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부산에서 경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1시간 남짓. 짧은 거리지만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바다가 사라지고 울창한 산이 나타났다.
도시가 사라지고 고즈넉한 마을들이 보였다.
경주에 도착하자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천년의 도시.
신라의 수도. 역사책에서만 보던 곳.
불국사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매표소를 지나 천천히 걸었다.
소나무 숲길이었다. 고요했다. 발소리만 들렸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돌아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팔순은 넘어 보였다.
등이 약간 굽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네?"
"혹시 불국사 처음이세요?"
"네. 처음이에요."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저는 여기 해설사예요. 30년 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근데 돈 내야 하나요?"
할아버지가 웃으셨다. "아니에요. 그냥 심심해서요.
요즘 사람들 다들 이어폰 끼고 다니더라고요.
설명 들을 사람이 없어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따라오세요."
할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천천히.
할아버지 걸음에 맞춰서.
"저기 보이는 게 청운교, 백운교예요.
33 계단이에요. 왜 33인지 아세요?"
"아니요."
"불교에서 하늘의 세계가 33개거든요.
이 계단을 오르면 속세를 벗어난다는 뜻이에요."
"아..."
"근데요, "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33번 오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뭘 느끼느냐가 중요해요.
빨리 오르면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할아버지는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잠깐씩 멈췄다.
숨을 고르시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다.
"힘드세요?"
"아니에요. 그냥 천천히 오르는 거예요.
급할 게 없어요. 부처님은 안 도망가요."
청운교를 다 오르자 대웅전이 보였다.
큰 건물이었다. 오래되어 보였다.
"저 건물이 몇 년 됐는지 아세요?"
"몰라요."
"1500년 넘었어요. 신라 법흥왕 때 지었어요.
물론 불탄 적도 있고, 다시 지은 적도 있지만...
기본 구조는 그대로예요."
1500년이란 시간, 상상이 안 됐다.
내 인생은 고작 30년인데.
"15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길 왔을까요?"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 엄청 많았겠죠."
"맞아요. 수백만? 수천만? 다들 기도했어요.
소원 빌고, 절하고, 기도하고.
그 사람들 소원이 다 이뤄졌을까요?"
"아니겠죠."
"맞아요. 안 이뤄졌어요. 대부분. 그럼 그 사람들 불행했을까요?"
"...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웃으셨다.
"저도 몰라요. 근데 한 가지는 알아요.
그 사람들도 당신처럼 여기 서 있었다는 거.
고민하고, 바라고, 살아갔다는 거."
대웅전 앞에 섰다. 사람들이 절을 했다.
나도 따라서 절을 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냥 예의 같았다.
"뭘 빌었어요?"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아무것도요. 그냥 절만 했어요."
"잘했어요. 비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고마워하는 게 중요해요."
"무엇에 고마워하는데요?"
"여기 올 수 있어서. 숨 쉴 수 있어서. 살아 있어서."
할아버지 말이 가슴에 박혔다.
친할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가셨지만 나는 여기 있다.
석가탑으로 갔다. 유명한 탑이라고 했다.
국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설명했다.
"이 탑이 1300년 넘었어요. 신라 때 만든 거예요.
전쟁도 겪고, 지진도 겪고, 비바람도 겪었어요.
그런데 아직 서 있어요."
"튼튼하네요."
"튼튼한 것도 있지만... 중요한 건 계속 돌봤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고, 깨지면 다시 붙이고.
그렇게 1300년을 버틴 거예요."
"혼자서는 못 버텼겠네요."
"맞아요. 혼자는 못 버텨요. 사람이 돌봐야 해요. 탑도, 절도, 사람도."
우리는 경내를 천천히 돌았다.
할아버지는 쉬지 않고 말씀하셨다.
저 나무는 몇 년 됐다, 저 돌은 어디서 왔다, 저 건물은 누가 지었다.
설명하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숨여 있었다.
한 벤치에 앉았다. 할아버지도 앉아 숨을 고르셨다.
"할아버지, 여기서 30년 일하셨다고요?"
"응. 은퇴하고 나서. 심심해서 시작했어요."
"돈도 안 받는데 왜 하세요?"
할아버지가 웃으셨다.
"좋아서요. 사람들한테 이야기해 주는 거.
그리고... 배우는 것도 있어요."
"배워요? 할아버지가?"
"당연하죠. 사람들 보면서 배워요.
어떻게 사는지, 뭘 고민하는지. 당신도 그래요."
"저요?"
"응. 자네도, 뭔가 고민 있죠?"
또 들켰다. 여수 스님 때처럼.
"... 맞아요. 고민 많아요."
"뭐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당연하죠. 젊은 사람이 그런 고민 안 하면 이상한 거야."
"할아버지는 아세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도 몰라요. 팔십 넘게 살았는데도."
"그럼 어떻게 사셨어요?"
할아버지가 잠깐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냥 살았어요. 일하고, 밥 먹고, 자고. 가족 돌보고, 친구 만나고.
