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다 느리지만 탄탄한 전략가들
2023년 3월, 워싱턴 D.C. 미국 상무장관 지나 레이몬도(Gina M. Raimondo)가 네덜란드 무역장관을 만났다.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는데, 사실 요청이라기 보다는 강압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네덜란드 정부가 ASML의 DUV(Deep Ultarviolet, 심자외선) 장비를 중국에 더 이상 수출하지 말라는 윽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DUV 보다 더 정밀한 EUV(Extreme Ultraviolet) 장비의 수출도 규제하는 상황에서 DUV까지 규제한다면 ASML은 중국이라는 큰 시장을 잃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유럽의 딜레마였다. 유럽은 반도체 칩을 직접 제조하는 기업이 거의 소멸되었고, 남아 있는 칩 제조 기업도 주로 자동차나 산업용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메모립 칩을 만드는 기업들도 있었지만, 미국과 동아시아의 기업들에게 지속적으로 시장을 뺐겼다. 대신, 유럽에는 다른 종류의 파워가 있었다. 칩을 만드는 장비와 새로운 칩을 설계하는 능력에 있어서 유럽의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특히, ASML이 제조하는 리소그래피 광학 장비는 거의 독점적인 경쟁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떤 반도체 칩 공장도 제대로 굴러갈 수 없을 정도이다. 산업 공급망 위에서 보면 ASML은 을의 위치이지만, 실제로는 갑보다 더 갑과 같은 협상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칩 설계에 있어서 독보적인 능력을 보유해, 전 세계 스마트폰의 99%에 들어가는 칩 구조를 설계한 ARM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 더해 전통적인 반도체 칩 제조사인 Infineon, NXP, STMicroelectronics 등이 특화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유럽은 나름의 방식대로 반도체 칩 산업 생태계에 기여하고 있다.
반도체 칩 산업에서 미국과 동아시아 3개국-일본, 한국, 대만-의 협력과 경쟁은 그 외 지역에 있는 기업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경쟁 장벽으로 작동해왔다. 이들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산업 생태계가 활발해졌고, 경쟁에서 도태된 기업들은 가차없이 밀려났다. 그 과정에서 유럽의 기업들이 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곳에서 자신들만의 굳건한 장벽을 구축했는데, 위에서 얘기한 첨단 공정 장비 분야가 대표적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차례이다.
‘빠르게 움직이고 시장을 선점하라’는 경영 전략을 넘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최소한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칩 산업은 이 문화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유럽의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과감한 투자, 선점 경쟁, 예상을 뛰어 넘는 설비 확장 등은 유럽의 문화와 맞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느리지만 탄탄한’ 전략을 내세웠다. '코끼리는 표범과 스피드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가야한다'고 믿었다. 아마도 그들의 속내를 보면, 칩4 국가들-미국, 일본, 한국, 대만-의 저 미친 속도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어서,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제 반도체 칩 산업 생태계의 코끼리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살펴볼 것이다.
1984년 4월 1일, 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Eindhoven). 유명한 가전 회사인 필립스(Philips) 본사 근처 작은 건물에 31명의 엔지니어와 직원들이 모였다. 그들은 원래 필립스의 신사업팀 소속이었는데, 사업개발에 성과가 좋아 새로운 회사로 분사(Spin-off)된 것이었다. 회사이름은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Advanced Semiconductor Materials Lithography. 줄여서 ASML로 불리게 된 기업의 탄생이었다.
