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니 - 이와마 카즈오

카이젠에 대한 집요함이 반도체 칩 생산 표준을 확립

by JBO

盛田昭夫, 1921년 1월 26일 ~ 1999년 10월 3일

1946년 어느날, 폐허가 된 도쿄의 한 구석에서 일자리를 찾던 젊은 과학자는 신문의 구인 광고에서 한 기업의 구인 소식을 들었다. “도쿄 통신 공업. 젊은 엔지니어 모집. 새로운 일본을 만들 사람.” 전쟁 후 모든 것이 무너진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킨 선구자들의 만남은 이 작은 신문 광고로 시작되었다. 이와마 카즈오, 당시 27세. 도쿄 통신 공업(나중에 소니로 이름이 바뀜) 입사.


이와마 카즈오(岩間和夫; 1919–1982)는 1919년 9월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기 기술자였다. 군국주의가 판치던 뒤숭숭한 시절이었으나, 기술자를 우대하는 분위기는 남아 있었다. 어린 이와마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자랐다. 전선, 진공관, 회로기판, 이런 것들이 그의 장난감이었고, 친구였다. 그 시절 최고의 혁신 제품은 라디오였다. 이와마도 이 신문명에 매료되었다. 직접 라디오를 조립해보며, 원리를 탐구했고, 작동하지 않으면 밤새 고민했다. 그의 10대는 이렇게 라디오의 조립과 해체에 맞춰져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를 개선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를 키운, 그리고 일본 경제를 부흥시킨, 이 평생의 습관은 작은 잡업실에서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1938년, 이와마는 와세다 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10대의 경험을 통해 공학과 관련된 지식이 조금 쌓였지만,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물리학 이론, 특히 고체물리학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미래 산업의 방향은 몰랐지만, 이 지식을 가지면 뭐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1942년, 학사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와마도 국방 연구소에 차출되어 레이더 개발에 참여해야만 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미국과 일본의 기술 격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무기 개발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미국의 기술을 참고해가며 새로운 안테나를 설계하고, 고주파 회로를 만들었다.


1945년 전쟁은 끝났다. 이와마가 참여했던 연구소도 완벽히 파괴되었다. 도쿄는 말 그대로 폐허가 되었고, 이와마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도쿄 통신 공업은 이 과정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일자리였다. 면접을 보러 간 회사는 히바야 공원 근처의 작은 건물에 있었다. 회사라기보다는 물류 작업장 같았다. 면접관은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1908 ~ 1997)였다. 37세의 공동 창업자로 업계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페허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은 다를 바 없었다. 면접관과 입사 희망자는 금새 의기투합되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일본의 발전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도쿄 통신 공업, 나중에 SONY로 이름을 바꾸는 이 기업은 1945년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1921 ~ 1999), 두 명의 엔지니어가 창업한 회사였다. 이들의 비전은 간단했다. 전자산업을 일구어 일본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 해가 바뀌어 1946년에 입사한 이와마의 첫 프로젝트는 테이프 레코더의 개발이었다. 이부카의 아이디어였다. 당시의 일본에는 이런 전자기기가 없었는데, 전쟁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이와마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다. 플라스틱 필름에 산화철 분말을 코팅해야 했는데, 플라스틱 필름도, 산화철 분말도, 무엇보다 균일하게 코팅하는 기술과 장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와마는 이런 프로젝트에 최적인 사람이었다. 목표를 설정하고, 모든 공정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데이터를 축적해나갔다. 지루하고, 힘 빠지는 일들이었고, 주위의 시선은 매우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이와마에게는 너무 즐거운 날들이었다.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알게 된 정보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바탕이 되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이와마는 수백 번 실험했고, 그만큼 실패하면서 제품을 설계하고 생산 공정을 고안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결과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1950년 소니는 일본 최초의 테이프 레코더를 출시했다. 이와마가 성공한 것이었다. 판매는 저조했다. 일반 소비자가 사기에는 너무 비싼 제품이었다. 하지만, 소니와 이와마는 활력이 넘쳤다.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새로운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1952년, 소니의 공동 창업자인 이부카가 미국 출장에서 돌아왔다. 그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이와마를 호출했다. 평소에는 침착한 편인 이부카였지만, 이날은 매우 흥분해 있었다. 미국 출장 중에 방문한 벨 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본 것이었다. 작고, 전력 소비가 적고, 발열이 없는 증폭 소자. 이부카는 이것이 전자산업의 미래라는 것을 확신했다. 자리로 돌아온 이와마는 즉각 논문을 수집해 읽었다. 쇼클리, 바딘, 브래튼의 발명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것은 어린 시절 이와마가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꿈꾸었던 미래의 연구였다. 이와마도 이부카처럼 완전히 매료되었지만, 동시에 극도의 좌절감을 느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고, 모든 것이 도전이었다. 다시 이와마의 시간이 돌아왔다.