실수도 많이 했어요. 후회도 많아요. 그런데도 계속..."
"그게 다예요?"
"다요. 거창한 거 없어요. 그냥 사는 거예요. 매일매일.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려고 노력하면서."
"조금 나아지기요?"
"응. 조금씩. 완벽해지려고 하면 힘들어요. 조금만.
어제보다 조금만 친절하게, 조금만 정직하게, 조금만 열심히. 그렇게 살다 보면 1년 뒤에는 꽤 달라져 있어요."
그 말이 와닿았다. 조금씩. 완벽하지 않게. 그냥 조금씩.
"할아버지, 후회되는 거 있어요?"
"많죠. 아내한테 잘못한 것,
자식들한테 화낸 것. 친구랑 다툰 것. 많아요."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요. 지금이라도 잘하는 거죠.
아내한테는 맨날 고맙다고 해요.
자식들한테는 사랑한다고 말해요.
친구들한테는 자주 연락해요. 과거는 못 바꿔요.
그런데 지금은 바꿀 수 있어요."
과거는 못 바꾼다. 그런데 지금은 바꿀 수 있다.
간단한 말인데 깊었다.
"젊은이는 지금 여행 중이죠?"
"네. 혼자 여행이요."
"뭘 찾으러 다녀요?"
"나 자신이요."
할아버지가 크게 웃으셨다.
"찾았어요?"
"... 조금?"
"잘했어요. 조금 찾았으면 됐어요.
다 찾으면 재미없어요. 계속 찾아야죠. 평생."
우리는 한참 앉아 있었다. 말없이. 경내를 보면서.
사람들이 오고 갔다. 관광객. 가족. 연인들.
다들 각자의 이유로 여기 있었다.
"할아버지, 저 사람들 중에 누가 행복할까요?"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보셨다.
"다 행복하고 다 불행해요."
"무슨 말이에요?"
"행복은 상태가 아니에요. 순간이에요.
저 사람들도 가끔은 행복하고 가끔은 불행해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나도 가끔은 행복했다. 강릉 파도 앞에서,
담양 대숲에서, 할아버지와 마지막 순간. 행복했다.
그리고 가끔은 불행했다.
한강에서 울 때, 길 잃었을 때, 할아버지 잃었을 때.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해요?"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면 돼요. 어렵지 않아요.
작은 것에서 찾으면 돼요. 맛있는 밥, 따뜻한 햇빛,
친구 웃음소리. 거기 다 있어요."
할아버지가 일어서셨다.
"이제 갈게요. 집에 가야 해요. 아내가 기다려요."
"감사했어요. 정말."
"아니, 오늘 자네 같은 청년 만나 기분이 좋네요"
"저요?"
"응. 눈빛 보면 알아요. 착한 사람인 걸.
힘들어하지만 포기 안 하는 사람."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걸어가셨다.
느리게. 천천히. 그런데 당당하게.
나는 혼자 남았다. 불국사의 천년의 시간이 쌓인 자리.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그냥.
1300년 전에 세워진 석가탑 앞에 다시 섰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탑 앞을 지나갔을까?
사랑, 돈, 성공, 인정. 다들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고민거리는 다 지나갔지만 흔적이 없다.
그런데 탑과 절은 고풍스레 지금 이 순간 남겨져 있다.
중요한 건 뭘까? 남는 게 중요한가?
아니면 그 순간 진실하게 사는 게 중요한가?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과거는 못 바꿔요. 그런데 지금은 바꿀 수 있어요."
나는 과거를 후회했다.
할아버지 자주 못 본 것. 연애 망친 것. 친구들한테 못한 것.
후회가 많았지만 바꿀 수 없다.
지나갔으니까. 그럼 어떡하나? 지금부터 하면 된다.
엄마 자주 보기. 사람들 사랑하기. 친구들한테 연락하기 등
거창하지도 않지만 세상을 바꾸는 목표도 아닌걸.
그냥 나를 바꾸는 것. 조금씩. 매일매일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게 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실천을 통해 완벽한 계획이 아닌 조금씩 나아가기.
불국사를 나오며 뒤를 돌아봤다.
천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절과 그 흔적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그 모든 시간이 여기에 남았다.
나도 그 시간의 일부가 되었다.
작지만. 짧지만. 여기 있었다. 고민하고 배웠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가며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지금 집에 가고 계실까?
아내분한테 "오늘 착한 청년 만났어"라고 말씀하실까?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따뜻했다.
사람들이 서로 돌보는 것. 할아버지 말씀처럼. 탑도, 절도,
사람도 혼자는 못 버틴다. 서로 돌봐야 한다.
나도 누군가 돌봐야겠다.
나 자신부터 그리고 엄마, 친구, 동료들.
그리고 누군가한테 도움받아야겠다.
혼자 다 할 수는 없으니까.
경주가 내게 준 것은 시간의 무게였다.
그리고 그 큰 무게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
과거는 못 바꾸지만 지금은 바꿀 수 있다는 것.
조금씩 나아가면 되는걸.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