성호 형님의 곡에 가사는 제가 직접 붙였습니다만. 회사와의 협의점을 찾기 위해 선택한 노래인데 당연히 가사에 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생각했죠. 다른 노래들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가사 작업을 하고 순식간에 마쳤습니다.



[나는 문제없어]


그렇게 앨범 작업을 마치고 타이틀곡이 ‘나는 문제없어’로 정해졌는데, 사실 저는 이 노래를 대중 앞에 서서 불러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댄스 음악이다 보니 몸을 자연스럽게 흔들며 분위기를 압도해 가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죠. 아니,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무대에 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의 그런 마음가짐은 무대에서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었고, 저는 오랜 시간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저는 비록 무대를 떠났지만 이 노래는 꾸준히 사랑받고 많은 매체에서 국민을 응원하는 국민응원가로 소개됐어요.


당시 저는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가 아닌 ‘나는 문제없어의 황규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 어린 생각이었죠. 이 노래가 지금까지 제가 음악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방송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게 된 곡이기도 하며, 또 지금까지 저를 있게 해 준 곡이라는 ‘양면의 칼날’과도 같은 곡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소중한 곡이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당시 대면 대면했던 성호 형님과도 지금은 너무나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형님도 ‘나는 문제없어’의 저작권 승인 권리를 저에게 다 념겨주실만큼 저를 믿고 아껴주고 계십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성호 형님께서 계속 좋은 음악을 만들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성호 형님 본인은 이제 거의 음악 활동을 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형님 본인은 ‘이제 후배에게 내 자리를 내줘야 할 때’라 겸손한 말씀을 하시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느끼시고 일선에서 물러나신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농담으로 “형님이 뼈대 있는 가문의 아들이다 보니 너무 여유로워 손을 놓은 게 아니냐”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형님이 계속 음악을 만들어주시길 종용하기도 합니다.



[황규영, 그리고 재즈]


2010년, 동료가수 몇 명과 연말콘서트 무대에서 정말 우연히 ‘Fly me to the moon’을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재즈에 대한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재즈를 논할 만큼 음악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 스스로를 평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변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황규영이 재즈를 이렇게 맛나게 부를 줄 몰랐다며 응원해 주셨고, 이참에 재즈 음악을 해보는 건 어떻냐라는 과분한 제안을 받기도 했죠.


‘그래? 그럼 재즈가 무엇인지 한번 맛이나 볼까?’하는 마음으로 재즈 명반을 하나하나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제 머릿속에 재즈 코드 진행이 떠오르며 그 위에 멜로디를 얹어 작곡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저만의 재즈 자작곡을 만들어 녹음을 해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렇게 자신 있었는데 막상 녹음을 한 결과물을 들으니 그냥 재즈풍의 가요였습니다. 저는 주변에 있는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왜 가요처럼 들리는지 답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유명 재즈 아티스트들의 삶 속에 들어가 그들과 녹음하며 3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만든 곡을 끊임없이 그들에게 들려주며 진심 어린 조언을 받아 저의 재즈에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재즈에 묻혀 살며 제가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재즈라는 분야가 크게 주목받는 시장이 아니다 보니 오랫동안 재즈를 하며 경험을 쌓고, 그 경험을 토대로 누군가에게 재즈에 대한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중에 정말 실력을 갖춘 좋은 재즈 아티스트들과 팀을 꾸려 2013년 저의 첫 재즈 싱글 앨범을 발매하게 됩니다. 재즈에 입문한 지 4년 만이었죠. 싱글 앨범 수록곡이 온라인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저는 스스로 ‘재즈로 대중 앞에 다시 다가설 수 있겠구나’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저의 첫 재즈 정규앨범을 준비 중입니다. 정규 앨범을 준비하며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모 재즈 음반 제작자는 “가요를 하다가 안되신 분들이 재즈에 어슬렁거린다”며 비아냥 섞인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이 말이 처음에는 큰 상처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저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장작이 되어 더 열심히 1집 준비를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 저의 재즈는 ‘너무 대중적이라 팝이나 가요 같다’라는 조언도 깊이 가슴에 새겨 대중적이지만 정체성은 잃지 않는 재즈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 주었습니다. 이 대중적인 재즈라는 것에 대한 고민도 이어갔습니다. 과연 대중적인 재즈가 뭘까? 우리가 많이 듣고 그 노래가 익숙하면 유행가가 되듯이, 재즈도 많이 듣고 자주 듣게 되면 대중적인 장르가 되지 않을까?


