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전력질주
1983년 2월 8일, 설탕과 섬유의 회사였던 삼성이 반도체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72세, 이병철 회장의 결정이었다. 그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였다. 그가 결정하면, 누구도 반대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겠다는 선언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당시 한국은 신흥 공업국의 끝자리에서 아둥바둥대던 상황이었다. 첨단 기술을 구현할 기술과 사람, 기반 시설까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토론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반대는 쉽게 진압되었고, 이때부터 삼성은 반도체를 향한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이병철의 결정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랜 관찰과 분석의 결과였다. 1970년대 이병철은 여러 차례 세계 여행을 경험했다. 출장의 성격이었지만,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각국의 산업 시설을 방문하면서,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세계 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신사업을 갈구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IBM과 인텔을 방문했다. 일본에 갔을 때는 도시바와 NEC 등이 대상이었다. 그들은 삼성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일부 범용 부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업으로 판단해, 왠만한 것들은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10여년의 탐방 결과, 이병철이 보기에 세상은 빠르게 전환되고 있었다. 기술 혁신에 투자하지 않으면 그가 꿈꾸는 글로벌 선두기업, 삼성은 막연한 꿈에 불과했다.
1982년, 이병철은 아들 이건희와 함께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계획된 일을 마무리한 후, 이들은 NEC, 도시바, 히타치의 반도체 공장을 또 한번 견학했다. 이병철은 한번 경험했지만, 이건희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의 예상보다 삼성과 일본 기업들의 격차가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런 열패감과 성장에 대한 자극을 위해 이병철이 이건희를 출장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한편, 이병철은 일본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침, 한국 정부도 반도체 산업을 연구하고 있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면 좋은데,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 일을 감당할 기업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손을 들고 진출을 선언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는 한 팀이 되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반도체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삼성 내부는 큰 도전이었지만, 외부의 기업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냉정하게 보면, 미국이나 일본의 기업들은 삼성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인재를 모으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강대원 박사의 영향으로 미국의 반도체 산업에는 한국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강대원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김광호는 이미 몇 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국책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강대원과 김광호의 인맥을 통해 많은 한국 엔지니어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 중에 상당수를 스카우트할 수 있었다. 물론, 파격적인 급여와 주택 제공 등 확실한 보상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이끌어줄 리더가 없었다. 기술에 해박하고, 산업 생태계를 잘 이해하며, 무엇보다 리더십을 갖춘 인재가 필요했다. 마침, 이제 막 박사학위를 마치고 실리콘밸리에서 경력을 쌓아가는 인재가 포착되었다. 1983년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IBM에 근무하던 진대제였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 내에서 경력을 쌓은 이윤우, 그리고 한양대의 박재근 등이 합류해 리더십을 구축해갔다.
1975년, 한국 정부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를 설립하면서, 우수한 해외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강대원과 비슷한 시기에 유학을 가서, 훌륭한 경력을 쌓은 김광호(1929~2019)가 이미 한국의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기반 연구 시설의 부족으로 반도체 칩 설계보다는 인재 양성에 힘쓰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신사업 개발은 모두에게 희소식이었다. 삼성은 이미 마이크론으로부터 64K DRAM의 기술 이전 계약을 완료한 상태였지만, 계약만 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한참 늦은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고체물리학, 반도체 공학, 재료 화학 등을 배운 청년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제법 있었지만, 이런 배움을 실제 생산에 적용시킨 경험은 거의 없었다.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고, 실패를 반복하며 노하우를 축적시키고, 효율을 개선하는 험난한 과정은 누가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진대제와 그의 팀은 쉬지 않고 일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일하면서 공정을 개선했고, 공정을 개선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갔다. 배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했고, 감정이 좋지 않은 일본에게 특히 더 많이 배우려했다. 이를 통해 더 좋은 칩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처음 사업을 기획한 이병철은 노환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이건희는 더욱 반도체 칩 사업에 매달렸고, 매주 진행상황을 확인했다. 당장은 64K DRAM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진대제와 이건희의 목표는 더 큰 곳에 있었다. 256K, 1M. 이들은 단 번에 몇 계단을 뛰어오르려 했다. 한 계단씩 올라가서는 언제나 그들의 뒤에 있을 뿐이라는 게 삼성전자의 믿음이었다.
1988년, 삼성은 64K와 256K 개발에 이어 1M DRAM을 출시했다. 이것은 상징적이었다. 사업 진출 후 5년, 국책 연구소를 만든 지 1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실제 반도체 칩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삼성의 질주는 일본의 주요 기업들을 바짝 쫓는 결과였다. 한 인터뷰에서 진대제는 겸손하지만 자신있게 응답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수 천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전한 것이 성공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우수한 연구진과 생산부서의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실제로, 삼성의 제조 능력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다.
