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국의 재정비- SEMATECH

비열했다기 보다는, 너무 솔직하게 패권적

by JBO

1987년 봄, 워싱턴 D.C. 미국 국회의사당. 상원 군사위원회(Senate Armed Services Committee) 청문회가 이제 막 끝났다.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다. 청문회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상원의원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이들은 바로 긴급 회의를 가졌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지금 당장.” 이것이 미국 반도체 산업 재정비의 시작이었다.


청문회의 주제는 <반도체 산업의 위기와 국가 안보에 대한 영향>이었다. 국방부, 상무부, 그리고 반도체 산업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미국이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잃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시작은 국방부 차관이었다. 그는 미국의 첨단 무기들이 막대한 양의 반도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일본 제품의 의존도가 높아 안보에 구멍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만약 일본이 반도체 칩 공급을 중단하면, 미국의 국방 시스템은 마비될 수도 있다고 과장이 섞인 우려를 전했다. 묵묵히 듣던 상원의원들이 이 대목에서 반응했다. 더이상 진주만 습격은 없겠지만, 반도체 습격은 가능하다는 말도 흘러 나왔다. 테사스 인스트루먼트의 CEO도 증언했다. 여기서 더 물러나면,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의 기술적 우위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고, 소련과의 군비 경쟁도 불리할 것이라는 게 요지였다.


청문회에 참석한 반도체 산업 전문가들은 온갖 우려를 쏟아내었다. 일본에게 기술을 전수한 것도, 일본과 다르게 공정 개선보다는 현금 흐름의 달콤함에 빠진 것도, 그 결과 점점 경쟁에 뒤쳐진 것도 모두 미국 기업들의 잘못이었다. 이런 상황이 위기라면, 기술혁신을 중심으로 한 산업적 해법을 도출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굼뜨고 노회한 여우가 되었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젊은 여우와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기보다는 상황을 조작해 유리하게 만들 생각만 했다. 평소에는 거리를 두었던 정치인들에게 쪼르르 달려가 달콤한 말로 그들을 꼬드겼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공했다. 1987년 미국 국방부를 중심으로 한 정부와 산업의 파트너십이 채택되었다. 국방부가 향후 5년 동안 1억 달러를 지원하고, 반도체 기업들이 1억 달러를 매칭하는 방식이었다. 총 14개의 회사가 참여했는데, 인텔, AMD,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다 알만한 이름들이었다. 이로써 반도체 산업 최초로 민관합동 연구개발 컨소시엄이 설립되었다. 이름은 비교적 단순했다. Semiconductor Manufacturing Technology, 줄여서 SEMATECH이라고 불렀다. 일본이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미국의 산업 경쟁력을 회복시키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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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도는 여러 면에서 과거와 궤를 달리했다. 자유와 경쟁, 혁신을 추구하던 실리콘 밸리가 정부와 손을 잡고 관료주의 속으로 들어갔다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이것도 실리콘 밸리 특유의 유연함이라는 긍정도 상당했다. 급하면 누구의 손이던 가져다 써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만큼 일본의 기세는 날카로웠고, 치명적이었다. 특히, 1970년대 일본이 시도했던 민관합동 연구 컨소시엄에 대한 부러움이 한몫했다.


컨소시엄은 텍사스의 오스틴(Austin)에 자리를 잡았다. 이 도시는 1960년대부터 IBM,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의 기업이 자리를 잡았고,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및 컴퓨터 기술공사(MCC, Microelectronics & Computer Technology Corporation) 같은 연구 컨소시엄도 위치해 있었다. 무엇보다, 텍사스 주정부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이 컨소시엄을 유치하기 위해 강력한 인센티브와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연구중심의 명문대학으로 자리잡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가 인근에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실리콘 밸리 인근의 산 호세(San Jose)도 강력한 경쟁자였지만, 승자는 오스틴이었다. 사실 산 호세는 실리콘 밸리와 너무 가까워 오히려 배척당한 면이 있었다. SEMATECH의 영향으로, 오스틴 지역은 ‘실리콘 힐스(Silicon Hills)’라는 명칭을 얻었고, 현재도 다양한 반도체 기업들이 몰려 있다. 삼성전자의 미국 법인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새로운 조직이 성공하려면, 특히 서로 경쟁하고 반목하던 기업들을 하나로 묶으려면 그만한 카리스마의 리더가 필요했다. 그리고,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로버트 노이스. 페어차일드와 인텔의 공동 창업자이고, 집적회로의 공동 발명자로 업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노이스가 가진 양면성-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은 컨소시엄을 성공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노이스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그는 컨소시엄을 통해 이뤄야할 기술혁신 목표를 명화히 제시했고, 예산 사용을 적절히 분배했다. 무엇보다, 그는 칩 제조 공정을 개선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에 뒤진 결정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얻게 되는 지식과 노하우, 양성된 젊은 인재, 그리고 새롭게 개발되는 장비 등은 반도체 산업 전체의 공통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노이스의 원칙은 잘 작동했다. SEMATECH은 오스틴에 최첨단 연구 시설을 건립했고, 회원사들은 엔지니어를 파견했다. 파견된 엔지니어들은 보통 2~3년 근무했다. 경쟁관계였지만, 이 기간 동안은 함께 일하고 결과를 공유했다. 쓸만한 결과는 특허권을 신청했고, 이를 공동 소유 또는 상호 라이선싱을 통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새로운 칩 설계 등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공유되지 않았다. 참여한 기업들은 기술 공유와 독점 사이의 절묘한 균형에 끊임없이 신경써야 했다.


