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TSMC와 모리스 창

파운드리의 혁명, 산업의 구조를 바꾸다

by JBO

1985년, Texas Instruments(TI)의 주요 임원으로 반도체 분야에서 이미 유명했던 모리스 창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대만 과학기술의 선구자이자 경제부 장관을 지낸 리궈딩(李國鼎·1910~2001)이었다. 그의 요청은 간단했다. "우리가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이 기관의 수장을 맡아주십시오." 그는 연구의 자율성과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창은 갈등을 느꼈지만, 결국 대만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결정이 반도체 산업의 구조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모리스 창(Zhang Zhongmou)은 1931년 7월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 태어났다. 은헹에 다니던 아버지 덕에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창이 태어난 해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면서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창의 어린 시절은 끊임없는 이동이었다. 일본을 피해, 그리고 공산화된 중국 정부를 피해 이동해야 했다. 닝보에서 광저우, 다시 홍콩, 충칭, 상하이로 이동했다. 안정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학교를 여러 번 옮겼고, 중간중간 가정교사에게 배워야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매우 확고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지식은 빼앗을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고, 어린 창에게 다양한 과목을 배우게 했다. 특히, 영어를 중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창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 큰 흥미를 느꼈고, 그의 재능은 개인교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1949년 가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창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목적지는 미국 보스턴이었다. 중국 대륙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침, 그의 아버지가 미국 유학을 알아 봤고, 하버드가 창의 학업 성적에 주목했다. 그 해 창은 하버드에 입학했다. 전액 장학금을 주는 조건이었다. 영어를 배우긴 했지만,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서러운 일들이 많았지만, 그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창은 하버드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실용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다. 창은 목표가 생기면, 도전을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버드에서 2학년을 마친 후, 그는 MIT로 옮겨 기계공학 학사와 석사를 받았다. 이례적인 결정이었지만, 그의 이런 성향은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었다. 졸업 후 그는 직장을 찾아야했다. 창의 첫 직장은 실바니아(Sylvania)였다. 진공관을 만드는 전자회사로 반도체에도 투자하고 있었다. 창의 선택은 당연했다. 쇼클리 팀이 몇 년 전에 트랜지스터를 발표한 후 산업의 분위기는 모두 이 분야에 집중되는 상황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예민한 사람들은 변화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창은 그가 원하던 반도체 부서에 배치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온 보람을 느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실바니아는 매우 보수적인 곳이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창은 새로운 공정과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관행과 절차에 막혀 현실화되지 못했다. 창은 이런 상황을 감내하는 것보다, 새로운 도전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3년이 지난 1958년, 창은 한참 떠오르는 TI로 직장을 옮겼다. 시기적으로 절묘했다. 이 해, TI에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잭 킬비가 직접회로(IC)를 발명해 새로운 생산 공정을 개발한 것이었다. 창은 곧장 IC 팀에 합류했고, 킬비와 함께 일했다. 감동적이었고, 변화의 중심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때부터, 창은 반도체 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TI의 킬비 팀에서 창은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킬비를 비롯한 TI의 리더십팀도 창의 능력을 존중했다. 그는 기술적 능력뿐만 아니라, 팀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합리적이지만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팀원들을 다독이며 성과를 도출했다. 1964년, 33세의 나이에 그는 회사의 중간 관리자가 되었고, 일을 병행하면서 스탠포드에서 박사 학위도 받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밤과 주말에 공부하면서 학위 과정과 업무 모두에서 큰 성과를 도출했다.


