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전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어떤 할머니를 만났다.
칠순이 넘어 보였다.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큰 보따리를 들고 계셨다. 무거워 보였다.
"도와드릴까요?"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할머니는 손을 저었다.
그런데 선반에 올리기 힘들어하셔서 내가 대신 올려드렸다.
"고맙네."
"천만에요."
할머니는 자리에 앉으셨다. 숨을 고르셨다.
나는 창밖을 봤다. 들판이 지나갔다.
한참 후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혼자 여행하나?"
"네."
"어디 가는데?"
"전주요. 할머니는요?"
"나도 전주. 아들 보러 가."
"아드님이 전주에 사세요?"
할머니가 잠깐 말이 없으셨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 있어."
이상한 대답이었다. '거기 있다'는 게 사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기차가 달렸다. 할머니는 창밖을 보셨다. 나도 봤다.
침묵이 흘렀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
한참 후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여셨다.
"우리 아들 5년 전에 갔어."
가슴이 철렁했다. '갔다'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죽었다는 뜻.
"...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할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5년이 지나서 그런가?
아니면 담담한 척하는 건가?
"교통사고였어. 갑자기였지. 아침에 출근하다가. 전화 왔어.
병원에 오래. 뛰어갔지. 그런데 이미... 늦었더라고."
할머니의 손이 떨렸다. 무릎 위에 놓인 손. 주름진 손.
나는 그 손을 봤다.
"혼자 키웠어.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둘이 살았지.
힘들었지만 행복했어. 아들이 착했거든. 공부도 잘하고, 효자였어."
할머니가 보따리를 내려다봤다.
"여기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 있어.
만두, 떡, 과일. 맨날 가져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나는 눈치챘다. 할머니는 묘지에 가는 것이다.
아들을 만나러.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아들을.
"... 힘드시겠어요."
"힘들지. 맨날 힘들어. 아침에 눈 뜨면 아직도 아들 방문 열어봐.
혹시나 하고. 그런데 없더라고. 맨날 없어."
할머니의 눈이 붉어졌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마 다 흘렸을 것이다. 5년 동안.
"근데 살아야지. 내가 죽으면 아들 누가 찾아가. 누가 음식 갖다 줘. 그래서 살아."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삶.
죽은 사람 때문에 사는 삶. 속초 시장에서 느꼈던 그 슬픔.
"아들이 맨날 그랬어. 엄마 천천히 살래. 그렇게 바쁘게 살지 말래.
나는 맨날 바빴거든. 일하고, 집안일하고, 쉴 틈이 없었어.
아들이 천천히 살라고 했는데... 이제 천천히 살아. 아들 없이."
할머니가 나를 봤다. "너도 바쁘게 사나?"
"... 네. 되게 바빠요."
"천천히 살아. 빨리 살면 놓쳐. 중요한 거. 나처럼."
"뭘 놓치셨는데요?"
할머니가 잠깐 생각하셨다.
"시간. 아들이랑 밥 먹을 시간. 같이 TV 볼 시간.
그냥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시간.
맨날 바빠서 못 했어. 이제 하고 싶어도 못 해."
기차가 전주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할머니도 일어나셨다.
나는 보따리를 내려드렸다.
"고맙네."
"아니에요.... 할머니, 힘내세요."
할머니가 씁쓸하게 웃으셨다.
"힘내도 돌아오진 않아. 그래도 살아야지. 아들 기다리니까."
할머니는 걸어가셨다. 허리가 굽은 뒷모습. 무거운 보따리를 든 모습.
나는 그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전주 한옥마을로 향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할머니 이야기가 계속 떠올랐다.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
혼자 남은 엄마. 죽은 아들을 위해 사는 엄마.
전동성당 앞에 섰다. 오래된 건물이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냥 건물을 봤다. 오래 서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을 봤을까?
얼마나 많은 기도가 이곳에서 올려졌을까?
한옥마을 골목으로 들어갔다.
메인 거리를 벗어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관광객이 줄었다.
고요했다. 기와지붕, 돌담, 나무 대문.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었다.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천천히 살아." 나는 조급하게 살았다.
항상. 급하게 걷고, 빨리 먹고, 서둘러 일했다.
느리면 뒤처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뒤처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죽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한 카페에 들어갔다. 한옥을 개조한 곳이었다. 마루에 앉았다.
창밖으로 골목이 보였다. 커피를 주문했다.