얼굴도 모르는 걸그룹, 보이그룹 노래도 자꾸 들리니까 좋은 노래처럼 세뇌됩니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우리 귀에 익숙하게 들려오기 때문이죠. 우리가 커피를 마시러 가거나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 늘 재즈가 흘러나온다면 분명 이 재즈란 장르도 우리에게 친숙한 음악이 될 거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분들에게 나의 노래를 들려드리면 되겠구나

이것이 제가 찾은 방법입니다.



[마지막 메시지]


저는 예전에 개인적으로 이어폰 사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국의 이어폰 시장에 대해 느낀 것은 일단 한국의 음향기기 산업은 ‘저가’에 목맨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세계적인 오디오 기기를 삽시간에 모방해 외형만 그럴싸한 저가 이어폰과 음향기기를 온 세상에 뿌려댑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중국산이 왜 잘 팔릴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싸서"


전 세계 유명 브랜드들은 이어폰이라는 작은 기기 안에 가장 완벽한 공간 설계를 하기 위해 최고의 기술력 와 인력을 동원해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당연히 이어폰의 가격은 상당한 수준이 되죠.


중국산 제품은 외형만 비슷할 뿐 그 속은 아수라장입니다. 비단 중국산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내 저가 브랜드 역시 공간 연출력은 철저히 배제하고 외형만 예쁜 제품을 시장에 쏟아내죠. 비주얼은 분명히 콘덴서 마이크인데 녹음해 보면 노래방 마이크보다도 못한 제품들도 넘쳐납니다.


그럼 이런 제품들은 왜 시장을 장악할까요? 바로 소비자들이 오직 “” 제품을 찾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가 홈레코딩으로 완성하는 음악 콘텐츠도 예외는 아닌 것이 제품의 성능보다는 단가로 그 제품을 선택하고, ‘내가 이 가격으로 이걸 샀으니 가격대비 훌륭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수준이하의 장비로 음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이 과연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무조건 비싼 악기가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이론은 절대 아닙니다. 최소한 그 악기와 기기에 대한 퀄리티를 생각하며 그에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며 음악을 만드시길 권합니다. 대중들이 기꺼이 구입 의사를 가질 만큼의 음악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좋은 장비와 환경을 갖춰야 합니다.



물론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에는 가수는 오직 노래만으로 인정받길 원했고, TV 등 영상 매체에 보이는 것도 원치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가수는 가수로서, 그리고 음악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는 비단 음악뿐만이 아닙니다.


요리하는 요리사, 그림을 그리는 화가, 운동하는 스포츠 선수 등등…하지만 요즘은 사회 각 분야에서 대중에게 알려진 사람들은 이름이 조금만 알려져도 곧바로 ‘예능’이라는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둬두게 됩니다.


‘예능’은 소위 ‘버라이어티’란 그럴싸한 영어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좀 더 다양한 주제를 가진 쇼 프로그램일 뿐인데, 유명인이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굿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나오다가 나중에는 부인, 아이들, 친구 온 가족을 동원해 이 ‘예능’의 울타리에서 살아남으려 애를 씁니다. 가족을 방패로 삼아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 돈이 된다면 뭐가 잘못인가 하는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각 분야의 명인들을 잃게 되고 결국은 더 이상의 명인들은 사라지고 멀티엔터테이너 즉 만능인만 존재하겠죠.


지금 우리가 매일같이 접하는 미디어가 더 이상 이런 억지스러운 일상을 담아내기보다는 진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을 전하는 예술가들이 설 수 있는 진정한 무대가 되기를 바라며 이번 인터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3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이준동]


황규영 - 나는 문제없어 (1993)


슈가맨 (2016)
작가의 이전글 [인터뷰] 성우 안지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