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세계로 퍼진 반도체 칩

칩은 언제나 기술을 넘어 '정치'와 '시대정신'의 문제였다.

by JBO

“칩(Chip)”이라 불리는 반도체 직접 회로는 손톱만한 크기의 작은 실리콘 조각이지만, 세계 경제와 지정학, 그리고 문화 현상의 트렌드를 변화시키는 현대 문명이 심장이다. 이 작은 부품은 컴퓨터, 스마트폰, 의료기기, 자동차, 무기체계, 심지어 냉장고까지 문명 생활의 핵심 인프라 속에서 구동하고 있다. 우리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간다는 말은 곧, ‘칩의 시대’에, 혹은 '칩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난 70여년의 기간 동안 반도체 칩은 전자회로의 주요 부품을 넘어서, 현대 국가의 전략, 국제 관계,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까지 확장하면서 우리의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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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중심으로 최근의 산업 상황이 변하는 것만 봐도, 반도체 칩은 단순한 산업 재화로 한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칩 공급망은 미국, 중국, 한국, 일본, 대만, 유럽 등 세계 강대국이 체력과 기술을 겨루는 ‘지정학적 전장’ 그 자체가 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장비 및 설계에서 우위를, 중국은 대규모 자금 투입을 통해 제조 역량 확보를, 대만의 TSMC는 초미세 공정의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술 혁신을 통해 국가의 부를 늘리고자 한다면, 칩 공급망 내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명백해지고 있다. 따라서, 반도체 칩을 둘러싼 갈등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성큼 다가온 AI의 시대는 이런 경향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제, 반도체 칩은 전쟁의 칼날이자 경제의 혈관이 되었다.


칩 공급망은 마치 잘 연결된 세계화의 결정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한 연결과 위험 분산’이라는 역설이 숨어 있다. 한 개의 칩이 생산되기까지 20여개 국의 소재, 장비, 설계, 제조 공정, 패키징, 물류가 연결되어 있다. 모래에서 실리콘을 얻고, 이를 나노미터 단위로 설계하고, 극자외선(EUV) 장비로 제조한 후 다시 조립해 전 세계 제품에 탑재한다. 하지만, 이 연결성은 한편으로 단절의 공포를 낳는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했을 때, 자동차 산업부터 스마트폰 제조까지 전 세계 공급망이 흔들린 이유는 반도체의 ‘핵심 국가 종속 구조’ 때문이었다. 일시적이었으나, 이 혼란을 통해 ‘모든 것을 연결했고, 최고의 효율을 보였지만,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는 디지털 기기를 들고 다니는 시대를 넘어, 디지털 기기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스마트워치, 인슐린 펌프, AI 기반 청력 보조 기기, 심지어 뇌 임플란트까지. 칩은 인간의 감각, 감정, 생명과 연결되고 있고, 맹렬하게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칩과 생리적으로 연결된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될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실리콘 기반의 칩이 인간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인식과 정체성의 변화를 이끈다. 예를 들어, 과거의 국가 경제력은 철강, 조선, 석탄 등으로 측정되었지만, 이제는 반도체 칩의 생산 능력과 기술 확보력이 국가의 자존심이 되었다. ‘반도체 엔지니어’는 현대 노동자의 영웅이 되었고, ‘반도체 강국’은 공동체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칩은 냉전의 기억을 가진 실리콘 물질이지만, 디지털 문화의 심장에 박혀 전 세계를 뛰게 하고 있다. 칩 산업은 기술의 이야기이자, 지정학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얽힌 공동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 그 얽힘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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