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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메트리오 Dec 20. 2020

두 개의 카탈루냐와 두 개의 대한민국  

소통의 부재가 낳은 양극화와 비극

<두 개의 카탈루냐>. 영화 제목에 카탈루냐를 보고 마음이 들떴다. 스페인의 현대 도시 대표주자인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와 쌍벽을 이루는 FC 바르셀로나 축구팀, 세계적 천재 건축가로 불리는 가우디. 모두 카탈루냐 지방이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바르셀로나에 관한 게 아니었다. 축구팀과 연관된 내용도 없었고 가우디의 업적을 늘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대신 정치라는 장르가 쓰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신문과 뉴스로는 정치를 접했지만, 영화와는 별로 접점이 없었다. 의외의 장르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스페인 구경도 할 겸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카탈루냐 독립 지지자들의 투표와 시위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스페인 경찰 (출처 = 넷플릭스)


카탈루냐에는 오백만 명의 유권자가 선출한 7개의 당이 있다. 그중 세 당은 독립을 찬성하는 당이며 카탈루냐 대통령인 카를로스 푸지데몬 또한 여기 속해있다. 나머지 네 당은 독립에 반대하며 이네스 아리다마스 의원이 독립 반대 운동의 대표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독립 찬성파와 독립 반대파의 의석수는 불과 6석의 차이이며 득표율로는 둘 다 46%로 접전을 펼치고 있다. 왜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할까?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번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사실 처음이 아니다. 1998년에도 있었고 2000년대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1998년에는 15%에 불과했던 독립 찬성 지지율이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50% 가까이 육박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주된 배경으로는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유럽 위기로 번지게 되면서 스페인의 경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하였다. 다른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카탈루냐 지방도 세계 경제 위기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경제활동에 소외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중앙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은 독립운동 찬성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카탈루냐 지방은 다른 왕조로 시작해 스페인어와는 다른 카탈루냐어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카탈루냐와 스페인 사이의 갈등은 이미 곳곳에 널려 있었다.  


복잡한 여정을 거쳐 독립 선거 투표를 한 결과 찬성표가 다수로 되면서 카탈루냐가 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사법부가 불법이라고 판단해 결과가 무효가 됨과 동시에 푸지데몬 대통령은 벨기에로 망명을 하고 독립을 주도한 주요 정치인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다. 나머지 유럽 국가들도 카탈루냐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마무리가 되는 듯하다. 그런데 영화 끝에 푸지데몬 대통령이 한 말을 들으면 카탈루냐 독립운동이 일장춘몽이 아님을 시사한다. 왜 그럴까? 소통의 부재와 여론의 양극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경호원 차량 위에 올라선 독립 찬성파 (좌), 독립 찬성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을 응원하는 독립 반대파 (우) (출처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서로 간에 소통하는 장면이 단 한 컷도 없다. 그나마 정치인들이 토론하는 모습이 잠깐 화면에 잡힌다. 그러나 총선에 앞서 하는 TV 토론임을 직시하는 순간 소통이 아님을 알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규합을 해 다수의 의석을 잡아야 한다고 다짐을 할 뿐이다. 다른 당과는 합의는커녕 상종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 하면서 엔딩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독립에 지지하는 사람들은 반대파가 진정한 카탈루냐인이 아니며 배신자라고 비난한다. 경호원 차 위에 올라타서 깔아뭉개려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스페인 만세! 경호원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경찰을 응원하며 찬성파를 잡아 오라는 비인간적인 발언을 내뱉는다. 한 기자의 말대로 갑자기 모든 이성은 사라지고 마음속에 불꽃이 일어나면서 광적인 수준으로 자신들의 견해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졸지에 적과 동침한다는 딱지가 붙여진다.


심지어 이슈를 잘 아는 많은 기자와 평론가조차 찬성 또는 반대의 입장만 고수하면서 제3의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마치 자신만이 진실을 안다는 듯한 확신을 한다. 상대에 대한 편견이 쌍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인지하면서도 스스로 양극화의 덫에 걸린다. 영화는 찬성파와 반대파를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양극화가 고질적인 문제이며 교육 수준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고 드러낸다. 소통의 부재가 낳은 양극화가 조만간 줄어들지는 않을 듯하다. 카탈루냐는 얼마든지 또 터질 화약고나 다름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거운 마음이었다. 특히 이 문제로 가정이 둘로 갈라진 일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정치 때문에 가정이 갈라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다 보고 나서는 극단적인 상황에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는 카탈루냐와 관련해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카탈루냐 독립 문제는 해결책이 없을까?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렵다. 중간 지대에 있는 다양한 의견 중에 최소한 도움이 될 만한 사안이 있을 것이다. 스페인에 대해서 생각을 나름 정리했는데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둘로 쪼개진 사례로 치면 우리나라가 대표적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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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9년 10월 광화문 조국 사퇴 집회와 서초동 조국 수호 집회  (출처 =  뉴스터치)


