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보령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하루만 머물렀다.
짐을 챙기고, 빨래하고,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엄마를 만났다.
꼭 하기로 했던 '엄마 한 달에 두 번 보기'
"어디 가는데?"
"제주도."
"혼자?"
"응."
"... 조심해. 바람 많이 분대."
"알았어. 엄마, 사랑해."
엄마가 잠깐 멈칫하셨다. 그리고 웃으셨다.
"갑자기 왜? 어색하게."
"그냥. 말하고 싶어서."
"... 나도. 사랑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1시간.
짧은 비행이었다. 창밖을 봤다. 구름 위였다.
하얗고 넓었다. 제주에 도착하자 세게 바람이 불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12월 제주는 바람의 섬이었다.
렌터카를 빌렸다. 내비게이션을 켰다가 껐다.
남해 독일마을 인근 해안도로에서 느꼈던 감정,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
그냥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어디든. 바다 쪽으로. 한 시간쯤 달렸을까.
협재해변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들어갔다.
해변은 넓었다. 모래가 하얬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겨울이니까.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옷이 펄럭였다.
걷기 힘들 정도였다. 해변으로 걸어갔다.
바람에 밀렸다. 한 발 내딛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바람과 결렬하게 저항하며 싸우는 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변가에는 파도가 높았다. 거칠었다.
보령의 파도와 달랐다. 강릉의 파도와도 달랐다.
제주의 파도는 화가 난 것 같았다.
거칠고 사납고 무서웠다.
그런데 아름다웠다. 그 거칠음과 솔직함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저항하지 않았다.
밀리는 대로 움직였다. 비틀거렸다.
넘어질 뻔했다. 그런데 웃음이 났다.
자연과 함께 나는 살아 있다.
모래밭에 앉았다. 바람이 계속 불었다.
귀가 아팠다. 그런데 괜찮았다.
휴대폰을 꺼냈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할 만한 일".
이상한 검색어였다. 그런데 궁금했다.
세상에 뭐가 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기사들이 나왔다.
"30대가 도전할 만한 일 10가지"
"인생에서 꼭 해봐야 할 것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아이디어"
클릭했다. 읽었다.
"새로운 언어 배우기, 악기 배우기, 요리 배우기, 마라톤 완주하기, 봉사활동 하기, 책 쓰기, 그림 그리기, 여행 가기, 사람들 만나기, 사랑하기"
버킷리스트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뭘 해봤나?
여행은 하고 있다. 지금. 사람들도 만났다.
준혁, 할머니들, 스님, 해설사 할아버지.
나머지는? 해본 적 없다.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왜?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아니었다.
생각을 안 했다. 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으니까.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집 사고.
그게 인생이라고 배웠다. 다른 건 사치라고 배웠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인생이 그것뿐일까?
다른 기사를 찾았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들".
링크를 클릭하고 읽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 누군가를 웃게 하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무언가를 만드는 것.
무언가를 배우는 것. 무언가를 나누는 것."
간단했지만 실행이 잘 안 된다.
나는 누군가를 도와본 적 있나? 진짜로?
돈 내는 것 말고. 시간 내는 것 말고. 진심으로?
없었다. 바빠서. 여유 없어서. 나도 힘들어서.
누군가를 웃게 해 본 적은? 억지웃음 말고. 진짜 웃음.
오래전이라 가물가물 기억이 안 났다.
무언가를 만들어본 적은? 일 말고. 보고서 말고.
진짜 창조. 없었다. 시키는 것만 했으니까.
그럼 나는 뭘 했나? 30년 동안?
그냥 살았다.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 남들 하는 대로.
그런데 그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건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숨 쉬는 것뿐이었다.
진짜 사는 건 뭘까?
보령 대천해수욕장에서 적었던 것.
"해보는 것. 시도하는 것."
맞다. 해봐야 한다. 뭐든. 노트를 꺼냈다. 적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기타 배우기 -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다. 그런데 돈 없다고, 시간 없다고 안 했다.
그림 그리기 - 재능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능이 중요한가? 즐기면 되지.
봉사활동 - 한 번도 안 해봤다. 나도 힘든데 남 도울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나를 채우는 것이다.
글쓰기 - 이 노트처럼. 내 생각을. 내 이야기를. 누가 읽든 안 읽든.
요리 배우기 - 엄마한테. 엄마 요리가 제일 맛있으니까.
