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의 반란
1969년 5월 1일, 캘리포니아의 산타클라라. 한 남자가 그의 작은 아파트 거실에 일골 명의 동료를 모았다. 그는 테이블에 창업 계획서를 펼쳐 놓았다. 제리 샌더스(Jerry Sanders, 1936~ ). 33세의 페어차일드의 마케팅 디렉터.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완벽한 정장 차림과 손질된 머리, 자신감 넘치는 미소. 그는 동료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의 비전은 허무맹랑했지만, 가슴을 뛰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샌더스는 동료들에게 인텔을 꺾어 보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설득은 성공했다. 7명의 동료를 모아 자본금 10만 달러의 기업이 탄생했다. 인텔의 뒤에서 끊임없이 자극하고 경쟁하는 기업의 탄생이었다. Advanced Micro Devices, 줄여서 AMD의 출발이었다.
샌더스는 1936년 시카고 남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교통신호 수리공인 아버지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지만, 돈을 버는 능력은 부족했다. 지독한 가난은 샌더스를 일찍 철들게 했다. 그는 학교에서 항상 좋은 성적을 거두는 아이였고, 리더십이 있었다.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에 맞는 표정과 몸짓을 갖추어갔다. 고등학교 때는 토론팀의 주장이기도 했고, 학생회장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일찌감치 자각했다. ‘나는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기 보다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게 나에게 맞는다.’ 그는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사교 클럽에 가입해 사람들을 사귀었고, 중고 명품 정장을 구매해 깔끔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졸업 후 그는 항공회사의 전기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의 전공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3년 후 그는 사표를 냈다. 실제 기업에서 일을 해보니, 그의 성향이 확실해 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로 설계보다 사람들이 이야기가 좋았고, 기술적인 문제보다 비즈니스 토론이 더 흥미로웠다. 1961년, 샌더스는 모토로라 반도체 부서에 입사했다. 그러나, 직책이 달라졌다. 세일즈 엔지니어. 기업들을 대상으로 기술 영업을 하는 자리였다. 이것이 그의 천직이었다. 샌더스의 재능은 금방 꽃을 피웠다. 그는 고객들을 매료시켰고, 저녁 식사에 초대해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객들을 설득할 무기를 준비했고,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확신에 찬 모습을 유지했다. 그리고 칩을 팔았다. 엄청나게 많이. 불과 1년 만에 그는 모토로라의 최고 세일즈맨이 되었다.
샌더스에 대한 소문은 금새 퍼졌다. 실리콘 밸리에서도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맹렬하게 성장하던 페어차일드가 그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기술은 노이스와 무어에게 맏기고, 판매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1963년, 페어차일드는 샌더스를 스카우트했다. 급여는 두 배였다. 그러나, 샌더스는 급여보다, 실리콘 밸리의 천재들과 일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페어차일드는 빠르게 성장했다. 샌더스도 마찬가지였다. 세일즈맨에서 매니저로, 그리고 마케팅 임원이 되었다. 그는 페어차일드의 얼굴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고객들을 만나고, 컨퍼런스에서 발표하고,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맞춤 정장과 금시계, 스포츠카 등이 그를 빛내주는 도구였다. 사람들은 그를 ‘실리콘 밸리의 락스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샌더스로 인해, 실험실에서의 자유로운 토론과 더불어, 활기차고 세련된 네트워킹과 전문성에 기반한 기술 영업이 실리콘 밸리의 또 다른 문화가 되어갔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페어차일드는 문제가 심해지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동부 사람들이 버거워했다. 엘리트 의식이 가득한 동부의 샌님들이 보기에 페어차일드의 의사 결정 방식은 시시껄렁한 애들의 장난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돈을 잘 버는 장난이었지만. 그들은 조금씩 그들에게 세련된 비즈니스 문화를 가르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오랜 기간 그들이 구축한 관료주의 문화를 강제로 이입하는 것이었다. 두 문화의 충돌은 금방 드러났다. 핵심 인재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페어차일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노이스와 무어가 떠나면서, 인텔을 창업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곳, 실리콘 밸리는 관료주의를 거부한다는 선언같았다. 그러나, 인텔은 엔지니어들의 회사였다. 샌더스도 마음이 있었지만, 인텔과 함께 하기 어려웠다. 물론, 페어차일드에서 샌더스의 불만도 가중되고 있었다.