1980년대 초, 필립스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회사는 가전 분야와 반도체 사업이 주력이었는데, 모두 일본 기업들이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경영진의 대응은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는 구조조정이었다. 문제는 그 비핵심사업 부문이 반도체 제조 장비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필립스는 이 부문을 분사하면서, 조금 더 전략적인 판단을 내렸다. 기존 장비 회사인 ASM International을 꼬드겨 참여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 결과 ASML의 지분은 필립스가 50%, ASM이 50%를 투자하는 합작회사 방식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매우 미미했다. 두 회사 모두 ASML이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큰 돈을 투자할 생각이 없었는데, 알려진 바로는 겨우 2백만 ~ 3백만 달러 정도가 초기 자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초기 리더십은 필립스 인원으로 채워졌다. 특히, CEO가 중요했는데, 선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반도체 및 광학 장비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할트 스미트(Gjalt Smit)가 기꺼이 ASML 참여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에인트호번의 낡고 비가 새는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했고, 40여명의 직원이 전부였으나, 스미트는 큰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이 산업에서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비즈니스 전략은 1등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금메달을 따고 싶어해야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동메달에 만족하겠다고 결심하면, 아마 6위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끝장입니다.” (1985년 5월, 네덜란드 일간지 NRC 한델스블라트)
창립 이후, ASML은 칩을 제조하지는 않지만, 가장 치열하게 무어의 법칙을 추종했다. 반도체 칩이 더 정교해지려면 더 정밀한 리소그래피 장비가 필요했다. 무어의 법칙을 따르려면 그에 맞는 장비가 필요하고, 그 장비를 제때 제공해주는 기업이 되는 것이 ASML의 비전이었다.
시장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1980년대 반도체 칩 산업의 강자는 일본이었고, 장비 회사 및 원료 공급사를 포함한 일본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는 신규 회사가 도전하기에 너무 굳건한 상태였다. 1980년대 중반, 전세계 칩 제조사 상위 10개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을 때, 리소그래피 장비 시장의 강자도 일본의 Nikon(점유율 45%)과 Canon(점유율 35%)이었다. 이들을 제외하면 미국의 Perkin-Elmer와 GCA가 간신히 10% 내외의 점유율로 일본 기업이 신경쓰지 않는 틈새 시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ASML이 도전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누구도 ASML을 신경쓰지 않았다. 말그래도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시작이 불안했던만큼 문제는 금방 다가왔다. 분사 당시 몇 년간 장비를 구매해주겠다고 다짐했던 필립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니,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사실 필립스는 반도체 칩 제조 분야에서 거의 퇴출될 상황이어서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현금이 없었다. ASML의 초기 자금은 금새 사라졌고, 추가 자금은 요원하기만 했다. 눈물겨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엔지니어들의 고군분투와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시작과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꿈을 가지고 여기에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상황은 어려웠지만, 나름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들의 첫 제품 PAS 2000을 출시했다. 반도체 웨이퍼에 반복적으로 회로 패턴을 입히는 장비로, 기존의 사진 인화 기술, ‘step-and-repeat’ 방식을 차용했기 때문에, ‘Stepper’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장비였다. 반도체 산업의 변방, 유럽의 ASML이 카메라 및 광학 분야에 강자였던 Nikon과 Canon이 양분하던 시장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시작은 초라하고 참혹했다. 그들의 첫 제품은 경쟁제품보다 1~2세대 뒤쳐진 기술이었고, 가격도 그렇게 싸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가 필요한데, 돈이 없었다. 1986년이 거의 끝나갈 시점에서 ASML의 운명도 끝날 상황이었다. 직원들 급여를 줄 돈도 없었고, 제품도 팔리지 않았다. 그나마, 대주주인 필리스와 ASM International이 일부 지원을 하기로 결정해 간신히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CEO인 스미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기회를 포착하는 데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해답은 언제나 고객과의 접점에 있다고 믿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며, 직원들을 다독였다. 그게 적중했는지, 고객과의 협업이 중시되면서, 그들의 속내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표면적인 불만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점이었다. 선도 기업인 Nikon과 Canon은 일체형 장비를 제공하고 있었다. 장비의 성능 및 효율에 있어서 불만이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드러났다. 스테퍼는 반도체 팹 라인에서 쉼없이 사용되는 장비로, 고장이 나면 신속히 수리 및 대체가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나, 기존의 장비는 일체형이어서 고장이 나면 한동안 사용을 중지한 채 A/S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현장의 불만이 쌓여갔다.
