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울산바위 입구에 서서 안내판을 보니,
가파른 산길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정말 오를 수 있을까?' 후회가 조금 밀려왔지만,
동시에 이상한 설렘이 느껴졌다. 익숙한 서울의 일상을 벗어나 이 험한 산을 택한 건, 아마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어서였을 거다.
주변에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손잡고 가는 노부부,
젊은 연인들, 그들 사이에서 혼자 서 있으니,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왜일까?
산은 익숙한 그런 곳은 아니다. 나 자신을 알려주는 곳,
익숙한 걸 벗어나 도전해야 할 곳처럼 보였다.
등반 전에 떠올린 동료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
설악산 울산바위 코스는 초보자도 해볼 만하지만,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들었다.
신흥사에서 시작해서 흔들바위를 지나 정상까지
편도 3.8km쯤 되고, 왕복 4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초반은 완만하지만 중간부터 경사가 세지니
속도를 잘 조절하라는 조언이 많았다.
물 한 병과 간단한 간식, 그리고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바람막이 재킷은 꼭 챙겨야 한다.
날씨 앱을 보니 다행히 맑았지만,
비나 강풍이 예보되면 무조건 미루는 게 좋다고 했다.
체력이 약하다면 소공원 주차장 쪽 입구에서 시작해서 거리를 줄이는 게 나을 거라던데, 나처럼 초보자인
사람에게 딱 맞는 팁이었다.
그때, 부드럽지만 자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오신 것 같아요? 혼자 올라가시려고요?"
돌아보니 서른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나처럼 등산복이 제대로 안 된 채, 혼자였다.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삶의 무게가 살짝 느껴졌다.
"네, 처음이에요. 좀 긴장되네요." 내가 솔직히 말하니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같이 가실래요?
혼자 가다 보면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 지더라고요.
특히 이 코스, 흔들바위 지나고 나서부터 계단이 꽤 험해지니까요."
낯선 사람과 함께? 잠시 망설였지만, 초보자인 나에게
그의 말이 심심한 위로가 되는 것 같아 좋았다.
어쩌면 이 만남이 그냥 우연이 아니라 내 여행에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같이 가요."
그렇게 우리는 함께 출발했다.
그의 이름은 준혁. 나와 비슷한 나이의 회사원으로, 혼자 여행 중이라고 했다.
초반 길은 완만해서 대화하기 좋았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이요. 당신은?" "저도 서울인데요." 서울 사람들이 산속에서 만난 게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곧 계단이 나오면서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화가 줄었고, 우리는 동시에 멈춰 섰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서로를 보며 웃었다. "와, 생각보다 힘들어요."
"그러게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봐요."
이 순간, 산은 단순한 등반이 아니었다. 내 한계를 마주치는 과정이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는 내면의 싸움 같았다. 왜 여기서 주저하는 걸까?
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흔들었다.
준혁이 물통을 꺼내며 말했다. "물 자주 마시면서 가요.
탈수되면 더 힘들어지니까요.
작년에도 여기서 쉬었는데, 그때는 혼자라 외로웠어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그는 이어서 물었다.
"혼자 여행 자주 하세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당신은?"
"저는... 두 번째예요. 작년에 한 번 왔었죠."
"작년에도 겨울에?"
"네. 그때는... 헤어진 직후였어요."
그의 고백이 갑자기 나왔다.
나는 멈칫하며 그를 봤고,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이상한 얘기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우리는 다시 올랐다.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는 듯했다.
다리가 떨리고 땀이 흘렀다.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몸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그만 내려가!'
하지만 마음 속으는,
'이걸 넘어야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가자.'
준혁이 말했다. "잠깐 쉬어요. 체력 관리 안 하면 정상에서 후회할 거예요."
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올라온 길이 보였지만 정상은 아직 멀어 보였다.
준혁이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여기서 혼자 쉬었어요.
주변에 커플들이 지나가는데, 음... 가슴을 아프네요."
"5년 사귀었어요. 결혼까지 꿈꿨는데... 결국 제가 끝냈어요."
"왜요?" "사랑했어요. 지금도 사랑해요.
그런데 그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가 행복할 것 같지 않았어요.
사랑하는데 왜 불행할까? 그 모순이 날 괴롭혔어요."
