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보령 대천해수욕장 — 비워내는 하루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by 하늘바라기

안동에서 보령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4시간 넘게 걸렸다.

창밖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30년. 내가 살아온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운동장.

친구들과 축구하던 날들. 그때는 시간이 천천히 갔다.


하루가 길었다. 일주일이 한 달 같았다.

꿈이 있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진짜로.

매일 공을 찼다. 엄마가 "공부해"라고 해도 운동장으로 갔다.

그런데 중학교 때 알았다. 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다른 애들이 너무 잘했다. 나는 아무리 해도 그들만큼 못 했다.


꿈을 접었다. 열세 살에.

고등학교 때는 공부했다. 대학 가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 대학 못 가면 인생 망한다고.

그래서 했다. 공부. 하기 싫었지만. 재미없었지만. 해야 했으니까.

대학에 갔다.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 경영학과.

왜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취직 잘 된다고 해서?

아니면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아서?


대학 4년은 빨리 지나갔다.

술 마시고, 놀고, 연애하고, 동아리 하고. 재밌었나?

글쎄. 기억이 별로 없다. 그냥 흘러갔다.


졸업하고 취직했다. 중소기업. 대기업은 떨어졌다.

아쉬웠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스펙이 부족했으니까.

회사 생활 7년. 승진도 했다. 대리가 됐다.

연봉도 올랐다. 그런데 행복했나?

아니었다. 맨날 피곤했다. 월요일이 싫었다.

금요일만 기다렸다.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연애도 했다. 세 번. 다 끝났다. 내 잘못이 컸다.

너무 바빴다. 일에. 만날 시간이 없었다.

아니, 시간은 있었는데 안 만났다. 피곤해서.

그러다 헤어졌다. 세 번 다. 같은 이유로.

"너는 나보다 일이 중요한 것 같아."

맞았다. 일이 더 중요했다. 아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승진해야 하고, 돈 벌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그게 인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잘못 살았다. 뭐가 중요한지 몰랐다.

보령에 도착했다. 대천해수욕장으로 향했다.

12월인데 바다에 왜 가냐고?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해변은 텅 비어 있었다. 겨울이니까.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 말고 몇 명 안 됐다.

모래밭에 앉았다. 차가웠다. 바람이 불었다.

추웠다. 그런데 괜찮았다.

파도를 봤다. 왔다 갔다. 쉬지 않고.

2주 전 강릉에서 본 파도처럼.


그때 나는 생각이 멈췄다. 파도 앞에서.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지금은? 지금은 생각이 넘쳤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게 뒤섞였다.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첩을 열었다. 오래된 사진들을 봤다.

초등학교 졸업 사진. 웃고 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꾸민 게 아니라.

대학 MT 사진. 친구들과. 다들 젊었다. 행복해 보였다.


첫 출근 날 사진. 정장 입고. 긴장한 얼굴.

설레던 기억이 났다. '드디어 사회인이다.'

그리고 최근 사진들. 회식 사진. 억지웃음.

피곤한 얼굴. 눈에 생기가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웃음이 진짜가 아니게 됐을까?

사진첩을 닫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뭐가 되고 싶었을까? 어릴 때. 정말로.

축구선수?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행복한 사람? 웃는 사람?

좋아하는 일 하는 사람? 지금 나는? 행복한가?

아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있나? 아니다.


그럼 뭐 하고 있나?

그냥 살고 있다. 버티고 있다. 견디고 있다.

이게 어른이 되는 건가?

꿈을 접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냥 사는 거?

노트를 꺼냈다. 적었다.

'나는 잘 살아왔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망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잘 살았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냥 살았다. 흘러가듯.

초등학생 때 나에게 묻는다면.

'30살 된 너, 행복해?' 뭐라고 답할까?

'아니. 행복하지 않아. 피곤해. 외로워. 길을 잃었어.'


그럼 초등학생 나는 뭐라고 할까?

아마도 실망할 것이다.

'그렇게 살려고 했던 게 아닌데.'

꿈을 이루며 살고 있나?

아니다. 꿈이 뭔지도 모르겠다. 13살에 꿈을 접었다.

그 이후로 새로운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꿈을 갖는 걸 포기했다.

현실적이 되기로 했다. 돈 벌고, 안정적인 직장 다니고,

그렇게 사는 것. 그게 어른이라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나?

미래의 나는 어떨까?

40살, 50살, 60살. 지금처럼 살면 어떻게 될까?

승진하고, 결혼하고, 집 사고, 애 낳고. 그렇게 살까?