Screenshot 2025-12-22 at 1.41.19 PM.png 1959년 이와마는 트랜지스터의 발명자, 브래튼을 만나, 자신의 연구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사진 출처: 소니 홈페이지)


당시 소니의 연간 매출은 약 100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소니는 매출의 2.5% 수준인 2만5천 달러를 매년 지급하는 조건으로 트랜지스터 기술의 라이센스(사용 허가)를 획득했다. 내부의 무수한 반대가 있었지만, 소니의 창업자와 이와마는 밀어 붙였다. 이것이 미래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선스 계약에는 기술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마는 10명의 청년 엔지니어를 선발해 팀을 만들었다. 팀 조직 후 2년간 또다시 무수한 실험과 실패가 반복되었다. 처음에 우려를 표명하던 사람들은 대놓고 반대하기 시작했다. 매년 회사의 모든 경영 이익을 지출함에도, 이와마의 팀은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와마의 실험 노트에는 실패한 결과와 이유를 분석한 내용이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전진하던 중, 1954년 봄에 작은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트랜지스터으로 사용된 게르마늄의 순도를 최상급으로 올린 것이었다. 99.9999%. 무려 9가 6개나 있는 높은 순도의 게르마늄이 생산되었다. 안정적이고 높은 효율의 트랜지스터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또다른 난관이 기다렸다. 본격 생산에 들어가자 불량률이 너무 높았다. 모든 조건을 통제하면서 개선한 결과가 불과 20%의 수율에 불과했다. 경제성 측면에서 완전 실패였다.


고심의 나날이 반복되었다. 원인과 개선점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문득 하나의 패턴을 발견했다. 비 오는 날 만든 트랜지스터의 수율이 다른 날보다 유독 높다는 것이었다. 왜? 이와마는 깨달았다. 먼지가 문제구나. 비오는 날은 공기 중 먼지 입자가 비에 씻겨 내려, 상대적으로 먼지가 적다. 미세한 먼지 입자 하나가 P-N 접합 부위에 앉으면 단락이나 누설이 발생해 트랜지스터를 망치고, 전체 수율을 낮추는 것이었다. 이와마는 개선 방안을 고안했다.


1954년 겨울, 소니는 일본 최초로 반도체 생산을 위한 클린룸을 제작했다. 미국 문헌을 연구하던 중 제약회사와 정밀 광학 회사들이 클린룸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시스템을 트랜지스터 생산 공정에 도입하면 수율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마가 직접 모든 것을 설계했다. 헤파(HEPA) 필터를 사용해 공기 중 0.3마이크로미터 이상의 입자를 99.97%까지 제거하고 외부보다 더 높은 기압을 유지해 문을 열어도 먼지가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또한, 공기의 흐름을 정밀하게 계산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연구자들과 작업자들은 모두 특수한 방진복, 일명 ‘버니 슈트’를 입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와마의 클린룸은 온갖 극성이 집합된 골치덩어리였다. 우수꽝스러운 작업복은 더 문제였다. 일본 최고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인형극의 주인공처럼 만들었다는 비아냥이 난무했다. 그러나, 데이터는 이들의 원성을 잠재웠다. 클린룸 도입 이후 20%에 불과하던 트랜지스터 수율이 50% 이상으로 개선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클린룸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 방식은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1955년 8월, 소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SONY TR-55가 발표된 날이었다. 그러나, 1년 전인 1954년 10월 미국의 리젠시(Regeancy)가 TR-1이라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이미 발표한 뒤여서, 세계 최초가 아니라는 의견에 부딪혔다. 소니는 머쓱한 상태가 되었지만, 이와마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최초는 아니지만, 소니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트랜지스터를 사용해 라디오를 제작했기 때문에, 더 안정적이고 품질 개선에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TR-55의 잡음 없는 깨끗한 소리, 작은 크기, 긴 배터리 수명 등은 소비자들의 구매를 이끌었다. 일본 내 판매도 성공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미국으로 수출을 시작한 게 고무적이었다.


TR-55는 시작이었다. 이제 소니에서, 더 나아가 일본에서 이와마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지속적인 카이젠(개선)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모든 엔지니어와 생산 관리자가 참석한 회의에서 그 주의 불량률을 검토하고, 원인과 개선 조치를 논의했다. 이와마는 끈질지게 사람들을 다그쳤다.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 번 더, 왜?” 이와마의 다그침과 함께 트랜지스터의 수율은 계속 증가했다. 1955년 50%, 1957년 70%, 1960년 85%. 생산 비용이 줄어, 제품의 이익률은 향상되었다. 무엇보다, 소니 팀 전체의 실력이 향상되었다. 그들은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을 반겼고, 이를 개선하면 큰 칭찬을 받았다.


