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날씨는 조금 쌀쌀했지만 화창했다.
여수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독특했다. 승려였다.
회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이키. 형광색. 묘한 조합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하셨다.
"안녕하세요." 나도 인사했다.
"여행 중이신가 봐요?"
"네. 스님도요?"
"저요? 저는 뭐... 여행이라기보다는..." 웃으셨다.
"그냥 돌아다니는 거예요."
"돌아다니는 거요?"
"네. 절에만 있으면 답답해서요. 가끔 나와야 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승려도 답답할 수 있구나.
당연한 건데 새로웠다.
"어디 가세요?" 스님이 물으셨다.
"여수요. 오동도 보러요."
"아, 좋죠. 석양 예쁘더라고요. 저도 작년에 갔었어요."
"스님도 석양 보러 가세요?"
"왜요? 스님은 석양 보면 안 돼요?" 장난스럽게 물으셨다.
나는 웃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래요. 스님은 뭔가 다를 거라고.
석양 안 보고, 밥 안 먹고, 화장실 안 가고." 크게 웃으셨다.
"다 사람인데. 배고프면 밥 먹고, 석양 예쁘면 보고 싶고."
당연한 말인데 웃겼다. 이 스님, 재밌는 분이었다.
"근데 진짜로 여행 자주 하세요?"
"자주요. 절에 오래 있으면 제가 절이 돼요.
부처님 말씀만 외우고, 경전만 읽고.
그러면 세상이 안 보여요. 그래서 나와요."
"세상을 보려고요?"
"네. 그리고 사람들도 만나고. 당신같이."
"저요?"
"네. 당신, 뭔가 고민 있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당황했다.
"어떻게 아세요?"
"표정이요. 뭔가 찾고 있는 표정. 길 잃은 표정."
맞았다. 나는 길을 잃었다.
아니, 솔직히 나를 찾고 있었다.
"맞아요. 저... 지금 저를 찾는 중이에요."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자기를 찾는 거. 가장 어려운 일이죠."
"스님은 찾으셨어요? 자기를?"
스님이 웃으셨다. "글쎄요. 찾았나? 아직도 찾는 중인 것 같은데."
"스님도요?"
"그럼요. 저도 사람인데. 매일 변하는걸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달라요.
찾았다 싶으면 또 잃어버려요."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스님도 그런데, 나는 당연하구나.
"근데요, " 내가 물었다. "스님은 왜 중이 되셨어요?"
"왜 긴요. 도망쳤죠."
"도망이요?"
"네. 세상이 무서워서. 경쟁하기 싫어서. 사람들 눈치 보기 싫어서.
그래서 도망쳤어요. 절로."
너무 솔직했다. 승려가 이렇게 말해도 되나?
"근데 절에 가니까, " 스님이 계속 말했다.
"거기도 세상이더라고요.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해요.
경쟁하고, 눈치 보고. 도망친 게 소용없었어요."
"그럼 후회하세요?"
"아니요. 안 해요. 도망쳤지만 배웠거든요. 중요한 걸."
"뭘요?"
"내려놓는 거요."
내려놓기. 나도 배우고 싶은 것.
"어떻게 내려놓아요?"
스님이 잠깐 생각하시더니 물으셨다.
"당신, 지금 뭐 잡고 있어요?"
"네?"
"손에. 뭐 잡고 있어요?"
나는 손을 봤다. 가방 끈을 잡고 있었다.
"가방이요."
"왜 잡고 있어요?"
"... 떨어질까 봐요."
"놔봐요."
"네?"
"놔보라고요."
나는 가방 끈을 놨다. 가방은 떨어지지 않았다.
옆에 그대로 있었다.
스님이 웃으셨다.
"봐요. 안 놔도 안 떨어져요. 옆에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 잡고 있어요.
떨어질까 봐. 잃을까 봐."
"..."
"내려놓는다는 건 버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쥐지 않는 거예요.
옆에 두는 거예요. 필요하면 다시 들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쥐고 있죠. 손에 힘주고.
그러면 손 아파요."
그 비유가 와닿았다. 나는 뭘 쥐고 있을까?
일? 성공? 인정? 다 쥐고 있었다.
놓으면 잃을까 봐.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피곤했던 거구나.
"스님, 그럼 어떻게 놔요? 무섭잖아요."
"무섭죠. 당연히. 근데요, 놔야 다른 걸 잡을 수 있어요.
손에 짐 잔뜩 들고 있으면 새로운 거 못 잡잖아요.
놔야 받을 수 있어요."
여수역에 도착했다. 스님이 일어나셨다.
"저 여기서 내려요."
"아, 저도요."
"그래요? 같이 걸을까요?"
우리는 함께 오동도로 향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방파제 끝까지 걸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스님도 휴대폰을 꺼냈다.
"스님도 사진 찍으세요?"