1*OdW58ya10NbnduxhgNUn-g.png TI 근무할 당시 고객 감사 인증서를 받는 모리스 창 (가운데)


1972년 41세에 창은 TI의 부사장이 되었다. 능력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미국 기업의 문화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발탁이었다. 그는 반도체 부서를 이끌었다. 수천 명의 직원과 수억 달러의 매출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최첨단 산업을 이끌어 간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1970년대 TI는 인텔과 경쟁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런 곳의 부사장이 되었으니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 같았다. 창은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듯, DRAM 사업을 확장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도 주도했다. 창은 업계에서 인정받는 과학자였고, 회사 내에서는 존경받는 임원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1970년대 후반, 일본 기업들이 치고 올라왔다. NEC, 도시바, 히타치 등의 기업들은 소니와 경쟁하면서 동시에 미국 DRAM 기업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창은 이것이 분명한 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TI 경영진은 명백한 신호를 무시했다. 원인은 문화적인 인식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창은 좌절했다. 그동안 승승장구 했고, 반도체 산업은 인종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능력을 중시하는 분위기라고 믿었는데, 결정적인 상황에 부딪히니 그렇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보이지 않던 유리벽이 갑자기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창은 아시아계 직원 중 가장 고위 임원이 되었지만, CEO의 자리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새로운 사업을 제안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누구도 명시적으로 얘기하지 않지만, 창은 자신 앞에 유리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창의 도전 기질이 다시 발휘되었다. 1983년, 52세의 창은 TI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창의 사정을 알고 있는 몇몇 기업들이 스카웃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만의 도전을 하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다시 증명하고자 했다. 자신의 사업을 모색했고, 투자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1985년, 그동안 준비하던 새로운 사업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대만의 경제부 장관이 그를 대만 반도체 산업의 수장으로 임용하려고 직접 전화를 걸었다. 창의 고민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이 대만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대만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잠시 머물던 피난지였다. 몇 주 동안 이어진 고민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결정했다. 사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한 나라의 산업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한다는 점이 그의 결정을 이끌었다. TI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잠잠해졌던 그의 도전 본능이 되살아났다. 1985년 54세의 창은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ITRI)의 원장이 되었다.


1980년대의 대만은 신흥 공업국이긴 했지만, 반도체 산업의 기반 시설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똑똑한 청년들은 많았다. 이 청년들은 수학과 과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적은 임금과 힘겨운 연구소 생활을 기꺼이 감당할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거만함은 찾아 볼 수 없었고,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는 의욕은 넘쳐났다. 창이 길을 알려준다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것만 같았다. 이런 열정이 창을 더욱 감동시켰다. '방법을 찾아보자. 우리도 첨단 산업을 할 수 있다는 거을 보여주자.'


대만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은 다른 전략이 필요했고, 산업의 틈새를 찾아 기회로 연결해야 했다. 창과 그의 연구팀은 이 틈새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86년 어느날, 틈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면서, 공급망이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부 회사들은 반도체 칩을 설계만 하고, 제조는 전문 회사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클린룸이 모여있는 칩 생산 시설, 업계 용어로는 '팹(Fab) 라인'을 갖추지 않은 '팹리스(Fabless) 기업'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1984년에 설립한 Xilinx, Cirrus Logic 등이 그런 회사였다. Intel이나 AMD 등도 외부 제조 업체를 찾기 시작했다. 반도체 칩 산업은 일정한 수요 곡선에 따라 움직이는데, 생산 시설은 수요에 맞춰 탄력적으로 가동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수요가 적을 땐, 자체 시설에서 생산하고, 많아지면 생산의 일부는 외부에 의뢰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선뜻 외부 제작자에게 생산을 맡기기 어려웠다. 그 과정에서 기술이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틈새는 여기에 있었다.