1969년, 페어차일드에 새로운 경영진이 합류했다. 세련된 정장과 구두, 깔끔한 헤어스타일, 동부 억양. 멀리서 봐도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실리콘 밸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경영 기법을 도입하면 기업은 더 잘나갈 것으로 믿었다. 노이스와 무어를 잃은 것은 아쉽지만, 기술은 어디서도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그들은 샌더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화려하고, 독립적이다.', '고객들과 지나치게 허물없이 지낸다.' 그런 이유였다. 어느 날, 샌더스는 사무실로 불려갔다. 그리고, 해고 통지를 받았다. 샌더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해고되어서 놀란 게 아니라, 페어차일드의 얼굴인 자신을 해고하는 그들의 무모한 결정에 놀랐다. 동시에, 이것이 큰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부터는 남을 위해 일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내 회사를 가져야겠다.
샌더스는 즉각 페어차일드 동료 일곱 명에게 연락했다. 별 다른 비전도 없었다. 그저, 자신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는 내용이었다. 조금은 허무맹랑한 소리였지만, 그는 샌더스였다. 일곱 명 모두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인텔에 이어 또 하나의 페어차일드의 아이가 독립했다. 회사 이름은 단순했다. Advanced Micro Devices(AMD). 1969년 5월 1일, 공교롭게도 또 다른 8명의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자본금은 10만 달러였다. 창업자들의 개인 저축을 합친 것이었다. 사무실은 샌더스의 아파트 거실이었다. 매우 작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비전은 거대했다. 페어차일드를 밀어내고, 인텔과 모토로라를 이기는 것. 나중에 샌더스는 그의 유명한 슬로건을 만들었다. “Real men have fabs” (진짜 남자는 팹을 가진다).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실험실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했던 그가, 반도체 칩 연구 및 제조 시설인 팹 라인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이 실리콘 밸리에 퍼져 나갔다. 아마도 초라하게 시작한 사업이 그의 자존심을 긁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AMD의 철학이 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칩을 설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 만든다.
AMD의 첫 제품은 단순했다. 독자적인 설계 능력도 없었고, 제조 시설은 꿈만 같았다. 자본도 부족했다. 할 수 없이 페어차일드와 내셔널 반도체의 칩을 분석했다. 그리고 같은 기능의 칩을 만들었다. 명백한 특허 침해였지만, 아직은 회색지대가 있었다. 샌더스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대신, 그는 판매에 치중했다. 10~20% 저렴한 가격으로 더 빠르게 배송했다. 고객 서비스는 최고였다. 그는 직접 고객들을 방문했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다양한 주제를 재미있게 논의했다. 주말에는 고객들과 골프를 쳤다. 그는 훌륭한 골퍼이기도 했다. 그는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했다. “AMD는 단지 칩 공급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파트너입니다.”
이 전략이 통했다.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1972년, AMD는 창립 3년 만에 상장했다. 주가는 첫날 2배로 뛰었다. 이를 통해 샌더스는 수백만 달러를 확보했다. 이제 진짜 남자가 될 차례였다. AMD는 자체 연구소와 생산 시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IBM은 컴퓨터 산업의 리더였다. 아직 개인이 가지기에 컴퓨터는 사치품이었지만, 기업들은 상황이 달랐다. 모든 기업들이 IBM의 컴퓨터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IBM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들은 신중하게 반도체 칩을 고르고, 소프트웨어를 선택했다. 1975년 인텔이 새로운 프로세서를 출시했다. Intel8086. IBM은 당연히 이 칩을 자신들의 컴퓨터에 적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지나치게 인텔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왕좌는 하나여야 하고, 왕은 IBM이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생각이 AMD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주었다. 어느날 인텔이 AMD를 찾아왔다. IBM과 거래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공급자(second source)가 필요했다. 인텔은 저항했으나, 인텔의 독점을 거부하는 IBM을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인텔은 AMD에게 8086을 만들 수 있는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생산의 일부를 위임했다.
이 덕분에 AMD는 거침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컴퓨터는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었고, 덩달아 프로세서 칩의 수요도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나, 인텔과 AMD의 동업은 처음부터 커다란 폭탄을 안고 시작했기에,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1985년, 인텔이 386 프로세서를 출시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 칩은 너무 압도적인 성능을 보였다. 인텔은 더 이상 IBM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이미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는 많았고, 그들 모두는 인텔의 칩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인텔의 입장에서는 IBM보다 더 미운 것은 AMD였다. 그 사이 AMD는 엄청나게 성장했고, DRAM 사업도 진출했다. 물론, 몇 년 후에 일본 기업의 벽에 막혀 다시 포기하긴 했지만. 인텔은 이제 IBM과 AMD를 물먹일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해, 기존의 계약을 파기했다. 샌더스는 분노했다. 인텔이 계약을 어긴 것이라고 판단해, 즉시 인텔을 고소했다. 인텔과 AMD 사이의 유명한 ‘7년 전쟁’의 서막이었다.