1959년, 킬비와 노이스가 직접회로(IC)를 발명했다는 소식이 일본에 도달했다. 다른 천재들처럼, 이와마도 이것이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믿었다. 하나의 칩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 세계 최고의 클린룸을 보유하고 있는 그의 팀이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즉각 IC 개발 팀을 조직하고, 연구에 돌입했다. 페어차일드의 평면 공정을 분석했고, 필요하면 팀을 미국에 보내 하나라도 배우게 했다. 또 다시 기나긴 실패의 시간이 반복되었다. 트랜지스터뿐만 아니라, 저항, 커패시터도 같은 칩에 만들어야 했고, 모든 것을 연결해야 했다. 산화막 공정, MOSFET 제작, 사진인화(Lithography) 공정 등 미국이 발견한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미국보다 더 잘 만들고 싶었다. 5년이 넘어가자 사람들이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물이 가득찬 동굴 속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 와지만, 출구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소니의 부진을 눈치챈 다른 회사들이 따라 붙기 시작했다. 도시바, NEC, 히타치 등이 그들이었다.


1968년, 소니는 일본 최초의 상업용 IC를 세상에 선보였다. CX-1. 8개의 트랜지스터와 몇 개의 저항을 포함한 간단한 증폭 회로 칩이었다. 소니의 테이프 레코더와 라디오에 들어가는 부품이었지만, 이 시작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이와마 팀의 눈물겨운 노력에 힘입어, 소니는 무섭게 치고 나갔다. 중공업 분야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던 일본의 주력 산업이 드디어 전자산업 분야로 넘어왔고, 소니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전자제품 회사들은 싸고 품질 좋은 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와마는 계속 소니의 반도체 사업부를 이끌었다. 그는 여전히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의 완벽주의 성향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지만, 반도체 칩 생산 공정을 빠르게 개선시켰다. 당시 미국 기업들의 불량률은 5,000ppm(백만개 당 5000천개) 수준이었다. 잘 나가는 인텔도 1,000ppm 남짓이었다. 이와마는 대담한 목표를 잡았다. 소니는 100ppm 수준을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비아냥이 다시 시작되었다. 물론, 이때의 이와마는 업계의 거장이었으므로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근댈 뿐이었다. 미국 회사들은 불량률 측정을 위해 통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샘플을 추출해 검사하는 것이었다. 이와마는 전수검사를 고집했다. 이를 위해 자동화된 검사 장비를 도입했고, 이는 새로운 산업을 도약하게 만들었다. 이와마의 고집 덕에 반도체 칩 검사 장비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모했고, 일본 기업들이 약진했다.


소니의 클린룸에서 불량품을 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철저하게 분석해 개선점을 찾으면 이와마의 칭찬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이와마는 클린룸의 수준을 계속 높여나갔다. 먼지 하나 없고 바닥은 거울처럼 깨끗했다. 한번은 외부 방문객이 별다른 의식 없이 클린룸 바닥에 침을 뱉는 일이 있었다. 그는 가볍게 사과했지만, 곧바로 경악했다. 소식을 들은 이와마가 도착해 즉시 모든 생산을 중단시켜 버린 것이었다. 클린룸 전체 바닥 청소를 지시했고, 검사 후 다시 청소, 또 검사 후 다시 청소. 몇 번의 반복 작업을 거친 후 생산이 재개되었다. 생각 없이 침을 뱉은 사람의 얼굴 빛이 흑빛으로 변해갔다. 이 소식은 일본을 비롯한 산업 전체로 퍼져나갔다. 모든 기업들이 자신들의 클린룸을 점검했고, 어떻게 해야 생산 공정을 개선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1975년부터 이와마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명백히 과로가 원인이었다. 패전이후 30년간 그는 밤낮 없이 일했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왔고, 휴가도 거의 없었다.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도 효과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일에 미친 사람같았다. 그에게 휴식은 실험실 한편의 소파에서 잠깐 낮잠을 자는 것이었다.


1982년 이와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차세대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 하나의 반도체 칩에 백만 개 이상의 트랜지스터를 구현시키는게 목표였다. 무어의 법칙은 일본도 예외가 아이어서 직접도를 높여야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소니와 이와마는 앞서가길 원했다. 이와마는 팀을 구성하고, 연구 환경을 조성했지만, 설계 방향을 제안한 것 외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못했다. 그의 건강이 그만큼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1982년 12월, 이와마 카즈오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입원한 상태에서도 일을 하고 엔지니어들과 소통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장례식장에서 소니의 공동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가 추모사를 읽었다. “그는 우리에게 완벽을 추구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개선하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니를 넘어 일본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추모사대로, 이와마는 일본의 산업 발전과 장인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집요했지만, 권위적이지 않은 그의 성격은 수 많은 후학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그 덕에 1986년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6개가 일본 회사였다.


그러나, 일본의 황금기는 한국과 대만의 도전, 미국 기업의 혁신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기업의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이와마를 떠올리곤 했다. 그가 있었다면, 변화를 감지하고 적절하게 대처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품질 향상에만 집착해 새로운 기술 혁신을 놓쳤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품질 향상과 공정 개선에 대한 그의 집요함은 반도체 칩 산업의 성격과 완벽한 궁합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인해 글로벌 전자 산업과 일본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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