초기에는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무엇보다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반대했다. 정부가 특정 산업을 지원하는 것은 전형적인 시장 왜곡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또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식 모델을 따라한다는 비난은 시민들의 공감대를 얻었다. 노이스는 심한 압박을 받았다. 외부 시선이 따갑다 보니,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모든 비난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개성이 강한 엔지니어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노이스가 갑자기 사망했다. 62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다행히 쓸만한 연구 결과가 계속 도출되었다.


칩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MOSFET을 칩에 구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회로의 선폭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이 공정은 사진인화 공정, 리소그래피(Lithography)를 통해 실현된다. SEMATECH이 수립한 가장 우선적인 목표도 더 정밀한 리소그래피를 실현하는 것이었는데, 재료 기술과 화학적 처리, 그리고 정밀한 레이저 기술 등이 개선되어야 했다. 1990년대가 넘어서면서 성과가 나타났다. 500나노미터에서 350나노미터로 개선되었고, 수율도 대폭 향상되었다.


미국의 노력은 큰 결실로 되돌아왔다. 비록 DRAM 시장에서는 여전히 일본과 한국에 뒤쳐져 있었지만, 더 큰 이익을 주는 프로세서 시장에서는 미국 기업들이 압도적인 강자였다. 이후에는 통신용 모바일 칩, 그래픽 카드가 중심이 된 AI 칩 등 미국은 이 산업의 주도권을 꽉 움켜쥐고 있다.


SEMATECH의 변화도 불가피했다. 경쟁에서 승리한, 무엇보다 일본 기업들을 보기좋게 자빠뜨린 미국은 의기양양했다. 1996년 정부 지원을 중단하고 순수한 민간 컨소시엄으로 자리 잡았고, 외국 기업들에게도 참여를 허용했다. 반도체 칩 산업의 공급망이 글로벌화 되면서, 미국 외의 국가들과 협업이 점점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전형적인 민간 연구 컨소시엄의 길을 걸었다. 대학을 비롯한 주요 연구기관들과 새로운 기술 혁신에 몰두했고, 비교적 의미있는 성과들을 발표했다. 위치도 텍사스주에서 뉴욕주로 옮겨 치열한 산업의 현장을 벗어나 선행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의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SEMATECH 모델은 여러 의미를 남겼다. 일단, 기술 우위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미국에서 기술을 배운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 일본보다 늦게 시작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일이 1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연속해서 벌어졌다. 기술혁신의 방향을 잃거나 속도를 늦추면, 10년 안에 여지없이 경쟁자에 의해 추월당한 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따라서, 모든 기업들이 혁신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경영 자원을 배치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선도 기업들이 더 지독하게 기술 혁신에 몰두했다.


또한, 국가는 개별 산업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자유시장 논리도 무색해졌다. SEMATECH의 사례를 보면, 국가는 규제를 통해 산업의 틀을 결정하고, 경쟁은 민간 기업이 한다는 이분법적 논리는 교과서에서나 통하는 한가한 소리라는 점이 드러났다.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빠르고 유연해야 했다. 정해진 틀에 현실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틀을 박차고 나가야 했다. 정부의 개입이 능사는 아니지만, 필요하면 정부의 손도 빌려야 하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정부와 협력해 경쟁 기업들을 주저 앉힐 수도 있었다. 반도체 칩 산업은 정부와 산업이 한 팀으로 작동하는 ‘국가 전략 산업’이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가진 경제력, 군사력, 달러 중심의 국제 무역 등이 건재하는 한 미국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도 굳건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76년 발족한 일본의 VSLI 기술 연구조합과 1987년 설립된 미국의 SEMATECH은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남겼다. 모두 산업의 핵심 기업들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합된 연구개발 컨소시엄으로 이후 한국과 대만 등 도전자들에게 큰 모범 사례가 되었다.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는 칩 산업의 수요와 공급 균형은 짧은 주기로 변화하는데, 무어의 법칙에 따라 선점해야할 기술 로드맵은 저만치 앞에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이익과 손실 규모와 관계없이 매년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데, 이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커서 망설이는 사례가 많았다. 이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이런 민관 연합 컨소시엄이 담당했다. 기업들이 공통으로 보유할 수 있는 공정과 장비 기술은 컨소시엄이 담당하고, 기업들은 차별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첨단 기술에 집중하는 것으로 분화되었다. 반도체 생산 기업이 적은 한국과 대만은 이후에 조금 더 역할이 분화되었고, 정부는 정책 및 세제 혜택에 집중하고 있다. 오히려, SEMATECH의 DNA는 이제 유럽과 중국으로 전파되어 새로운 도전자를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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