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통영에 도착한 건 저녁 6시쯤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동피랑 마을로 향했다.
언덕 위 마을이라고 했다. 벽화가 유명하다고 했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팔랐다. 설악산 울산바위 생각이 났다.
준혁이 생각났다.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후회하고 있을까?
중간쯤 올라갔을 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이상했다. 이 시간에 엄마가 전화를?
보통은 문자를 하시는데.
"여보세요?"
"... 아들아."
엄마 목소리가 이상했다. 떨리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뭐? 언제?"
"오늘 오후에. 지금 병원이야."
"어디? 어느 병원?"
"서울대병원. 근데..."
"근데 뭐?"
"... 의식이 없으셔. 뇌출혈이래. 의사 선생님이... 각오하래."
각오. 그 단어의 의미를 알았다.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뜻.
"지금 갈게."
"어디야? 통영이라고 했지?"
"응. 근데 바로 갈게. 버스 타면 돼."
"아들아, 천천히 와. 위험하게 오지 마.
할아버지... 기다리실 거야."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할아버지.
내가 여행 떠나기 전에 봤던 할아버지.
"잘 다녀와. 조심하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할아버지.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서둘러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계단에 주저앉았다. 숨이 가빠졌다. 어지러웠다.
'진정해. 진정하자. 패닉 하면 안 돼.'
깊게 숨을 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조금씩 진정됐다.
휴대폰을 꺼냈다. 검색했다. '통영에서 서울 가는 법'.
버스가 나왔다. 마지막 버스 출발 시간 7시.
지금 6시 20분. 40분 남았다.
터미널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지? 택시 타면? 20분? 30분?
모르겠다. 일단 가자. 서두르자.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풀렸다. 다시 주저앉았다.
머리가 하얘졌다. 생각이 안 됐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돌아보니 중년 남자분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
"아, 네... 괜찮아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프세요?"
"아니요. 그냥...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분이 물병을 건넸다. "일단 물 좀 드세요. 진정하고."
물을 마셨다. 차가웠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낯선 사람한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입이 열렸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서울에서. 저 지금 가야 하는데..."
"그러시구나. 버스 타려고요?"
"네. 7시 버스. 그런데 제가 지금..."
"여기서 터미널까지 택시로 30분쯤 걸려요. 제가 차 있는데, 태워드릴까요?"
"네? 아니, 괜찮아요. 제가..."
"괜찮아요. 저도 그쪽 방향이에요. 가시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분 차를 탔다.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출발했다.
"가족이세요? 할아버지?"
"네. 외할아버지예요."
"많이 걱정되시겠어요."
"네... 의식이 없으시래요. 뇌출혈이래요."
"... 그러시구나."
침묵이 흘렀다. 그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까우셨어요? 할아버지랑?"
가까웠나? 생각해 봤다. 자주 봤나? 아니었다.
1년에 몇 번? 명절? 생일? 그것도 안 갈 때가 많았다. 바빴으니까.
"... 잘 모르겠어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자주 못 뵀어요. 바빠서."
"그래도 지금 달려가잖아요. 그게 가까운 거예요."
그 말이 위로가 됐다. 맞다. 나는 지금 가고 있다. 그게 중요한 거다.
"제 아버지도 그렇게 가셨어요." 그분이 말했다.
"갑자기. 뇌출혈. 저는 부산에 있었어요. 전화받고 올라갔는데... 늦었어요."
"...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오래됐어요. 근데 아직도 후회해요. 자주 못 뵌 거. 마지막에 못 본 거."
침묵이 흘렀다. 나도 그렇게 될까? 후회하게 될까?
"근데요, " 그분이 말했다.
"후회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다들 후회해요. 충분히 못 했다고.
더 사랑할걸. 더 자주 볼 걸. 근데 그래도 괜찮아요.
최선을 다했으니까. 당신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지금."
나는 울었다. 눈물이 났다.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기다리실까요?"
"기다리실 거예요. 손자 보고 싶으실 거예요."
"제가... 잘하지도 못했는데. 자주 찾아뵙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손자는 손자예요. 사랑하세요. 당신을."
터미널에 도착했다. 6시 50분. 10분 남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천천히 가세요. 안전하게. 할아버지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차에서 내렸다. 달렸다. 매표소로. "서울 가는 버스요!"
"7시 버스죠? 자리 있어요." 표를 샀다. 플랫폼으로 뛰어갔다.
