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남해 독일마을 — 길을 잃어 생긴 풍경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by 하늘바라기

아침부터 몸이 뻐근했다.

오랜만에 렌터카를 빌렸다. 익숙하지 않은 채,

내비게이션을 켰다. 목적지를 입력했다.

'남해 독일마을' 경로가 나타났다.

오동도에서 독일마을까지 예상 시간 1시간 30분.

출발 버튼을 눌렀다.


"500미터 앞에서 좌회전하세요."

의심하긴 싫지만 나는 시키는 데로만 했다.

그러니까 내비게이션 없이는 못 간다.

길을 모르면 불안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계획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차를 이끌었다.

좌회전, 우회전, 직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랐다. 그러니 마음이 편했다.

그러니 길을 잃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30분쯤 지났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배터리가 나간 것이다.

충전기를 안 챙긴 결과인가.


당황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지금 어디쯤 인지도 모르겠다.

표지판을 봤다. '남해 방면'. 일단 맞는 방향인 것 같다.

그런데 확신이 없었다.

차를 세울까? 편의점 찾아서 충전할까? 아니면 그냥 갈까?

고민했다. 손에 땀이 났다. 이렇게 불안한 게 우스웠다.

길 하나 잃은 건데. 죽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게 나였다. 늘 이랬다.


확신이 없으면 못 가는 사람.

계획이 틀어지면 패닉 하는 사람.

통제할 수 없으면 불안한 사람.


'아, 진짜 나 왜 이래?'


짜증이 났다. 나한테. 이렇게 불안해하는 나한테.

좀 편하게 살 수는 없나? 좀 즉흥적으로 살 수는 없나?

그때 여수에서 만난 스님이 떠올랐다.


"너무 쥐지 말래. 내려놓으래."


그래, 내려놓자. 내비게이션도 내려놓고, 계획도 내려놓자.

그냥 가보자. 어디든.

깊게 숨을 쉬었다. 다시 차를 몰았다.

이번에는 표지판만 보면서.

'남해'. 그쪽으로 가면 되는 거다. 간단하다.

해안도로가 나타났다. 바다가 보였다. 파란 바다.

오른쪽으로 굽은 길. 나는 그냥 그 길을 따라갔다.

목적지가 어딘지 몰랐다. 언제 도착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갔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불안한데 동시에 자유로웠다.

통제할 수 없는데 그게 괜찮았다. 혹시 길을 잃으면?

그럼 어때? 다시 물어보면 되지. 돌아가면 되지.

그렇게 한 30분쯤 달렸을까. 작은 전망대 같은 곳이 나타났다.

차를 세웠다. 사람은 없었다. 나만 있었다.


차에서 내려 난간에 기댔다. 바다가 펼쳐졌다.

섬들이 떠 있었다. 물빛이 투명했다. 바람이 불었다.

여기가 어딘지 몰랐다. 지도에도 없는 곳 같았다.

유명하지 않은 곳, 관광지도 아니었다.

그냥 길 중간에 있는 보석 같은 작은 공간.


그런데 완벽했다. 아름다웠다.

이 순간, 푸른빛 바다, 살랑이는 바람,

이 고요. 모든 게 너무 좋았다.

계획했다면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했다면, 정해진 경로만 따랐다면,

이 풍경을 놓쳤을 것이다.


노트를 꺼내 급히 생각이 머물러 있는 때 메모했다.


"나는 너무 계획적이야. 너무 통제하려 하고.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해. 이게 문제다.

이렇게 살면 이런 순간을 놓친다."


적고 나니 명확해졌다. 내가 고쳐야 할 것.

아니, 내려놓아야 할 것.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서울에 있는 친구였다.


"야, 어디야?"

"남해. 근처."

"재밌어?"

"응. 근데 있잖아."

"왜?"

"나 오늘 길 잃었어."

"뭐? 괜찮아?"

"응. 괜찮아.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좋았어."

"... 너 진짜 이상해졌다. 예전 같으면 난리 났을 텐데."


맞았다. 예전의 나라면 패닉 했을 것이다.

길 잃은 거 자체가 재앙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았다. 오히려 좋았다.

"나 변한 것 같아."

"어떻게?"

"모르겠어. 그냥... 좀 편해진 것 같아. 계획 안 돼도 괜찮고, 통제 안 돼도 괜찮고."

"좋은 거 아니야? 너 원래 너무 빡빡했어. 계획 조금만 틀어져도 스트레스받고."