ASML은 이 점을 포착했다. 참혹했던 첫 모델의 실패 이후 그들은 고객을 만족시킬 방법을 고민했고, 해답은 모듈식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절치부심 끝에, 1989년 두 번째 모델인 PAS 5000이 출시되었다. 신제품은 일체형이 아닌, 광학모듈, 웨이퍼 스테이지 모듈, 정렬 시스템, 그리고 소프트웨어 등의 부품간 연결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어느 한 부분이 고장나면, 미리 준비한 다른 모듈로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그만큼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고, 덕분에 현장 엔지니어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또한, Nikon과 Canon은 모든 부품을 자체 제작하는 수직 통합 방식이었다. 그만큼 효율이 높았지만, 문제에 대한 대응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ASML은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 광학계는 독일의 Carl Zeiss와 협업했고, 레이저 광원도 여러 공급사와 계약을 맺었다. 정밀도와 설계 원리가 포함된 웨이퍼 스테이지와 소프트웨어만 자체 개발하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효율이 높아지고, 혁신의 속도가 빨라졌다. 사실, 이것은 자본이 부족한 ASML의 궁여지책이었지만, 결과는 매우 탁월했다. 반도체 산업에 들어가고 싶었던 협력사들이 미친듯이 기술혁신을 촉진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모델을 제안되면서, 비용이 점차 줄어들었다. ASML을 정점으로 작은 산업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는 Nikon과 Canon은 이런 모델을 우습게 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혁신의 속도에서 뒤쳐지기 시작했다.
PAS 5000은 대성공이었다. 필립스만 겨우 구매하던 이전 모델에 비해, 새로운 고객들이 주문서를 내밀었다. 특히, Intel의 주문이 결정적이었다. 세계 최고의 기업이 선택한 장비라는, 어떤 국가 기관이 준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업 인증을 획득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인증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산업에 뛰어든 대만의 신생 기업이 파트너십을 요청했다. 모리스 창의 TSMC였다. 칩 설계는 하지 않고 제조만 하는 기업과 칩 제조에 최적화된 핵심 장비를 판매하는 기업의 만남은 이 산업의 역사에서도 가장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1990년 TSMC는 칩 제조를 위한 팹라인을 설계하고 있었다. 리소그래피 공정을 위한 노광 장비는 당연히 Nikon이 우선 순위였다. 그 때, ASML의 영업팀이 찾아왔다. 신생 기업으로 온갖 설움을 당하던 TSMC에게 ASML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한창 잘 나가는 PAS 5000을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파트너십을 통해 동반 성장하자는 제안이 달콤했다. 모리스 창이 보기에, 그들은 굶주렸고, 절실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TSMC처럼 보였다. 그만큼 강력한 동질성을 느꼈고, 곧이어 큰 비전이 떠올랐다. 칩 제조에 몰두하겠다고 선언한 TSMC와 제조 공정의 핵심 장비를 제고하는 ASML의 결합은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혁신의 동반자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짧은 논의 후, 두 기업은 파트너십의 그림을 그렸다. 향후 수 십년간 산업 생태계를 좌우할 작은 호랑이들의 의기투합이었다.
ASML은 가장 우수한 전문가를 TSMC에 파견해 아예 한 몸 처럼 움직이게 했다. 이들은 공정 개발을 함께 진행했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ASML의 다음 제품에 반영했다. 그리고, ASML은 새로운 제품을 우선적으로 TSMC에 배치해 성능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제조 공정에만 집중하는 두 기업이 협력하니, 혁신의 속도가 눈부시게 빨라졌고, 이 둘은 무어의 법칙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ASML의 엔지니어들은 TSMC와의 협업을 통해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기술 혁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1993년에는 더 정교한 장비인 PAS 5500이 출시되었고, 이 때부터 ASML은 기존의 강자인 Nikon과 Canon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혁신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고객이 늘면서 1995년에는 시장 점유율이 15%를 넘어섰다. 여전히 Nikon(50%)과의 격차는 컸지만, Canon(25%)은 충분히 경쟁할 만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에 힘입어 기업을 공개하고, 필립스와 ASM International이 지배하는 구조를 벗어났다.
