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을 좀먹는 ‘가짜 일 리스트'

바쁘기만 한 이유가 있다

by 김용진

I. 가짜 일은 리스트로 보면 더 선명해진다


가짜 일은 개념으로 설명할 때보다 구체적인 사례로 나열될 때 가장 빨리 공감된다.

“그건 우리 얘기인데요?”라는 반응은 대개 이 지점에서 나온다.


가짜 일은 일부 게으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오래도록 유지해 온 업무 관행의 총합이다. 그래서 가짜 일을 없애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구호보다,


우리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의 목록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먼저다.


이 글은 조직에서 흔히 발견되는 가짜 일을 범주별로 풀어 설명한 가짜 일 리스트의 해설판이다.


읽다 보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변화의 출발점이다.


II. 보고·문서 업무, 가장 안전한 가짜 일


가짜 일이 가장 많이 숨어 있는 곳은 보고와 문서 영역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문서는 흔적이 남고, 흔적은 안전하기 때문이다.


읽히지 않는 주간·월간 보고서는 대표적인 사례다. 팀장은 결재 버튼만 누르고, 내용은 다시 열어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매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미 결정된 사안을 형식상 문서로 정리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요약본·상세본·참고본을 동시에 만든다.


보고의 목적은 의사결정 지원이 아니라 보고했다는 사실을 남기는 것으로 바뀐다. 그러다 보니 내용은 그대로인데 표현만 바꾸거나, 디자인만 다듬는 일이 반복된다.


상급자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문구 수정이 이어지고, “이건 나중에 쓸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참고자료 폴더는 계속 불어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문서, 누가 실제로 쓰는가?”


III. 회의, 바쁨을 가장 잘 위장하는 장치


회의는 가짜 일을 가장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수단이다.

회의실에 앉아 있으면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안건 없는 정례회의는 대표적이다. “정기니까 일단 하자”는 말로 시작된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난다.


이메일로 공유해도 될 내용을 굳이 전원 대면으로 설명하고, 결정권자는 빠진 채 실무자들끼리만 논의한다.


그러다 보니 지난주와 똑같은 안건이 다시 올라오고, 회의록만 남는다.


회의 준비를 위한 사전회의, 본회의를 위한 준비 회의가 이어지며 회의는 스스로를 증식한다.

“잠깐만 보자”는 말로 시작된 즉흥 회의는 한 시간을 넘기고, 그 시간만큼 실행은 미뤄진다.


회의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착각한다.

회의에 많이 참석하는 것이 기여라고.
그러나 실행 없는 회의는 가짜 일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다.


IV. 결재·행정 절차, 책임을 분산시키는 기술


결재와 행정 영역의 가짜 일은 대부분 책임을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다.


실질적인 판단은 하지 않는 중간 결재 단계, 결재 전에 미리 설명하느라 또 다른 보고를 만드는 사전 보고, 관련 없는 부서까지 묶어 책임을 분산시키는 동시 결재가 대표적이다.


이미 승인된 사안을 다시 재결재하고, “윗선에서 판단해야 할 것 같다”는 말로 결정을 미루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감사를 대비한 형식적 문서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실제 운영에는 쓰이지 않지만, 혹시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다. 이때 행정은 목적이 아니라 방패가 된다.


이 영역의 가짜 일은 조직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정을 회피하는 구조를 고착화한다.


V. 데이터·시스템, 기술이 만든 새로운 가짜 일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화는 새로운 가짜 일을 낳기도 했다.


같은 데이터를 여러 시스템에 중복 입력하고, 엑셀로 정리한 뒤 다시 시스템에 재입력한다.


자동 집계가 가능한데도 수기로 취합하고, 오류를 막기 위해 검증용 검증표를 만든다.


보고 시점마다 같은 지표를 새 파일로 만들고, 수치가 맞는지 여러 사람이 반복해서 대조한다.


이 모든 일은 시스템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다.


자동화할 수 있는 반복 작업을 사람 손으로 처리하면서, 사람의 실수를 막기 위한 추가 업무가 덧붙여진다.


그렇게 가짜 일은 기술의 빈틈을 메우는 형태로 커진다.


VI. 커뮤니케이션과 문화, 가짜 일을 정당화하는 마지막 관문


마지막으로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가짜 일은 문화와 태도 영역에 있다.


의미 없는 CC 남발, “혹시 몰라서” 공유하는 참고 메일, 책임 회피용 메신저 기록 남기기는 모두 불안에서 출발한다. 실질 논의 없는 형식적 협업, 결정권자 없는 협의 요청, 여러 채널에 동일 내용을 중복 공유하는 행동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상사 눈치용 야근, 보여주기식 진행 상황 공유, 실행 없는 계획 수립이 더해진다. 효과 없는 방식임을 알면서도 “전례가 있어서” 계속 유지되는 업무는 가짜 일의 완성형이다.


성과와 무관한 활동을 바쁨으로 포장하는 순간, 가짜 일은 조직의 일상으로 굳어진다.


VII. 리스트의 목적은 비난이 아니라 삭제다


이 가짜 일 리스트의 목적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우기 위함이다.


가짜 일은 개인이 없앨 수 없다. 조직이 허용한 합리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스트로 드러내는 순간, 질문은 가능해진다.


이 일, 정말 없어지면 안 되는가?
불편한가?
아니면 실제로 위험한가?
자동화·통합·삭제 중 무엇이 가능한가?


가짜 일을 줄이는 조직은 더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일을 줄이는 용기를 가진다.


바쁨이 줄어들 때, 비로소 진짜 일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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