샌더스는 특유의 언론 플레이로 AMD를 다윗처럼, 인텔을 골리앗처럼 포지셔닝 시켰다. 잘 살지만 거만한 인텔이 작지만 노력하는 AMD를 핍박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반면, 인텔은 공개적인 언급을 가급적 자제하고, 법적 해결에만 집중했다. 결과는 인텔에게 유리하게 내려졌다. AMD도 386 칩을 생산할 수 있지만, 인텔의 기술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제 AMD도 자체 칩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샌더스는 이 상황을 받아 들이고, 자체 설계 역량을 강화했다. 경험이 많은 엔지니어를 뽑아, 새로운 칩을 설계하게 만들었다. 샌더스의 목표는 인텔386과 호환되는 칩을 20~30% 저렴하게 파는 것이었다. 따라서, 칩 자체의 성능은 386과 비슷하기를 원했다. 1991년 Am386, 이어서 1995년 Am486을 출시하면서 PC 프로세서 시장의 10~15% 점유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산업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AMD의 존재는 인텔의 독점을 막고 경쟁을 유발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이 시장은 누구도 방심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었다.
1995년 샌더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AMD를 마케팅 기업이 아닌 기술 혁신 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인텔의 호환칩을 생산하는 것으로는 인텔을 이길 수 없었다. 7년 전쟁을 통해 그는 정말로 인텔을 이기고 싶었다. 사람들은 AMD를 카피캣(Copy Cat: 남의 기술을 베껴 사업하는 기업을 의미)이라고 수근대지만, 자신이 보기엔 인텔은 상도덕이 없는 불한당이었다. 당시에 인텔은 펜티업 칩을 개발해 최전성기에 올라 있었다. 샌더스는 팀을 조직해, 펜티엄을 능가하는 칩을 개발하라고 명령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것이 새역사를 창조하는 일이라며 개발팀을 다독였다. 그리고, 이것은 큰 자극이 되었다. 남을 설득하는 능력만큼은 샌더스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1999년 6월, AMD는 새 칩을 발표했다. 출시 행사는 화려했다. 실리콘 밸리가 아닌 라스베거스에서 열렸고, 레이져 쇼와 락음악 등으로 흥을 돋구었다. 샌더스가 무대에 올랐다. 63세에 이르렀지만, 스타일은 여전했다. 화려한 정장과 깔끔한 외모, 유머있고 세련된 말투. 이 날은 내용도 충격적이었다. AMD가 개발한 새로운 칩, 코드네임 K7으로 알려졌던 Athlon이 성능에서 인텔을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오랜기간 인텔의 독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환호했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 것이었고, 이것이 실리콘 밸리의 방식이었다. Athlon은 날개 돋친 듯 팔려갔고, 2006년에는 시장 점유율이 30%를 넘기도 했다.
샌더스는 2002년 은퇴했다. 이미 66세의 나이였다. 은퇴식도 샌더스다웠다. 화려한 은퇴식에서 그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샌더스가 떠난 후 AMD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2006년까지 계속 성장했으나, 인텔의 반격에 의해 점유율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이후, 제조 부문을 분사시켰다. 진짜 남자 전략을 포기하는 것이냐는 비아냥이 많았지만,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어쩔 수 없었다. AMD는 팹리스, 즉 설계만하고 제조는 아웃소싱하는 전략을 취했다. 모두가 AMD의 시대가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2017년 Ryzen 칩으로 다시 부활했다. 특히, 게임 시장에서 AMD의 칩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20년 이후에도 AMD는 시장 점유율 20% 정도를 유지하며, 여전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AMD의 탄생과 성장은 실리콘 밸리에 또 다른 활력을 불어 넣었다. 모두가 기술 혁신을 이야기할 때, 샌더스는 마케팅에 집중했다. 아웃복서처럼 경기장 주변을 빙빙 돌다가 한번씩 강펀치를 날리기도 했다. 나태해지려는 경쟁자들을 새롭게 일깨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매우 유연하게 사업을 운영했다. 샌더스는 시장에 밀착되어 있던 경영자였다. 고객이 원하는 것과 불편해 하는 것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을 조정했다. 기술 혁신도 중요한 사항이지만,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은퇴 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반도체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장학금 제도와 연구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8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깔끔한 정장과 재미있는 연설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