그러나,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1997~1998년 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전례없는 금융위기에 빠져드는데, 이로 인해 ASML의 큰 고객인 대만과 한국의 기업들이 지출을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도전자의 심장이 살아있던 ASML에게 이 위기는 큰 기회이기도 했다. 몇 년 동안 진행될 금융위기 기간 동안 경쟁사들은 기존 시장을 사수하면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전력할 것이었다. 이 시기에 혁신을 앞당긴다면, 금융위기가 마무리될 즈음엔 큰 격차를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반대도 많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해보자’라는 것이었다. ASML은 더 정교한 장비를 위해 과감하게 새로운 광학 시스템을 도입했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웨이퍼 처리 속도도 20% 이상 앞당겼다. 나노미터 수준의 정밀도와 빠른 공정 속도, 그리고 문제 발생 시 24시간 내에 해결하는 서비스 네트워크.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휘청거리는 시기에, ASML은 조용히 이빨을 갈고 있었다.
금융위기가 지속되었다면, ASML의 선제적 투자는 큰 실패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위기 상황은 금방 잠잠해졌고, 한국돠 대만, 그리고 미국의 칩 제조 기업들은 몇 년간 주저했던 설비투자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말, 놀라운 결과가 발표되었다. ASML(35%)이 Nikon(33%)을 제치고 업계 선두가 된 것이었다. 한 번 치고나간 경주마는 선두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2위와의 격차를 더 벌렸는데, 이는 혁신의 경쟁에서 조금도 나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혁신에 ‘Mr. Lithography’가 있었다.
시간을 되돌려 1984년. Martin van den Brink는 이제 막 전기공학과 물리학 학위를 취득한 신참이었다. 그는 필립스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에 참석했는데, 이 때 운명적으로 ASML의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하나의 기계를 설명한 전단지였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나의 기계에 엄청난 혁신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이라면, 며칠 밤을 세워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그는 과감하게 ASML의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도저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비가 새는 창고에서 시작했지만, 세상을 바꾸는 천재를이 그렇듯, 그도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중독’에 빠져 버렸다. 그는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고, 대부분은 실험실에서 밤을 세우곤 했다. 그의 재능과 열정은 금방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스미트 CEO는 이런 그에게 축구의 리베로와 같은 역할을 부여했다. 한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혁신 과정에 참여해 제품 개발을 담당하라는 것이었다.
브링크의 혁신 철학은 ASML의 DNA가 되어 갔다. 그는 혁신을 위한 연합 공동체를 꿈꾸었다. 반도체 칩 제조는 물리학과 화학의 끝판왕이었고, 다양한 전문가들로 팀을 만들어 혁신 시스템을 구축해야 앞서 갈 수 있었다. 소수의 ASML 전문가로는 이런 시스템의 요구를 제때에 충족시키거나, 지속가능하게 유지할 수도 없었다. TSMC와의 협업을 강력하게 제안한 것도 브링크였다.
2000년을 넘어서부터 무어의 법칙은 가혹할 정도로 정밀한 제조 능력을 요구했다. 특히, 칩의 회로 패턴을 만드는 리소그래피의 정밀성은 과학의 한계 근처까지 접근했는데, ASML과 혁신 파트너들은 번번히 새로운 해답을 찾아 혁신을 지탱했다. 모두가 한계라고 예상했던 10나노미터 단위의 패턴도 ASML의 장비를 사용하면 가능해졌다. 매 순간이 도전적인 과제로 가득찼으나, 브링크의 팀은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기에 최적화된 상태였다. 브링크는 끊임없이 그의 팀원들에게 복잡한 문제를 즐기라고 독려했다. 실제로 외부에서 그의 팀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좋게 말하면 집요한 혁신가들이었나, 다른 관점에서는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광기의 엔지니어 집단이었다. 그들은 마치 복잡한 문제에 중독되어, 평범한 문제는 오히려 회피하는 변태적인 사람들 같았다.