마라톤 - 풀코스는 무리. 하프는? 10km는? 5km라도.
사람들 만나기 - 새로운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 나와 다른 사람들.
사랑하기 - 다시. 진심으로. 일보다 우선순위 두고.
웃기 - 많이. 자주. 진짜로.
잘살기 -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사는 것.
적으면서 설렜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설렘. 기대. 가능성.
할 게 많았다. 세상에. 아직.
그리고 이걸 하면서 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존재의 이유를.
나는 왜 사는가? 보령 대청해수욕장에서 던진 질문.
답이 보였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소소한 경험을 통해 나를 찾기 위해 산다.
배우기 위해. 느끼기 위해. 나누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성공을 위해서 사는 게도 아니다.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모래가 날렸다.
눈에 들어갔다. 따가웠다.
일어섰다. 해변을 따라 걸었다.
바람을 맞으며. 거칠었지만 상쾌했다.
한 카페가 보였다. 들어갔다. 따뜻했다.
커피를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봤다. 거친 파도. 세찬 바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이 걸었다. 사진을 찍었다. 웃었다.
살아가는 거였다. 저 사람들도. 나도.
옆 테이블에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커피를 건넸다.
할머니가 웃으셨다. 할아버지도 웃으셨다.
저분들은 몇 년을 함께 사셨을까? 40년? 50년?
그 세월 동안 뭘 했을까? 아마도 별거 아닌 것들.
밥 먹고, 산책하고, 이야기하고. 그런 것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었겠지. 서로에게.
의미는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순간에 있다.
함께 커피 마시는 것. 손 잡고 걷는 것. 웃는 것.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작은 의미들을 쌓는 소소한 하루하루.
휴대폰을 꺼냈다.
친구들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야들아, 나 여행 끝나면 같이 기타 배우러 가자. 나 혼자는 창피해서 못 가겠어."
답장이 왔다.
민수: "갑자기? ㅋㅋ 근데 나도 궁금했어."
현우: "나도 낄게. 정말 재밌을 것 같은데?"
지영: "오 좋다! 나는 우쿨렐레 할래."
웃음이 났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라면.
또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한테.
"엄마, 나 요리 배우고 싶어. 엄마한테. 시간 날 때 알려줘."
답장이 왔다.
"그래. 좋아. 뭐 배우고 싶은데?"
"엄마가 제일 잘하는 거."
"김치찌개?"
"응. 그거."
"ㅋㅋ 쉬운데. 가르쳐줄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런 게 의미구나.
엄마와 부엌에서 김치찌개 만드는 것. 그게 의미구나.
커피를 다 마시고 나왔다. 바람은 여전했다.
그런데 이제는 반가웠다. 지난번 경험했던 그 느낌으로.
아마도 살아 있어서 그런가.
차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세상에 할 일이 정말 많구나.
아직 안 해본 게 너무 많구나.
기타, 그림, 봉사, 글쓰기, 요리, 마라톤, 사랑, 웃음.
그리고 더 많을 것이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
그걸 하나씩 해보는 거다. 천천히. 급하지 않게. 즐기면서.
그러면 의미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억지로 찾지 않아도. 보령 대천해수욕장에서 나는 물었다.
"나는 왜 사는가?"
제주장에서 답을 찾았다.
"경험하기 위해. 배우기 위해. 나누기 위해. 살아보기 위해."
그리고 깨달았다. 아직은 살아볼 만하다고.
내 인생과 큰 세상을.
30년 잘못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부터라도 잘 살면 된다.
40년, 50년. 앞으로 살 날이 더 많다.
그 시간 동안 뭘 할까? 리스트에 적은 것들.
그리고 더 많은 것들. 생각하니 설렜다.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해볼 만했다. 제주의 바람이 내게 준 것.
거칠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계획대로 안 돼도 괜찮다는 것. 바람에 맡겨도 된다는 것.
그리고 깨달음. 세상에 할 일이 많다는 것.
아직 살아볼 만하다는 것.
존재의 이유는 거창한 데 있지 않다는 것.
작은 것들. 기타 치고, 그림 그리고, 요리하고,
웃고, 사랑하고. 그런 것들이 의미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다. 다음 장소로 향했다.
어디든. 바람이 이끄는 대로.
살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진짜로. 숨 쉬는 것만이 아니라.
경험하고, 느끼고, 배우는 것. 그게 사는 거다.
그리고 나는 이제 진짜 삶을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