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비와 약 값 모두 다 합쳐 60CUC(쿡)입니다”
검은색 뿔테안경을 쓴 직원은 간결하면서 차가운 어투로 말을 했다.
그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진짜 다행이다”
이곳은 쿠바 아바나의 병원 응급실.
어제부터 오른쪽 귀에 물이 들어간 듯 잘 들리지 않고, 답답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게 화근이 됐다.
밤새 귀가 아파 잠을 청하지 못하였고, 그렇게 뜬 눈으로 일어나 보니 베갯잇에 피가 묻어 있었다. 사태에 심각함을 느끼고선 까사의 매니저 ‘애니따’ 에게 물어 외국인에게 가장 괜찮은 병원을 추천받았다. 택시를 타고 가면 3CUC 정도에 갈 수 있다는 정보와 함께.
쿠바에는 두 가지의 화폐단위가 있다. 내국인 들이 사용하는 CUP(쿱)이 있고, 외국인들만 사용하는 CUC(쿡) 두 종류의 화폐가 있다. 외국인은 CUC밖에 사용할 수 없으며(여행 중 암암리에 CUP으로 환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1CUC은 대략 25CUP이다. 결국 내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화폐 단위가 25배 차이라는 것이다. CUP은 또 다른 말로 ‘모네다’ 라는 이름으로 통하기도 하며, 1CUC은 대략 1달러랑 같은 액수다.
날도 덥고, 관광객들도 택시를 많이 이용하는 오전 11시.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이라는 ‘잉글라테라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기로 했다.
3CUC 이면 간다는 ‘애니따’의 말이 무색하게 택시 기사들은 다 같이 짠 듯 12~15CUC 을 제시했다. 택시를 타지 않아도 자신들은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아무리 타지에서 아파도 그렇지.. 그 돈을 내면서 도저히 병원에 갈 수 없다’
굳은 의지와 함께 결연한 마음까지 들었다.
결국 큰 길로 걸어가다 다른 일행들과 함께 올드카를 같이 타서 가기로 했다. 5CUC에 합의를 보았고 그제서야 내 오른쪽 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아파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방문한 쿠바 아바나의 응급실.
코 끝에 스며드는 진한 알코올 냄새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흩어져 버리는 tv에서 나오는 수많은 스페인어의 소리.
에어컨을 낮은 온도로 켜 두었는지 등골까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으며, 이미 팔에는 닭살이 돋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선 이 공간에 동양인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모두들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안쓰러움도 가득 묻어 있었다. 세상 가장 다정한 눈빛이었다. 마치 어릴 적 유치원에 보내기 전 어머니가 나를 보았던 것처럼.
스페인어는 숫자밖에 못 세는 나를 위해 영어 통역이 가능한 간호사가 다가와 상태를 체크하였다. 사실 나는 영어도 스타벅스에서 커피 주문할 정도밖에 안 되는데 큰일이다.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고, 세계 만국 공용어인 보디랭귀지로 나의 상태를 설명하였다.
세월이 보이는 인자한 주름에 무테안경이 잘 어울리는 의사는 나에게 최근에 물놀이를 한 적이 있냐고 물었고, 불과 5일 전 멕시코 ‘칸쿤’에서 물 놀이를 했다고 말하는 순간,
제주와는 비교도 안되는 카르브해의 성난 파도와 바다가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그날 귀에 바닷물이 많이 들어간 거 같아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의사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세계 여행을 떠나기 전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빛이 바랜 ‘스페인어 회화 사전’을 빌려보았다.
그리고 몇 가지의 문장을 핸드폰에 적어두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핸드폰을 보며 어설픈 스페인어 억양으로 ‘도와주세요’ (Necesito ayuda)라는 말만 반복해서 의사와 간호사에게 하는 것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무심한 미소와 함께 의사는 꽤나 복잡해 보이는 기계 옆에 나를 눕혔고,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간단한 설명을 한 뒤 치료를 시작하였다.