이런 집요한 혁신으로 인해, ASML의 시장 점유율은 계속 상승했다. 2010년을 넘으면, 이미 Nikon과 Canon은 경쟁사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격차를 보였다. 한 때는 시장 점유율이 80%를 넘긴 적도 있었다. 반도체 칩 산업의 미래를 물어보면, 인텔이나 삼성전자가 아닌 ASML에 가야한다는 말까지 들렸다. 최신형 전투기보다 비싼 칩 생산장비를 제조하는 ASML의 역사는 지금도 현재 진행중이다.
2024년 4월, 브링크는 공식 퇴임을 선언했다.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했던 청년 엔지니어는 이제 업계의 가장 존경받는 시니어가 되었고, 퇴임에 이르렀다. 인텔과 TSMC, 삼성전자 등이 무어의 법칙을 현실화 시켰다면, 브링크가 이끄는 ASML은 이 기업들에게 결정적인 도구를 제공했다. 이들은 지난 40년간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다.
2007년 1월 9일,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 센터. 무대에 스티브 잡스가 등장했다. 청바지와 터틀넥 스웨터, 운동화를 신은 전형적인 그의 모습이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 혁명적 제품을 소개합니다. 와이드스크린 iPod, 혁명적인 휴대전화,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케이터. 그리고, 이것들은 세 개의 분리된 기기가 아닙닏. 하나의 기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iPhone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기기를 꺼내 쑥스러운 듯 흔들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중계를 보던 사람들, 후에 소식을 들은 일반 시민들 모두 혁신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폰 이후 세상은 놀랄만큼 변모하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의 발표 무대에서 9,000km 떨어진 곳. 영국 케임브릿지 ARM Holdings의 본사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샌프란시스코와 8시간의 시차로 인해 이미 저녁 늦은 시간이었는데, 사람들은 회의실에 모여 잡스의 발표를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그들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으나, 그 주인공은 애플이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아이폰에는 ARM11이라는 통신용 칩이 내장되어 있었고, 이 칩을 설계한 것이 ARM이었다. 아이폰 출시 이후 사람들은 ARM이 설계하고 애플과 삼성전자가 만든 칩이 담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장점유율 99%. 설계만 하고 제조하지는 않는 이 작은 기업이 반도체 칩 생태계의 주역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1983년, 케임브릿지 대학 근처의 작은 사무실에 몇 명의 엔지니어가 모였다. 5년전 세 명의 청년들이 모여 설립한 회사의 사무실이었다. 회사 이름은 Acorn Computers. 취미용 조립식 컴퓨터 키트를 만드는 회사였으나, 공영방송 BBC와 손을 잡고 학교 교육을 위한 표준 컴퓨터 제작으로 약간을 돈을 번 상태였다. 작은 규모였으나, 컴퓨터에 대한 이해만큼은 최고 수준인 엔지니어가 모여 있었다. 마침, 교육용 컴퓨터에 대한 학교의 요구가 많아 만드는 대로 팔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미국에 애플이 있다면, 영국에는 에이콘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돈을 버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고 싶다는 갈증은 여전했다. Intel 8086이 쓸만했지만, 더 높은 성능의 프로세서가 아쉬었다. 그리고, 혁신은 이런 아쉬움에서 출발했다. 로저 윌슨(Roger Wilson)은 창립 멤버는 아니었지만, 컴퓨터에 대한 갈망으로 합류한 엔지니어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으나, 대학시절 이미 소형 컴퓨터를 제작하는 등 여러모로 남다른 엔지니어였다. 그는 BBC 프로젝트를 책임지면서, 회사에 큰 돈을 벌게 해준 사람이기도 해서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그 시기에 윌슨은 미국에서 발표된 RISC(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 프로세서 설계도를 입수했다. 기존의 프로세서가 커다란 단독주택이라면, RISC는 모듈화된 아파트 설계도와 비슷했다. 