1992년, 삼성전자는 64M DRAM을 출시했다. 이날은 한국의, 그리고 삼성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한국이 반도체 칩 산업 생태계에서 세계 최초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잘 나가던 소니, NEC, 도시바, 히타치를 제치고, 삼성이 세계 최초로 가장 집적도가 높은 메모리 칩을 개발했다. 미국와 일본의 기업들에게는 악몽이 시작이었다. 몇 계단 뒤에서 허겁지겁 쫓아오는 줄 알았던 삼성이 자신들을 앞질렀다. 잘 나가다 헛발을 짚은 일본과 일본만 견제하면 독식할 것으로 예상했던 미국의 기업들은 삼성의 질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삼성은 조금의 역전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칩 투자는 막대했다.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매출의 약 10~20%를 투자하는 동안, 그들은 30~40%를 투자했다. 한국의 재벌 구조와 이병철, 이건희 부자의 과감한 선택이 이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마침, 이 산업은 무어의 법칙이 통용되고 있었다. 승자가 되려면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 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남은 것은 과감한 투자와 민첩한 실행이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의 사람들과 심지어 한국인 자신들도 한국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빨리빨리’ 문화와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는 헌신, 높은 교육열로 인해 풍부해진 인재들, 그리고 지속적인 정부의 지원은 반도체 칩이라는 화로에 지속적으로 땔감을 넣어 주었다. 외부에서 보기에 한국이라는 사회 전체가 반도체 칩 산업에 올인하는 것 같았다. 미국 사회의 중심에서 이방인으로서 흘린 강대원의 눈물과 그가 뿌린 산업의 씨를 누구보다 한국인 스스로가 닦아주고 거둬가고 있었다.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된 이후, 삼성전자는 조금의 나태함도 허용하지 않았다. 실리콘 밸리에서 무어의 법칙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줄어든 반면,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의 기업들은 무어의 법칙을 신봉했다. 끊임없는 기술 개발과 공정 혁신을 추구했기에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문제에 직면했으나, 스스로 해결하거나 정부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곤 했다. 상당수의 문제는 외면하면서 지나가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많은 비판이 있었으나, 삼성이 벌어오는 엄청난 외화가 이런 문제들을 희석시켰다.
1985년 삼성전자는 반도체 칩 사업 부문에서 1,000억 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1986년에는 1,500억 원, 이듬해인 1987년에는 손실액만 2,000억 원이 넘었다. 그리고, 1987년 이 사업을 밀어붙이던 이병철이 사망했다. 사람들은 삼성이 곧 사업을 접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이건희는 더 강하게 몰아 붙였다. 그리고, 그가 삼성을 책임지던 시기 내내 반도체 사업부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건희와 진대제 등은 전 세계 산업의 거인이 되어 갔고, 한국은 모방의 천재에서 혁신의 한 축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돌아보면, 한국의 반도체 칩 산업은 필요에 의한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1960~1970년대 한국은 주로 일본의 하청을 받아 전자제품을 조립해 수출하는 국가였지만, 핵심 부품은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반도체 칩은 비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전략물자였고, 기술 이전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상황을 타개하려면 뭐든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했다. '기술 자립'이라는 말이 이 때부터 힘을 얻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칩 분야에 집중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기술 혁신 역량은 부족했지만, 다행히 이 분야는 표준화된 시장이어서 대규모 투자와 공정 개선으로 선두 기업들을 추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결과는 이런 선택이 매우 적절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90년대 삼성전자는 본격적인 경쟁력을 갖춰갔지만, 시장은 끊임없이 출렁거렸다. 이른바 '반도체 사이클'로 가격은 주기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고, 그 와중에 한국은 위환위기(1997년)을 겪으면서 여러 부침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난관에도 삼성전자는 일관된 전략을 유지했다. '설계보다 제조, 아이디어보다 실행, 한 번에 크게.' 대규모 설비 투자와 빠른 의사결정, 그리고 현장 중심 문화가 결합된 한국형 반도체 모델이 완성되어갔다. 이후, 메모리 칩 분야에서 삼성전자는 경쟁자와의 격차를 꾸준히 유지하는 압도적인 1위가 되었다. 위협적인 경쟁자는 미국과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성전자와 함께 산업을 발전시킨 한국의 SK 하이닉스일 정도도 한국은 이 분야를 장악했다. 이들은 세계 시장을 양분하며 AI 중심의 새로운 산업 질서에 신속하게 적응해, 새로운 기회를 일구고 있는 중이다.
2014년 이건희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의식을 차리지 못했고, 2020년 사망했다. 우연치 않게도 그 사이 중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엄청난 지원 속에 이들은 급격하게 외형을 키우기 시작했고, 과거 삼성전자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려 했다. 중국 기업들의 참여로 반도체 칩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진대제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은 이미 은퇴한 다음이었고, 새로운 리더십은 그들의 선배들 만큼 유능하지 못한 듯 보였다. 외부에서는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삼성전자의 좁은 비전을 질책하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에 추월당하고, 일본이 한국에 역전당했던 것처럼, 삼성전자도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AI 분야가 활성화되면서, 한국의 산업 지배력이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황에도 더 크게 투자하고, 메모리에 집중하며, 최고의 인재들을 배치하는 전략이 비효율적이라는 조짐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다. 자원도 기술도 없던 나라에서, 성공에 대한 투지와 인재에 대한 투자로 50년 만에 세계 반도체 칩 산업을 2강 체제(미국의 시스템 + 한국의 메모리)로 만든 것은 기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미래 상황을 쉽게 예측할 수 없지만, 오랜기간 선두에 있던 삼성전자와 한국의 기업들이 거세게 다가올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