의사는 손잡이가 달린 얇은 호수를 가져왔다. 그리고 나의 오른쪽 귀가 차고도 넘칠 정도로 많은 양의 액체 (아마도 소독을 위해서였던 거 같다)를 몇 번에 걸쳐 넣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양의 액체를 귀에 넣어 본 적이 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저 멀리 태평양 한가운데 둥둥 떠있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짧은 호수를 집어넣고는 귀에 들어 있는 모든 이물질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쩔줄 모르는 나의 두 손을 친절한 간호사는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얼마나 빼내던지 이러다가는 달팽이관이 같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오른쪽 귀가 갑자기 정상적으로 들린다는 안도감에 고통은 쉽게 잊혔다. 아니 이토록 간단하게 끝나다니.
영어로 괜찮냐며 간호사는 말을 걸어왔고, 간단한 소독과 함께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러고는 친절하게 직접 수납을 하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고맙다는 말만 하였다. 정말로 고마운 표정으로. 아마 이때 거울로 내 얼굴을 보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윗 입술을 잔뜩 올린 채로 경직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의아해했을 것이다.
수납을 위해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순간, 내 생각은 오로지 과연 얼마가 나올 것인가? 뿐이었다.
짧게 쉬러 여행을 온 것이면 괜찮지만 나는 가난한 배낭여행자이기에, 그리고 이제 여행을 시작한 지 불과 22일 째이기에 나에게 돈은 민감한 문제였다.
여행을 준비할 때 쿠바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블로그를 보았었다. 그리고 쿠바는 의료체계가 잘 되어 있어 모든 치료가 공짜라고 적혀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작 그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없던 것이었다. ‘이런, 블로그도 다 믿을게 못 된다니까.’ 가벼운 한숨만 내쉬면 내 차례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권에 적힌 내 이름이 호명되고, 직원은 약과 함께 진료비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스페인어로 빼곡히 적힌 내역서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제발.. 제발.. 을 되뇌이며’ 숫자를 찾아 이러 저리 헤매는데,
“진료비와 약 값 모두 다 합쳐 60CUC입니다”
간결하면서도 차가운 어투로 직원은 말을 했다.
그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진짜 다행이다”
돈을 지불하고 나중에 보험회사에 제출할 영수증을 잘 챙기고선 병원 문을 나섰다.
살면서 다시 언제 와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아픈 와중에 사진도 남겼다.
집으로 가는 길 택시 기사들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하며 흥정을 하였다.
그 모습이 귀찮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에 측은하기도 하였다.
치료도 받았겠다, 발걸음도 가볍겠다, 나는 좀 걷기로 했다.
숙소 근처에서 벗어나 처음 와보는 낯선 거리
올드카가 많이 다녔고, 주변에 대학교가 있는지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한낮의 아바나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으며,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보며 “치나, 치나”라고 말을 걸어왔다. (차이나를 스페인어로 발음하면 치나)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노노, 꼬레아 꼬레아” 라도 답을 하니 “오! 꼬레아” 하며 너무 좋아한다. 순박하다. 저들의 표정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바나에 와 현지 사람들을 만나며 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급여와 비행깃값도 벌 수가 없어 외국으로 여행 한 번 못 갔다는 사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도 버는 월급은 20CUC 정도이며, 한 잔에 1CUC 하는 아이스 초코 라떼도 현지인들은 비싸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 7~8CUC 하는 로브스타는 아예 꿈도 못 꾼다는 것.
돌이켜보면 나는 이들에 비해 부유하고, 많이 누리고, 많이 즐기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복해지는 법은 몰랐던
거 같다.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던 바에서 새벽까지 같이 땀 흘리며 살사를 추 던 밤. 그들의 계산적이지 않은 거짓 없는 표정을 보며 나는 한 뼘 더 작아져만 갔다.
꿈같은 아바나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며칠 뒤 페루 리마에서 나는 블로글에 글을 적었다.
‘제가 직접 쿠바 응급실을 가봤는데, 쿠바는 의료기술이 발달하여 치료를 잘 하는 거 같습니다. 중이염이 며칠 만에 바로 나았으니 말이죠. 여러분 그러나 공짜는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