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부산 광안리 — 홀로 된다는 것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by 하늘바라기

할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3일장. 사람들이 왔다 갔다.

조문객, 친척들, 할아버지 친구들.

나는 상주 옆에 앉아 절을 받았다.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반복했다.


장례식장 냄새가 옷에 밴 것 같았다.

슬픔이 스며든 국화 냄새. 향 냄새.

3일째 되는 날 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숨이 막혔다.

잠시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 섰다.

하늘에는 별이 없었지만 서울의 하늘은 밝았다.


담양의 대숲이 떠올랐다. 거기서 적었던 문장.

"나는 작아져도 괜찮다. 느끼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 있으니까."


할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슬픔을 뒤로한 채 휴대폰을 꺼내 검색했다. '부산행 기차'. KTX가 있었다.

내일 아침 6시. 무작정 예매했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내일 다시 여행 갈게. 괜찮지?"

답장이 왔다.

"그래. 가. 할아버지도 그러고 싶어 하실 거야. 잘 다녀와."

3일장이 끝나갈 때쯤 장례식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 영정 앞에 섰다.

절을 했다.

"할아버지, 다시 여행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라고 하신 거. 끝까지 할게요. 이제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영정 속 할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모르겠다. 젊어 보이셨다.

행복해 보이셨다. 다음 날 아침, 부산으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나는 노트를 펼쳤다.

지금까지 메모한 것들을 잠시 펼쳐 보았다.


"나를 찾으러 간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있다."

"살아 있을 때 사랑하자."

"나는 작아져도 괜찮다."

"너무 쥐지 말기. 내려놓기."

"계획 덜 하고, 통제 덜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후회 없이 사는 것."


부산역에 도착했다. 짐을 맡기고 광안리로 향했다.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출근 시간이었다.

모두 피곤해 보였다. 나도 피곤했다.


광안리 해변에 도착한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평일 아침이라 그런가. 조용했다.

해변을 걸었다. 광안대교가 보였다. 길었다.

저 다리를 차들이 건너갔다. 쉬지 않고. 어디론가. 모두 바빴다.


벤치에 앉았다. 바다를 봤다. 파도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강릉에서 본 파도처럼.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혼자라는 것을.


여행 내내 사람들을 만났다.

준혁, 할머니, 스님, 친구들, 낯선 사람들. 그런데 결국 혼자였다.

만나고 헤어지고. 함께 있다가 다시 혼자. 그게 인생이었다.


할아버지도 그랬다.

함께 있었지만 홀로 저세상으로 가셨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은 홀로 그 자리에 남았다.

사람은 결국 태어나서 홀로 자연스럽게 죽는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잠시 누군가와 함께할 뿐이다.

그리고 행복한 그 시점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그 때다.


이제 슬프지 않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홀로 사는 삶, 고독. 외로움 그게 자연스러웠다.

속초 시장에서 처음 느꼈던 것.

'혼자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냥 스스로 대화할 뿐.'

그게 나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 왜 피하려 했을까?


사람들이 하나둘 지나갔다. 조깅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강아지와 걷는 사람.

다들 각자의 세상에 있었다. 함께 있지만 혼자였다.

나도 그랬다. 이 해변에 수백 명이 있지만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괜찮다. 외롭지 않다. 고독했지만 평화롭다.


휴대폰을 꺼내 노트 앱을 열었다.

지금까지 느낀 것들을 다시 되뇌며

담양에서 적었던 목록 "내려놓을 것들."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심 등


다 내려놨나? 아니었다. 아직도 쥐고 있었다. 조금씩은.

그런데 예전보다는 덜 쥐고 있었다. 손에 힘을 조금 뺐다.

그리고 완벽하게 내려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계속 쥐었다 놨다 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그게 바로 나임을 인식하는 순간,


중요한 건 완벽하게 내려놓는 게 아니었다.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것. 쥐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것.

그리고 가끔이라도 손을 펴는 것.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본 것. 사람들의 슬픔.

다들 완벽하지 않았다. 울다가 웃기도 했고,

외삼촌은 화를 냈다가 미안해했다.

나는 멍하게 보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다들 불완전했다.


그런데 그게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냥 편안했다. 나도 그런 불완전한 인간이다.

여전히 불안하고, 통제하려 하고, 완벽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괜찮다. 그게 나니까. 아니 인간이기에.


중요한 건 그걸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불완전함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12월의 바다.

겨울. 강릉 안목해변에서 느꼈던 그 차가움.

발을 적셨던 파도.

그때는 몰랐다. 이 여행이 나를 어떻게 바꿀지.

무엇을 배울지. 누구를 잃을지.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를 잃었다.

내 마음은 아팠다. 지금도 아프다.

살아 있을 때 사랑하는 것.

나중은 없을 수도 있다는 것. 후회 없이 사는 것.

그리고 나를 찾는 것. 완벽하지 않은 나. 불안한 나.

통제하려는 나. 외로운 나. 그 모든 나를 받아들였다.


"이게 나다. 작고, 불완전하고,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용감한 사람.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웃고, 우는 사람. 그냥 사람."


일어섰다. 해변을 따라 걸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고독했지만 괜찮았다.

광안대교를 봤다. 차들이 건넜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끊임없이.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회사로. 그 바쁜 삶으로.

그런데 이제는 다를 것이다. 조금.

완벽하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불안할 것이다. 통제하려 하고 계획할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멈출 것이다.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담양의 대숲. 여수의 스님.

통영으로 달리던 밤.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

"잘 다녀왔니?" "좋아."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요."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다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르겠다. 그런데 괜찮다.

지금 여기 있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노트를 꺼내 생각을 남겼다.


나는 겸손한 마음을 배웠다.

잘 되어야 하다는 강박을 내려놨다.

잘 되지 않아도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내려놓는 것을 배웠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

조금씩 놓으면 된다.


나는 고독을 받아들이는 법을 어느 순간 인지했다.

혼자는 외로운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다.

사람들은 혼자인 사는 것에 익숙하다.

홀로 태어나 무엇인가를 배우고, 살다 죽는다.

살면서 누군가와 함께하지만 결국은 혼자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기에 가능한 참기쁨이다.


나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배웠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마지막까지 가르쳐주셔서.

살아 있을 때 사랑하라고. 후회 없이 살라고.


이제 나는 알았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작고 어리석으며, 불완전한 사람이다.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용감한 사람이다.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웃고 우는 평범한 사람이다.


노트에 몇 자 적고 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갑자기? 슬퍼서? 기뻐서? 둘 다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전화하고 싶었다.

"할아버지, 나 많이 배웠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가셨으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할아버지는 알 것이다.

저 하늘에서. 손자가 잘 다녀왔다는 것을.

많이 배웠다는 것을.

이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을.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섰다. 해변으로 다시 나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저 멀리서 붉은 노을저녁이 다가왔다.


광안대교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소중한 순간을 남겼다.

하지만 그 순간을 마음속으로 기록했다.

여수에서 느낀 것.

지금 느낌, 그 순간을 기억으로 남기자고.


그냥 이 순간을 봤다. 눈과 마음으로.

고독과 함께 평화로운 이 풍경을.

그리고 감사했다. 이 여행에. 이 도시들에.

만난 사람들에게. 할아버지에게. 나 자신에게.


"고마워. 여기까지 와줘서. 포기하지 않아서"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며, 숨 쉬고 있었다.

그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