버스에 올랐다. 숨이 찼다.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그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고마웠다. 모르는 사람인데. 도와줘서.
버스가 출발했다. 통영이 멀어졌다. 나는 서울로 향했다.
할아버지에게로.
5시간. 고속도로. 어둠. 나는 창밖을 봤다. 불빛들이 지나갔다.
다른 차들. 다른 사람들. 다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각자의 이유로. 휴대폰을 봤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버스 탔어. 12시쯤 도착해. 할아버지 어떠세요?"
답장이 왔다. "그대로야. 의식 없으셔. 천천히 와. 조심해."
천천히. 다들 나한테 천천히 오래. 그런데 나는 빨리 가고 싶었다.
할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전주에서 만난 할머니가 떠올랐다. 5년 전 아들을 잃은 할머니.
"아들이 맨날 그랬어. 엄마 천천히 살래. 나는 맨날 바빴거든.
아들이 천천히 살라고 했는데... 이제 천천히 살아. 아들 없이."
나도 그랬다. 할아버지한테. 바빴다. 회사 일, 약속, 일정. 늘 바빴다.
"할아버지, 다음에 뵐게요. 바빠서." 다음, 다음, 다음. 계속 미뤘다.
이제 다음이 없을지도 몰랐다.
노트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 불빛으로 적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미뤘다.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나중에, 다음에, 언젠가.
그런데 나중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은 없을 수도 있다. 언젠가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적으면서 울었다. 버스 안. 어둠 속. 혼자서.
옆자리 아주머니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으세요? 우는데."
"할아버지가... 위독하세요."
"아이고. 그래서 서울 가는구나. 힘내요. 괜찮을 거예요."
괜찮을까? 모르겠다. 그런데 가야 한다.
괜찮든 안 괜찮든.
버스는 달렸다. 쉬지 않고. 나는 창밖을 봤다.
어둠 속을 달리는 차. 나도 그랬다.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11시 50분. 서울 도착. 버스에서 내렸다. 택시를 탔다.
"서울대병원이요. 빨리 가주세요."
병원 응급실. 형광등. 소독약 냄새. 엄마가 보였다.
외삼촌들도 있었다. 다들 지쳐 보였다.
"엄마."
"왔구나." 엄마가 안았다. "고생했어."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이야. 면회 안 돼. 의사 선생님이... 오늘 밤이 고비래."
"... 들어가 볼 수 없어요?"
"1분. 1분만 허락했어. 가족들 한 명씩. 네가 마지막이야."
중환자실 앞. 간호사가 말했다.
"1분만요. 말씀 걸어보세요. 들으실 수도 있어요."
문이 열렸다. 들어갔다. 기계 소리. 삑삑. 심전도. 산소호흡기.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눈을 감고.
침대 옆에 섰다.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작았다. 이렇게 작은 손이었나?
"할아버지."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의식이 없으시니까.
"저예요. 손자. 왔어요. 통영에서."
아무 반응 없었다.
"할아버지, 미안해요. 자주 못 찾아뵀어요.
바빠서. 그게 핑계였어요. 그냥... 게을렀어요."
눈물이 났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맨날 말 안 했는데. 사랑해요. 고마워요.
저 키워주셔서. 용돈 주셔서. 제 얘기 들어주셔서."
할아버지 손이 움직인 것 같았다. 착각인가? 아니다.
움직였다. 손가락이. 약간.
"할아버지? 들려요?"
눈꺼풀이 떨렸다. 천천히. 눈이 떠졌다. 아주 조금. 나를 봤다.
웃으신 것 같았다. 아주 조금.
"할아버지!"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안 났다. 그런데 읽을 수 있었다.
"잘... 다녀왔니?"
"네. 잘 다녀왔어요."
"... 좋아."
그게 마지막 말씀이었다. 눈이 다시 감겼다.
손에 힘이 빠졌다. 간호사가 들어왔다.
"나가셔야 해요."
"할아버지, 나 또 올게요. 기다리세요. 네?"
나왔다. 엄마가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
"... 잘 다녀왔냐고. 좋다고."
엄마가 울었다. 나도 울었다. 다 같이 울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새벽 3시. 조용히. 평화롭게.
나는 할아버지를 봤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달려갔으니까. 말했으니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자주 못 뵌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게 중요한 거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는 것. 후회 없이 사는 것.
통영에서 만난 그 남자분이 옳았다.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지금."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봤다.
그게 통영에서 내가 찾은 나였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
늦었지만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사람.
완벽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