"당연하죠. 인스타에 올려야죠."
"네?"
"농담이에요." 크게 웃으셨다.
"근데 사진은 찍어요. 예쁘잖아요."
우리는 난간에 기대어 섰다. 석양을 봤다.
말없이. 한참 동안...
스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당신은, 뭘 내려놓고 싶어요?"
생각해 봤다.
"모든 거요. 일, 고민, 불안. 다요."
"한꺼번에는 못 놔요. 하나씩 놔야 해요."
"뭐부터 놔야 할까요?"
스님이 나를 봤다.
"자기 자신이요."
"네?"
"자기 자신. 그거 제일 무거워요.
'나는 이래야 해', '나는 저래야 해'.
그런 생각들. 그거 놔요."
"그럼 나는 뭐가 돼요?"
"아무것도 안 되면 돼요.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게... 가능해요?"
"모르죠. 근데 해볼 만해요."
해가 수평선 너머로 내려갔다. 천천히. 조용히. 스님이 말했다.
"봐요. 저 해. 지려고 애쓰지 않아요. 그냥 져요.
우리도 그렇게 살면 되는데. 자꾸 버티려고 해요. 안 지려고."
"지면 어떻게 돼요?"
"또 떠요. 내일."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해가 바다너머로 져도 괜찮다. 내일 또 뜨니까.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스님이 말했다.
"저 가볼게요."
"어디 가세요?"
"절이요. 돌아가야죠. 나왔다가도 돌아가야 해요."
"... 또 도망가고 싶지 않으세요?"
스님이 웃으셨다.
"가끔요. 그럴 때 또 나와요. 그러다 또 돌아가고.
그게 삶인 것 같아요. 나왔다 돌아가고, 놨다 잡고, 있다 없고."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죠. 근데 재밌어요. 매일 다르니까."
스님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했다.
"행복하세요. 너무 쥐지 말고."
"스님도요. 감사했어요."
"뭐가요. 저도 좋았어요. 당신을 만나서."
스님이 걸어가셨다. 운동화 신은 뒷모습.
형광색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그 모습이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도망쳤지만 돌아가는 스님.
내려놓았지만 다시 마음을 잡는 스님.
승려이지만 사람인 스님.
혼자 난간에 서 있었다. 어둠이 내렸다. 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수는 서울보다 별이 많았다.
가방 끈을 봤다. 이제는 쥐고 있지 않았다.
그냥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떨어지지 않았다.
스님 말이 맞았다. 쥐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다면 나는 뭘 놓아야 할까? 진짜로?
'이래야 한다'는 생각.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심.
'완벽해야 한다'는 집착. 다 내려놓아야 할 것들.
무서웠다. 그거 다 놓으면 나는 뭐가 남지?
텅 빈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스님이 말했다. "아무것도 안 되면 돼요."
텅 비어도 괜찮다.
아니, 텅 비어야 새로운 걸 채울 수 있다.
잡을 것들은 가벼웠다. 무겁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잡을 수 있는 것들.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나 오늘 진짜 이상한 스님 만났어.
운동화 신고 다니는 스님.
인스타 농담하는 스님. 근데 좋은 말 해줬어.
너무 쥐지 말래. 내려놓으래."
답장이 왔다. "무슨 소리야. 술 마셨어?"
"아니. 진짜야. 좋은 스님이었어.
엄마, 나 조금 변한 것 같아. 좋은 쪽으로."
"그래? 다행이다. 그래도 너무 변하지는 마.
엄마는 네가 좋거든."
눈물이 났다. 왜 이런 메시지에 울까. 그런데 울었다.
엄마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변하지 않아도.
성공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그럼 나도 나를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나로도 충분한 거 아닌가?
방파제를 걸어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그런데 기분 좋았다. 뭔가 가벼워진 기분. 손에서 힘을 뺀 기분.
숙소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맥주를 샀다.
스님 생각이 나서 웃었다. 스님도 맥주 마실까?
당연히 마시겠지. 사람인데.
숙소에 도착해서 맥주를 땄다. 한 모금 마셨다. 시원했다.
창밖을 봤다. 여수의 화려한 밤바다가 보였다.
오늘 느낀 것들.
내려놓기. 쥐지 않기. 놔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스님도 사람이라는 것.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았다. 승려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고,
다들 사람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답을 아는 사람도 없다.
다들 찾아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도 찾아가면 된다. 조급하지 않게.
자책하지 않게. 손에 힘 빼고. 천천히.
맥주를 다 마시고 누웠다. 피곤했지만 기분 좋았다.
오늘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려놓았으니까.
잠들기 전 마지막 생각.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된다.
이 여행이 끝나도 나 자신을 찾는 것은 계속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리고 하늘을 보니 살아 있음을 느낀다.
맥주도 마시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사람으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여수의 밤은 별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그 별빛과 함께 깊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