창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오직 다른 회사들을 위해서만 칩을 만드는 회사. 자체 칩 설계를 하지 않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는 회사.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 회사. 이런 기업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다듬으면서 창은 점점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설계 능력이 부족하고, 글로벌 산업에서 취약한 위치를 가진 대만에게 이 모델이 딱 들어 맞는 것 같았다. 제조에만 집중할 수 있기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ITRI의 연구원들이 감당할 것으로 생각했다. 창의 확신이 커질수록 사람들의 의구심도 커져갔다. 대만의 관리들이야 창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였으니 쉽게 설득할 수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고객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창은 밀어 붙였다. 절대로 고객의 칩 설계를 유출하지 않고, 생산 일정을 맞추겠다는 약속을 강조했다. 후에 이 반도체 칩 위탁생산 방식은 ‘파운드리(Foundry) 모델’이라고 정리되었다. 대만의 한정적인 자원을 활용해 산업에 진입하려는 창의 궁여지책이었으나, 이 방식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87년 2얼 21일, 대만 반도체 제조 기업(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TSMC)이 설립되었다. 세계 최초의 반도체 칩 파운드리 기업의 시작이었다. 자본금 2억 2천만 달러를 조달했다. 대만 정부가 48%, 민간 투자자들이 24%, 그리고 네덜란드의 Philips가 28%를 출자했다. 반도체 칩 생산 장비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Philips가 보기에 TSMC의 비즈니스 모델은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이 곳이 잘 되면 자신들의 회사, ASML의 장비를 우선적으로 채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과 미국의 칩 제조기업에게 장비를 팔겠다는 속셈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의 선택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56세의 창은 회장 겸 CEO가 되었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 구축에 업계의 의구심은 여전했지만, 창은 흔들리지 않았다.


TSMC를 설립하고, 창이 한동안 주력한 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칩 생산 공장(Fab)을 짓는 것이었다. 대만은 지진과 태풍이 잦은 곳이어서, 이런 점들까지 고려해 위치를 선정했다. 대만 섬 중간, 야트막한 산간 지역에 위치한 신주(Hsinchu) 과학 산업 단지가 적당했다. 기반 시설은 정부가 담당했다. 창은 공장 건설에 집중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자 했다. 클린룸 설계, 장비 선정, 공정 개발, 직원 교육 등 모든 세부 사항에 직접 관여했다. 미국에서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의 간섭은 사람들을 긴장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의 비전은 사람들의 열정을 일깨웠다.


공장 건설이 마무리될 무렵, 창은 더 큰 난관을 맞았다. 고객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창은 영업팀을 대동하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그가 가진 명성과 인맥을 활용해 사라들을 만났고 설득했다. 사람들은 창의 말을 신뢰했지만, 대만을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을 설득했다. 대만이 지금은 창을 도와주지만, 조금만 지나면 외면할테니, 미국으로 돌아와 파운드리를 설립하자는 유혹도 있었다. 창은 모욕감을 느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산업의 생리는 이미 오래 전에 다 경험했던 일이었다.


파운드리 모델은 스타트업들에게 적합했다. 오디오 칩을 설계하는 회사, Cirrus Logic이 드디어 첫 고객이 되었다. 그들은 창을 믿었고, 파운드리 모델에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TSMC는 첫 주문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좋은 품질과 빠른 생산, 적은 비용 등 모든 면이 만족스러웠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성공하자 주문이 몰려왔다. 새로운 프로세서(FPGA)을 설계한 Xilinx, 통신용 칩이 필요한 Broadcom 등이 다음 고객이 되었다. 여전히 가동율이 낮았고, 적자를 보는 상태였지만, TSMC는 계속 전진했다. 1990년 TSMC의 결산 보고서에서 드디어 흑자가 기록되었다. 비록 흑자 규모는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TSMC의 파운드리 모델과 창의 도전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큰 숫자였다.


1991년, 인텔은 486 프로세서 수요 급증으로 제조 능력을 단기간에 늘려야 했다. 파운드리 방식을 고려해야 했지만, AMD나 TI 같은 경쟁자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선택은 하나였다. 그들은 TSMC에 연락했다. 업계의 리더인 인텔의 주문을 받는 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창은 조금 더 나아가고 싶었다. 인텔과 경쟁하지 않는 진정한 파트너가 될 것을 약속하면서 동시에 기술 이전과 엔지니어 교육을 계약서에 추가했다. TSMC의 헌신적인 직원들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될 사항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인텔은 TSMC의 훌륭한 파트너가 되었고, TSMC는 인텔의 후광을 입으면서 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1990년대는 PC의 시대였다. 이전 시대에 칼라TV를 갖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제 PC를 탐내기 시작했다. 반도체 칩 산업이 미친듯이 날아올랐다. TSMC도 마찬가지였다. 경쟁자도 등장했다. 대만의 다른 회사 UMC(United Microelectronics Corporation)도 파운드리 모델을 선언하고 업계에 뛰어들었다. 이 후 두 기업의 경쟁 속에 대만은 글로벌 파운드리 산업의 수도가 될 수 있었다.


