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觀照)라는 이름의 유폐(幽閉)

평온해 보여도 속으로는 스스로를 산 채로 가두는 것과 다름없다

by BizManna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을 ‘뒤를 돌아보아야 이해되지만, 앞을 향해 살아야 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자꾸만 '이해'라는 명목 아래 뒤로 물러나 앉으려 합니다. 뜨거운 삶의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다 부질없다"거나 "이미 다 아는 맛이다"라며 짐짓 현자인 척 뒷짐을 지는 것이죠.


이를 흔히 관조의 미학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미학이라기보다 실패와 상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를 가둔 ‘우아한 유폐’ 즉, 보이지 않는 안전과 질서 속에 천천히 숨 막히는 상태에 가깝지 않을까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계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는 과정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계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는 과정입니다. 젊은 날의 무모한 몰입이 주는 화상을 피하고자 우리는 '거리 두기'를 배웁니다. 하지만 이 거리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우리는 자기 삶의 주권자가 아닌 평론가로 전락합니다. 내가 내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지고 아파하는 대신, 그 결과를 분석하고 냉소하며 타인처럼 대하기 시작할 때 인간의 영혼은 서서히 박제됩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초인)'는 단순히 강한 인간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닥치는 모든 고통과 희열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그 운명이라는 무대 위에서 기꺼이 춤추는 자입니다. 그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시청하는 관객은 결코 삶의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비극의 주인공만이 피 흘리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환희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양적 축적이 곧 삶의 질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 와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양적 축적이 곧 삶의 질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80년을 구경꾼으로 산 사람보다, 단 하루를 자기 의지대로 타오르며 주인공으로 산 사람의 생이 훨씬 더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이가 들었기에 우리는 더 치열하게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제는 타인의 박수 소리가 아닌, 오직 내면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관객석은 안전합니다. 비를 맞을 일도, 조롱 섞인 야유를 들을 일도 없죠. 하지만 그곳엔 성장이 없습니다. 오직 무대 위에서 넘어지고, 대사를 잊어 당황하며, 땀방울을 흘리는 그 비루하고도 숭고한 과정만이 인간을 완성합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분석하느라 정작 당신만의 춤을 멈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에게조차 구경꾼이 되기를 자처하며, 가장 안전하지만 가장 지루한 자리에 머물고 있지는 않나요?


"삶은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삶은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분석을 멈추고, 당신의 생이라는 펄펄 끓는 용광로 속으로 다시 한번 투신하시길 바랍니다. - BizM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