그의 말은 내 가슴에 와닿았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도... 여자친구가 없어요. 1년 넘게요.
사귄 적은 있지만, 항상 어느 순간 막히더라고요.
'이 사람이 영원할까? 더 나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심들.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5년 내내 확신이 없었어요.
사랑에 정답이 있을까요? 아니, 인생 자체에 정답이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산길처럼 인생도, 한계를 마주할 때마다 자신을
직면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준혁이 말했다. "그녀는 울면서 물었어요.
'사랑하면 되지, 왜 확신이 필요해?'
하지만 저한테 사랑은... 충분하지 않았어요.
결혼은 로맨스가 아니라 일상이잖아요.
그 일상이 지루해질까 봐 두려웠어요.
나는 깊이 생각했다. 사랑만으로 충분할까?
결혼은 '우리'가 되어 '나'를 조금 포기하는 게 아닐까?
헤어짐 후 인생은 빈 게 아니라, 새로운 나를 찾는 과정일 수 있지 않을까?
"후회해요?" 내가 물었다. 그는 멈추며 대답했다.
"매일요. 밤마다 그 선택을 곱씹으며 울어요.
그런데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 같아요. 확신 없이 결혼하면,
그 사람의 행복을 빼앗는 기분이 들 테니까."
정상이 가까워지자 준혁이 조언을 하나 더 해줬다.
"정상 가까이 가면 바람이 세게 불어요. 재킷 꼭 챙기세요.
내려올 때 미끄러운 데 많아서 천천히 가는 게 좋아요."
그의 말에 공감이 갔다. 헤어짐은 아프지만,
그게 나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계기일 수 있다.
이 산처럼, 인생의 고통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정상이 펼쳐졌다.
설악의 멋진 봉우리들, 멀리 반짝이는 동해,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아름다운 전경은 모든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난간에 기대어 말없이 서 있었다.
준혁이 먼저 말했다. "작년 여기서 혼자 울었어요. 지금은... 견딜 만해요.
그리움은 여전하지만, 시간이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주네요."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결혼하고 싶어요?" 그는 웃었다.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데... 무서워요.
누군가의 행복을 책임지는 게,
'나'를 잃어버릴까 봐. 헤어짐 후에야 알았어요.
혼자서도 '나'는 강할 수 있다는 걸."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헤어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에요.
고통 속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는 거죠."
우리는 풍경을 한참 봤다. 주변 커플들의 웃음, 가족들의 행복함이 보였다.
우리는 사진 대신 그 순간을 가슴에 남겼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준혁이 물었다. 나는 생각했다.
"편안한 사람요. 가식 없이, 약한 모습 보여도 괜찮은 사람.
함께 있으면 더 나답게 느껴지는 사람." 그는 씁쓸히 웃었다.
"그게 제일 어렵죠. 사랑 속에서도 자신을 숨기게 되니까.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용기가 부족해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확신이 없어도 선택하는 거예요.
완벽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는 거.
인생은 멈춰 있는 게 아니라, 계속 흘러가는 거니까."
내려가는 길은 여전히 험했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우리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일, 가족, 꿈. 그 대화가 왜 그렇게 편안했는지 모르겠다.
입구에 도착해 준혁이 말했다. "서울에서 밥 한 번 먹어요."
연락처를 교환하며 악수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했지만 헤어진 사람, 확신을 찾는 사람.
그 모습이 나와 닮아 있었다.
헤어짐은 잃는 게 아니라, 나를 깨우는 기회라는 걸.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 결혼할까?
누군가와 함께할까, 아니면 혼자서도 괜찮을까?
헤어짐 후 인생은 텅 빈 게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한계를 마주할 때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내디디는 게,
진짜 성숙 아닐까? 산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넌 이미 충분히 강해. 혼자든 함께든, 네 길을 가.'
그날 밤 모텔에서 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산을 오를 수 있었네요."
답장이 왔다. "저도요. 혼자였으면 포기했을 텐데.
진솔한 대화가...
제 마음을 깨웠어요."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확신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을까? 답은 모르지만
그 불확실함 속에서 나를 찾고, 알아가는 게 이번 여행에 있어 가장 큰 목표다.
설악산을 오르며 힘들었던 순간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