"천천히 드세요." 주인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면?
갑자기? 할머니 아들처럼? 후회할 게 뭘까?
일을 더 못 한 것? 아니었다. 돈을 더 못 번 것?
그것도 아니었다. 승진을 못 한 것? 아니었다.
아마도 후회할 건... 천천히 살지 못한 것. 여유롭게 살지 못한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엄마 생각이 났다. 언제 마지막으로 엄마랑 밥 먹었지?
기억이 안 났다. 너무 오래전이었다. 바빴다. 약속이 있었다.
미뤘다. 다음에 보자고 했다. 그런데 다음은 언제였지?
만약 엄마가 내일 갑자기 가신다면? 상상하기 싫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 갈지 모른다.
할머니 아들처럼. 아침에 출근하다가. 갑자기.
손이 떨렸다.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엄마."
"응? 왜?"
"...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 있어? 너 이상한데."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냥... 보고 싶어."
"어디야? 아직 여행 중이지?"
"응. 전주."
"밥은 먹었어?"
"응. 엄마는?"
"나도 먹었지."
또 침묵. 나는 말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바쁘다고 핑계 대고 안 만난 것. 전화도 자주 안 한 것. 그런데 말이 안 나왔다.
"엄마."
"왜?"
"... 건강해."
"너도."
"곧 갈게. 밥 먹자."
"그래. 조심해."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왜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울까? 왜 고맙다는 말을 못 할까?
골목을 다시 걸었다. 할머니가 이 골목을 걸으셨을까?
아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아니면 만나고 오는 길에?
한 담벼락 앞에 섰다. 누군가 작은 글씨를 써놨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 늦어도 괜찮아. 살아 있으면 괜찮아."
눈물이 났다. 왜 우는지 모르겠다. 그냥 울었다. 골목 한편에서. 혼자서.
할머니의 아들은 천천히 살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못 했다.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끝났으니까.
나는 아직 시간이 있다. 천천히 살 수 있다. 엄마를 만날 수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미루는 걸까? 왜 바쁘다고 핑계 대는 걸까?
왜 다음에, 나중에, 언젠가라고 하는 걸까?
벤치에 앉았다. 노트를 꺼냈다. 펜을 들었다. 적었다.
"살아 있을 때 사랑하자. 살아 있을 때 고마워하자. 살아 있을 때 함께 있자.
나중은 없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적고 나니 선명해졌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함께 있는 시간. 그게 전부였다.
할머니는 깨달으셨을 것이다. 너무 늦게. 아들이 가고 나서.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냥 밥 먹는 시간, TV 보는 시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시간. 그게 얼마나 귀한지.
나는 아직 늦지 않았다. 엄마는 살아 계신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함께할 시간이 있다. 아직.
해가 지고 있었다. 골목이 어두워졌다. 한옥의 처마에 불이 들어왔다.
따뜻한 빛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갔다. 집으로 가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사람들.
나도 일어섰다. 어디로 갈까? 숙소? 아니었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전화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여행 끝나고 바로 갈게. 맛있는 거 먹자.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 다 하자. 시간 많이 보내자."
답장이 왔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래?"
"아무 일도 없어. 그냥 엄마랑 시간 보내고 싶어. 늦기 전에."
"... 알았어. 엄마도 좋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골목을 나왔다. 마음이 가벼웠다.
뭔가 결심한 기분이었다.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겠다고.
천천히 살겠다고. 중요한 것 먼저 하겠다고.
할머니는 아직도 묘지에 계실까?
아들 옆에 앉아 계실까? 만두와 떡을 놓고, 이야기하고 계실까?
"엄마 왔어. 오늘도 왔어. 내일도 올게."
그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났다. 슬펐다. 동시에 아름다웠다.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살아 있는 사람이 계속 사랑하는 한.
전주의 골목이 내게 준 것. 느림.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발견한 것.
진짜 중요한 것. 살아 있을 때 사랑하는 것. 후회하지 않게 사는 것.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천천히 살아." 나는 이제 안다. 천천히 사는 게 뭔지.
바쁘게 달리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것과 함께 있는 것.
그게 천천히 사는 것이라고.
그날 밤, 나는 오래 잠들지 못했다. 생각이 많았다.
엄마, 가족,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과 얼마나 시간을 보냈나?
얼마나 사랑한다고 말했나? 충분했나?
아니었다.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게.
후회하지 않게. 살아 있을 때.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