적은 트랜지스터로 높은 효율을 가진 프로세서 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윌슨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RISC 설계에 기반한 새로운 프로세서 설계. 그러나, 예산은 매우 적었다. 윌슨을 포함한 4명의 담당자가 배치되었고, 10억 원 정도의 예산이 배정되었다. 종이와 연필로 작업을 시작했으니, 옆에서 보면 컴퓨터 회사가 아닌 건축사무소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윌슨은 놀랍도록 단순한 설계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조립하던 10대 시절부터 가졌던 모든 불만 사항을 해소할 획기적인 설계도가 그의 손에 의해 쓱쓱 그려졌고, 다른 팀원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약 3년 간의 작업 끝에 드디어 새로운 칩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ARM1(Acorn RISC Machine 1). 이 설계도는 놀랍도록 단순하게 작성되었다. Intel과 Motorola의 프로세서가 수십 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데 비해, ARM1은 단지 25,000개의 트랜지스터로 구동이 가능했다. 이는 더 적은 비용으로 제작이 가능하고, 전기 소모량 및 냉각 패키지 등의 비용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체적으로 효율을 상승시키는 것이었다.
설계도는 즉시 칩 제조사인 VLSI Technology에 보내 칩 제작을 의뢰했다. 몇 주 만에 도착한 칩을 컴퓨터 회로에 꽂을 때, 실험실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첫 시도가 성공할 것이란 예측은 지나친 환상이었으나, 윌슨과 그의 팀이라면 왠지 성공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첫 시도에서 칩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모두가 환호하려 하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전류가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아주 미세한 전류만 흐르고 있었다. 고장난 것이 아니라, 너무 효율적이어서 소량의 전류만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이 칩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했다. 윌슨조차 그냥 간단하게 만들고자 했던 시도가 성공했다는 기쁨이 있을 뿐 상업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지 예상하지 못했다. ARM1은 개인용 컴퓨터 모델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간단했고, 적은 전력을 소모해 가정용에는 딱 맞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인텔과 IBM, 마이크로소프트 연합은 세계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에이콘은 영국에서는 스타 기업이었으나, 글로벌 시장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ARM1과 연이어 발표한 ARM2의 환호를 뒤로하고 에이콘은 현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미국 시장에서 밀리기 시작했던 애플이 ARM의 가치를 알아봤다. 애플과 에이콘의 기술이 합쳐지면 획기적인 칩이 가능할 것 같았다. 마침 현금 흐름에 어려움을 겪는 에이콘에게 ARM 기술과 인력의 인수를 타진했으나, 에이콘은 매우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후 여러 논의 끝에 하나의 해법이 도출되었다. 합작회사를 설힙하자는 것이었다. 에이콘 43%, 애플 43%, VLSI 14%의 지분구조로 새로운 기업이 탄생했다. 1990년 11월, Advanced RISC Machines Ltd., 줄여서 ARM이란 기업의 시작이었다. 에이콘에서는 윌슨을 포함한 12명이 ARM으로 이직했다. 비즈니스 모델은 단순했다. ARM은 칩을 설계할 뿐 제조하지는 않는다. ARM의 설계도가 필요한 기업들은 사용 권한을 구매하거나, 제품 판매 단가에서 일정 부분(보통 1~2%)을 로열티로 지불했다. 반도체 칩 산업 생태계에는 꽤나 신선한 시도였는데, 이렇게 방향을 설정하자 구매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ARM은 조용히 성장했다. 실패한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사업은 꾸준하게 성장했고, 1998년 기업 공개도 성공했다. 이후,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에이콘은 지분을 매각해 ARM은 비로소 독립적 의사결정이 가능한 회사가 되었다.