그게 정상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행복할까?

솔직히 모르겠다. 확신이 없다."


노트에 메모하면서 눈물이 났다.

왜 우는지 모르겠다. 슬퍼서? 후회돼서? 불안해서?

다 맞는 것 같았다.

30년을 돌아보니 후회가 많았다.

더 놀 걸. 더 사랑할걸. 더 웃을 걸. 더 도전할걸.


그런데 못 했다. 무서워서. 실패할까 봐.

뒤처질까 봐. 손해 볼까 봐.

그래서 안전한 길만 갔다. 모두가 가는 길.

정답이라고 하는 길. 그런데 그 길에서 나를 잃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신발을 적셨다.


차가웠다. 그런데 정신이 들었다.

일어섰다. 신발을 벗었다. 양말도 벗었다.

맨발로 물에 들어갔다. 얼음장 같았다.

발이 시렸다. 그런데 계속 걸었다. 무릎까지 물이 찼다.


"야! 야! 야!"


소리를 질렀다. 바다를 향해. 아무도 없는 바다에.

"나 잘못 살았어! 30년 동안!"

파도가 대답했다. 철썩.

"근데 이제 어떡해! 다시 할 수 없잖아!"

파도는 계속 왔다. 갔다. 왔다.


"나 진짜 모르겠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목이 쉬었다. 그런데 속은 시원했다.

쌓였던 게 나왔다. 30년 동안 참았던 게.

물에서 나왔다. 모래에 주저앉았다. 발이 시렸다.

양말을 신었다. 신발을 신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중년 남자였다. 산책하던 것 같았다.

"네... 괜찮아요."

"방금 소리 질렀잖아요."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저도 가끔 그래요. 바다 보면."

남자가 옆에 앉았다.

"힘든 일 있으세요?"

"... 인생이요."

남자가 웃었다. "다들 그렇죠. 인생이 힘들죠."

"당신도요?"

"당연하죠. 마흔다섯인데 아직도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요. 그냥 살죠. 오늘 하루씩. 내일 걱정하면서."

"답답하지 않아요?"

"답답하죠. 근데 답이 없어요. 인생은. 그냥 살면서 찾아가는 거예요. 계속."


남자가 일어섰다.

"힘내세요. 아직 젊잖아요. 저보다 시간 많아요."

"시간이 많으면 뭐 해요. 뭘 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럼 일단 뭐든 해봐요. 해보고 아니면 바꾸면 되고. 안 하면 평생 모르잖아요."


남자가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봤다.

해봐야 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해보지 않았다.

무서워서. 그래서 모르는 거였다.

노트를 다시 펼쳤다. 적었다.


"미래의 나에게:

지금 나는 30살이다. 많이 헤맸다. 많이 후회한다.

잘못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부터라도 다르게 살려고 한다.

완벽하게는 못 하겠지만.

40살, 50살 된 너에게 묻는다. 바뀌었니? 조금이라도?

꿈을 찾았니? 아니면 아직도 찾는 중이니?

행복하니? 아니면 아직도 헤매니?

답은 모르겠다. 10년, 20년 후에나 알겠지.

그런데 부탁이 있다.

포기하지 마. 찾는 거. 너를. 꿈을. 행복을.

실패해도 괜찮아. 해봤으니까. 안 하는 것보다 낫잖아.

그리고 기억해. 30살 때 이렇게 아파했다는 거.

이렇게 후회했다는 거. 그걸 반복하지 마.

부탁이야. 미래의 나에게"


적고 나니 조금 가벼워졌다. 답은 없었다.

여전히. 그런데 방향은 생긴 것 같았다.

해보는 것. 시도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해가 기울었다. 저녁이 다가왔다.

나는 일어섰다. 해변을 걸었다. 천천히.


30년 동안 달렸다. 어디론가.

그런데 도착하지 못했다. 이제는 걷기로 했다.

천천히. 방향을 보면서. 주변을 느끼면서.

도착하지 못해도 괜찮다. 가는 게 중요하니까.

살아가는 게 중요하니까.


보령의 바다가 내게 준 것. 비워내기.

쌓였던 것들을. 후회, 불안, 자책.

그리고 채우기. 새로운 것으로. 시도, 용기, 희망.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불안하다. 여전히 모른다.


그런데 괜찮다.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인생은 답이 없으니까.

그냥 살아가는 거다. 하루하루.

해보면서. 틀려도 되고. 다시 하면 되고.

그게 사는 거라고, 45살 중년의 남자가 알려줬다.

그리고 그게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