조선 시대에는 배타적인 붕당정치로 훈구파 대 사림파로 시작해 서인 대 동인, 노론 대 소론, 북인 대 남인으로 두 개의 조선으로 갈라놓았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졌다.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다툼으로 한쪽에는 반공 교육을, 다른 쪽에는 반시장 교육을 국가에서 철저히 이행하면서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는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불과 1년여 전에는 조국 사태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같은 날 광화문에는 조국 사퇴 집회가, 서초동에는 조국 수호 집회가 열렸다. 두 개의 대한민국이 현실로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을 둘러싼 신경전이 톰과 제리를 방불케 하는 가운데 양측 지지자들은 자기 말이 맞는다며 서로를 악마화하고 있다. 정확성에 근거한 기사로 여론의 극단화를 누그러뜨려야 할 언론은 오히려 클릭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제목과 속보에 집착해 양극화에 부채질하고 있다.


불행히도 양극화는 일상생활에도 스며들었으며 이는 용어로 확연히 나타난다. 세대 갈등 용어로는 '틀딱'(노인층을 비하하는 표현)을 비롯해 '개저씨'(아저씨를 비하하는 표현), '맘충'(엄마를 비하하는 표현), '급식충'(급식 먹는 10대를 비하하는 표현) 등 입에 담기 힘든 말이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나돌고 있다. 이제 꼰대는 애교로 봐줄 정도다. 남녀 갈등 대표 용어로는 '김치녀' (한국 여자를 비난하는 표현), '한남충' (한국 남자를 비난하는 표현)이 있다. 예전부터 사회적 갈등은 존재했기 때문에 긴 시간에 걸친 갈등을 마법처럼 한순간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갈등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다. 기성 언론이 정치에서 여론 극단화를 부추기고 있다면 사회 영역에서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가 한몫하고 있다. 예전에는 그나마 예의를 갖추고 대했다면 지금은 상대 쪽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젠더 분쟁은 2018년 이수역 폭행 사건과 2019년 82년생 김지영 영화 상영을 거치면서 올해 제1회 안티 페미니스트 집회로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덮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 살만해지는 시대가 온다면 그간 묵혀진 이슈들은 언제든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카탈루냐와 우리나라는 다를 바가 없다.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년에 서른을 바라보는 남성인 내가 여성과 노인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변절자가 되는 걸까? 어린놈이라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충고를 하는 웃어른을 내치고 싶지 않다. 한국 남자로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지만, 그와 함께 여성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인정한다. 모든 인간은 나이와 성별과 관계없이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내재한다. 그런데 내가 존중받기 위해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방식만이 유일하다면 얼마나 참담할까? 제2, 제3, 제4의 대안은 정말로 없는 걸까?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는 자기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수두룩하다. 유전, 가정환경, 소득, 직업, 종교관, 개인 경험 등 각각의 기준을 갖다 대면 나와 다른 사람이 순식간에 형성된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을 모아둔 집합체인 사회를 두 개로 뭉뚱그린 '내 편 아니면 적'의 사고방식은 현실을 착각하는 근시안적인 생각일 뿐만 아니라 어느 두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사고관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럼 가치관이 같은 사람만 만나면 되지 않냐고? 집에서 알고리즘을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SNS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문밖에 나가는 순간 그렇지 않다.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싸우려 들 것인가? 엄청 피곤할 뿐만 아니라 사람답지 못한 행동이다. 결국엔 대화와 소통 말곤 없다. 상대방의 머리 안에 들어가는 체험을 해 보는 거다. 물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우리로는 힘든 일이다. 그래도 한 번 해보자. 언제 마지막으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진정한 대화를 나눴는가?


소통이 없는 세상의 결말은 비극이며 누구의 승리도 되지 않는다. 승리를 가지더라도 그 과정에 상대를 억눌렀다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승리만이 중요한 세상에 산다는 생각이 지속하는 한 우리는 눈앞의 전리품을 쟁취하기 위해 밀어붙일 것이다. 극단적인 의견 대립이 난무하는 요즘. 소통과 협상, 그리고 팩트에 기반한 토론으로 접점을 찾으면서 폭넓은 시야와 이해심을 기를 것인가? 아니면 적개심과 증오로 세상을 대하면서 '우리 vs 그들'이라는 프레임과 흑백 논리에 갇힐 것인가? 카탈루냐처럼 쪼개질지 아닐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적어도 두 개의 대한민국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http://www.newstouch.site/news/articleView.html?idxno=1622 ("두 개의 대한민국"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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