친구 말이 맞았다. 나는 너무 빡빡했다. 유연하지 못했다.

조금의 변수도 못 견뎠다. 그게 나를 힘들게 했다.

"그니까. 이제 좀 풀어야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계속 힘들 것 같아."

"어떻게 풀 건데?"

"모르겠어. 일단... 계획 덜 하기? 즉흥적으로 살아보기? 그런 거?"

"너한테 제일 어려운 거네."

"맞아. 근데 해야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런 풍경 평생 못 볼 것 같아."

전화를 끊고 다시 바다를 봤다.

변해야 한다. 나는 변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뭘 바꿔야 할까? 생각해 봤다.


첫째, 계획 덜 하기. 모든 걸 미리 정하지 말기. 여유 두기. 빈 시간 만들기.

둘째, 즉흥적으로 행동하기. 끌리는 대로 가보기. 하고 싶은 거 바로 하기. 나중에 하지 말고.

셋째, 통제 포기하기. 모든 걸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거 인정하기. 흘러가는 대로 두기.

넷째, 완벽주의 버리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받아들이기. 실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노트에 적으면서 생각했다.

'이거 다 지키기 힘들 텐데.' 맞다.

평생 살아온 습관인데 쉽게 바뀔까? 안 바뀔 것이다.

그런데 시도는 해야 한다.

조금씩이라도. 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도.

안 그러면 평생 이렇게 산다. 불안하게.

통제하려고 애쓰면서. 진짜 중요한 것들 놓치면서.


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내비게이션 없이 다시 출발했다.

표지판만 보면서. 감으로. 마음 가는 대로.

좌회전할까, 직진할까? 고민됐다. 예전 같으면 검색했을 것이다.

'어느 길이 더 빠른가', '어느 길이 더 좋은가'.

그런데 오늘은 그냥 느낌으로 정했다.

좌회전. 왜? 그냥. 끌려서.


길은 구불구불했다. 산길이었다. 바다가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할머니 한 분이 밭에서 일하고 계셨다.

평화로웠다. 이 길이 맞는 길인가? 몰랐다. 그런데 괜찮았다.

틀려도 괜찮았다. 돌아가는 것도 여행이니까.


한 시간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독일마을 표지판이 나왔다.

결국 도착한 것이다. 내비게이션 없이.

계획 없이. 그냥 가다 보니.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웃음이 났다.


'나도 할 수 있네.'


내비게이션 없이도. 계획 없이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아니, 길을 잃어도 괜찮았다. 다시 찾으면 됐으니까.

독일마을을 걸었다. 독특한 건물들. 유럽풍 집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나도 몇 장 찍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완벽한 구도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찍었다. 흔들려도 괜찮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됐다.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주문했다.


"뭐 드릴까요?"

"아무거나요. 추천해 주세요."

예전의 나는 절대 이렇게 주문하지 않았다. 항상 정확하게 말했다.

"아메리카노, 샷 추가, 얼음 적게." 오늘은 맡겼다.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카페라테 어때요?"

"좋아요."

라테가 나왔다. 마셔봤다. 맛있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아니, 선택하지 않아서 더 좋았을지도.

새로운 맛이었으니까.


창밖을 봤다. 구름 낀 바다가 보였다.

오늘 본 여러 바다 중 하나.

그런데 특별했다. 왜? 계획하지 않았으니까.

길을 잃어서 찾은 거니까.

노트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나는 오늘부터 조금씩 변하기로 한다.

완벽하게 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끔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조금씩이라도 변하면 된다.

계획 덜 하고, 통제 덜 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기.

그게 진짜 사는 거라는 걸 오늘 배웠다."


적고 나니 다짐 같았다.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메모했다. 기억하기 위해서.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섰다. 이제 어디로 갈까?

계획은 없었다. 통영? 부산? 아니면 다른 곳?

그때 옆 테이블에서 들렸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 진짜 좋더라."

거제도. 계획에 없던 곳. 가볼까? 왜?

그냥. 끌려서.


나는 웃으며 차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좋았다.

길을 잃을 수도 있고, 헤맬 수도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런데 괜찮다. 그 과정에서 뭔가 찾을 수도 있으니까.

계획에 없던 풍경을. 예상하지 못한 나 자신을.

차를 몰며 생각했다.

'나 진짜 변하고 있구나.' 조금씩. 천천히.

그런데 확실하게.

그리고 그 변화가, 나를 자유롭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