에이콘의 결정이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깨닫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개인용 컴퓨터 시대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ARM이었지만, 휴대폰 시장이 커지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배터리 중심의 모바일 기기에서, 큰 전력을 소모하는 프로세서 대신 효율적인 ARM 프로세서가 필요해졌다. 모든 휴대폰 제조사들이 ARM이 설계한 프로세서를 채용했고, 그만큼 ARM의 지갑은 두툼해졌다. 업계 사람들도 ARM이 설계한 칩의 중요성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1990년대 내내 사업에서 죽을 쑤던 애플은 ARM과의 관계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새로운 모바일 기기를 위해 와신상담 개발에 전력했다. 그 결과가 2007년 스티브 잡스의 발표였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시기에 시장의 주역은 애플과 ARM이었다. 잘 나가던 인텔,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완전히 뒤로 쳐졌고, 일본 기업들은 소리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메모리 칩과 주문 생산을 통해 최적의 제조 역량을 갖춘 삼성전자와 TSMC만 경쟁력을 유지할 뿐이었지만, 그 기세는 많이 줄어들었다. 일찌감치 변화를 감지한 삼성전자는 휴대폰 사업을 시작해 적당한 사업 기반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혁신을 모색할 수 있었다.
2016년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느닷없이 ARM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처음에는 모두 오보라고 생각했다. 한창 잘 나가는 ARM이 기업을 매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수 가격이 발표되는 순간 상황이 반전됐다. 모두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무려 £24.3B. 달러로는 320억 달러 규모였고, 당시 환율을 적용하면 약 46조 원의 엄청난 인수 금액이었다. 영국 기술 회사 사상 최대의 인수 금액이기도 했다. 이 정도 돈을 준다면, 회사를 매각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 보였다. 기술 기업이 거의 사라진 영국의 반응은 차가웠으나, 현지 생산과 고용 승계를 약속한 소프트뱅크의 결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소프트뱅크는 기술 거래 기업이지 기술 개발 기업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 산업 생태계에 뛰어들 능력도 없었고, 사채업자처럼 적당한 시기에 더 높은 가격으로 팔 계획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엔비디아(Nvidia)가 $40B에 인수 제안을 하자, 바로 매각하는 날렵함을 보여줬다. 4년 만에 수조 원의 이익을 보는 일이었으니, 남아도 엄청 남는 장사였다. 그러나, 이 매각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스마트폰의 주요 제조사가 있는 미국과 한국, 중국의 기업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서면서 미국과 영국 정부를 압박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기술 매매나 하는 소프트뱅크가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야 별 상관없지만, 그래픽 칩의 최강자인 엔비디아는 얘기가 다르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ARM을 갖는다면, 이 산업 생태계가 왜곡된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2022년 2월, 엔비디아는 결국 ARM 인수 포기를 발표했다. 모든 모바일 회사가 ARM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려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공감대가 자리잡았다. 2023년 9월, 소프트뱅크 인수 때 상장 폐지되었던 ARM은 다시 나스닥에 재상장했다. 공모가 $51로 시가총액이 $54.4B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리고, ARM의 기업가치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직접 프로세서 칩을 만들자는 윌슨의 건의에 의해 시작된 ARM의 역사는 40년 역사를 넘어가면서 시장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ARM 프로세서는 2025년 기준 3,250억 개 이상 출하되어 스마트폰-태블릿-IoT 기기의 99%를 지배한다.
그러나, 이 역사의 시작을 제안한 윌슨은 2001년에 이미 회사를 떠나 브로드컴(Broadcom)으로 이직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94년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성으로 전환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소피 윌슨(Sophie Wilson)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칩 설계 및 후학 양성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그녀’가 된 윌슨은 대학생 시절부터 시작해 ARM으로 현대 컴퓨팅의 기반을 닦은 ‘숨은 영웅’이다. 그녀의 RISC 혁신은 에너지 효율이 높은 모바일 기기를 가능케 했고, 트랜즈젠더로서의 여정은 다양성의 상징이 되었다.
미스터 리소그래피인 ASML의 마틴 반 덴 브링크와 ARM의 소피 윌슨은 조용하지만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한 축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무엇보다 혁신 생태계를 촉진시킨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