파운드리 모델은 칩 생태계를 새롭게 재편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칩 생산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이 없어서 포기해야만 했던 과거의 일들은 이제 말끔히 해소되었다. 칩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들이 늘어났고, 이들 중 상당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동통신 칩으로 유명한 Qualcomm, 그래픽 칩으로 시작해 AI 시대를 열고 있는 Nvidia 등이 모두 이렇게 시작했다. 그들은 설계에만 집중하고 생산은 TSMC에 의뢰했다. 서로 잘 하는 분야에만 집중하다 보니, 능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산업 전체의 혁신을 가속시켰다.


2000년의 닷컴 버블 속에서도 TSMC는 인력을 감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투자하고, 직원들에게 교육 기회를 부여했다.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TSMC는 쉬지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 2005년 74세의 창은 은퇴를 발표했다. 회장직은 유지하지만, 운영은 그가 아끼던 후임에게 넘겼다. 그러나, 2년 후 TSMC에 문제가 발생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 진입하면서 TSMC에 전운이 감돌았다. 이미 반도체 업계의 공룡이 된 삼성전자와 경쟁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중심을 잡아줘야할 리더들이 더 흔들렸다. TSMC의 이사회는 은퇴를 즐기고 있던 창을 찾아갔다. 돌아와서 흔들리는 TSMC를 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창은 고민했으나, TSMC는 그의 자식이었다. 외면할 수가 없었다. 돌아온 창은 비효율을 개선하는 구조조정을 짧게 끝내고, 기본으로 돌아갔다.


그가 생각하기에 TSMC의 기본은 집요할 정도로 기술 개발에 집중해 경쟁자를 앞서 가는 것이었다. 마침, 모바일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고객이 요구하는 반도체 칩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새롭게 개발해야 할 공정도 늘어났다. 이때부터 TSMC와 삼성전자의 치열한 기술 개발 전쟁이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10nm 선폭의 공정을 개발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편에서 7nm 공정 완료를 발표하는 양상이었다. 무어의 법칙도 필요없었다. TSMC와 삼성전자의 기술 전쟁은 산업의 룰을 파괴하며,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런 경쟁은 양 사에 모두 이익이었다. 2010년을 지나면서, 반도체 칩 제조 기술 분야에서 TSMC와 삼성전자를 능가하는 기업은 없었다. 그 유명한 인텔이나 TI도 더 이상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반도체 칩 생산의 중심이 미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과 대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2018년, 임시로 맡겠다던 CEO의 자리를 10년 넘게 담당하던 창이 드디어 완전한 은퇴를 발표했다. 이미 87세였다. 그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거장이었지만, 대만 내에서는 경제 성장의 상징이었고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그의 집요한 기술 개발 전략과 품질 향상에 혀를 내두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를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TSMC는 대만 수출의 10% 이상, GDP의 5% 이상을 담당하고, TSMC가 있는 신주 지역은 거대한 반도체 클러스터로 변모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강의를 통해 자신의 비전과 산업의 전망을 설파하고 있다.


오늘날 대만 신주의 TSMC 본사를 방문하면, 모리스 창의 이름을 딴 FAB 라인을 볼 수 있다. 매년 입사하는 TSMC의 청년 엔지니어들은 이 건물 앞에서 창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 오롯이 놓여있는 칩의 역사를. 무수한 실패와 난관을 딛고 커다란 성취를 만들어낸 창과 창의 비전을 실현한 그의 팀원들을 기리면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5. 소니 - 이와마 카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