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중국의 도전 - SMIC와 HiSilicon

장루이징과 양멍쑹의 도전 이야기

by JBO

2020년 9월 15일, 자정. 중국 심천(深圳)의 화웨이(Hwawei) 본사. 자회사인 HiSilicon 사무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핵심 엔지니어들이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마우스 클릭 소리 외에 어떤 잡음도 없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조금 후에 인터넷 실시간 뉴스는 미국 상무부의 발표를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외국 회사도 미국 기술/장비를 사용하면, 화웨이에 칩을 공급할 수 없다.”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한 수석 엔지니어가 조용히 말했다. “끝났어. TSMC가 우리에게 더 이상 칩을 만들어 주지 않을거야. 1년치 재고밖에 없는데, 그 다음엔 어떻하지?”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중국이 꿈꾸던 첨단 산업 발전은 반도체 칩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날 밤 HiSilicon의 직원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외부 현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15년간 쌓아온 설계 능력,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칩. 하지만 그것을 반도체 칩으로 만들 수 없다면? 설계는 종이에 불과했다.


같은 시각, 1,500km 떨어진 상하이의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 본사. CEO인 양맹송(梁孟松)도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반도체 노장은 이 순간의 의미를 포착했다. HiSilicon은 더 이상 TSMC에 칩 생산을 의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SMIC에게 올 것이다. 하지만, SMIC가 할 수 있을까?

이것이 SMIC와 HiSilicon의 이야기이자, 첨단 산업을 개척하려는 중국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하나는 중국 최대의 칩 제조사. 또 다른 하나는 중국 최고의 칩 설계사. 각각 TSMC와 ARM의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이었지만, 아직까지는 그들의 하위 모델과 같은 위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다. 그들의 동맹, 그들의 투쟁, 그들의 좌절과 희망. 이것은 중국 반도체 자립의 최전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image.png 중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 (출처: 조선비즈)


2000년 4월, 중국 상하이에 SMIC가 설립되었다. 중국 정부와 상하이시 정부가 자금을 투자했고, 싱가포르 및 미국의 벤처 자금이 모여, 15억 달러의 초기 자본금이 조성되었다. 설립의 주역은 장루이징(张汝京). 1948년 중국 난징에서 태어났으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그의 가족은 대만으로 이주했다. 장루이징은 대만에서 성장한 후,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에 입사해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다. 그는 주로 해외 사업 개발을 담당했는데, 덕분에 반도체 팹 건설과 관련해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 이탈리아, 일본, 싱가포르 등지에서 새로운 사업 개발을 담당하던 장루이징은 1995년 이후에는 대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TI와 대만 컴퓨터 기업 Acer가 합작회사를 만들었는데, 이 합작회사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비록 중국 본토에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 대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매우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던, 1997년, 인생의 전환점이 발생했다. TI가 대만의 합작회사를 TSMC에 매각한 것이었다. 장루징도 자연스럽게 TSMC로 옮겼지만, 쉽게 융화되지 못했다. 그를 견제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CEO인 모리스 창도 그에게 많은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이런 서먹서먹함이 그의 결단을 촉진했다.


장루이징은 1997년 연말 바로 TSMC를 퇴사한 후, 이듬해 Grace Semiconductor를 설립했다. 의기양양하게 시작했으나, 바로 대만 정부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TSMC는 대만의 자존심이고, 대만 자체가 TSMC였다. 새로운 도전자는 환영받기 힘들었다. 미국식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장루이징에게 이런 국가주의적 산업 정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만에서 고군분투하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찾아 나섰다. 마침 한국과 대만처럼 반도체 칩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싶었던 중국 정부가 그를 유혹했다. 그의 진정한 조국, 중국을 위해 헌신해 달라는 말과 함께.


장루이징의 비전은 매우 명료했다. '중국의 TSMC를 만들겠다.' 주요 임원들은 대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높은 급여와 스톡옵션으로 그들의 미래를 보장했고, TI에서 밀려난 사람들도 일부 참여했다. 이렇게 SMIC의 준비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SMIC 설립 전, 장루이징은 이미 전 세계 10개 이상의 생산 라인을 건설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검증된 엔지니어들과 막대한 자본,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합쳐져, 2001년 9월 창립 18개월 만에 8인치 생산 라인이 완공되었다. 보통 4~5년 이상 걸리는 공사 기간을 훨씬 앞당긴 비공인 세계 기록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들의 성장은 눈부셨다. 2002년 베이징에 두번째 라인, 2003년 텐진에 세번째 라인을 건립하면서 규모 면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이 덕에 2004년 뉴욕과 홍콩에 동시 상장했고, 고객들은 끊임없이 밀려 들었다. 이렇게 가다간, 조만간 TSMC를 뛰어 넘을 것 같았다. 위기를 느낀 TSMC가 특허 침해와 영업비밀 절도로 SMIC를 고소할 정도였다. 전 세계 반도체 생태계는 후발 기업에게 닥치는 의례적인 성장통으로 생각했으나, 이 제소가 끝내 장루이징의 발목을 잡았다.


2004년 10월, 심천. 또 하나의 회사가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조용히 설립되었다. 화웨이(Hwawei)에서 분사한 HiSilicon(중국명: 해사반도체)이었다. 인민해방군 출신이었던 린정페이(任正非, Ren Zhengfei)는 당시 잘 나가던 홍콩의 국제 무역 인프라가 좋은 사업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별다른 기술은 없었는데, 인민해방군 인맥을 동원해 홍콩 위 작은 어촌 마을에 전자부품 공장을 설립했다. 이것이 중국의 애플이라는 화웨이와 중국의 실리콘밸리 심천의 시작이었다. 1990년대로 넘어서면서 중국은 대대적인 경제 개발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는데, 새롭게 통신망을 깔아야 할 곳이 넘쳐났다. 덕분에 화웨이의 통신장비는 없어서 못 팔 상황이었다. 이때도 린정페이의 인민해방군 인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의 끈끈한 관계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매출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화웨이는 굳이 수출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불안한 것이 있었는데, 통신장비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 칩을 해외 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해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칩 공급이 끊기면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린정페이는 이런 상황을 그의 인맥을 통해 중국 정부에 계속 보고하면서 국가 차원의 전략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고위 관료들의 공감을 얻어 중국 정부도 반도체 칩 산업 발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지원이 화웨이에 집중되었다.


시작은 좋았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중국 정부와 화웨이 모두 큰 기대를 걸지는 못했다. 이미 인텔과 소니, 상섬전자, TSMC 등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고, 지난 30~40년간 그들의 치열한 기술 개발 역사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 할 것 같았다. 이들은 유일한 돌파구가 ARM 모델이라고 봤다. 칩 생산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기는 어렵지만, 설계 부문은 우수한 인재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때부터 화웨이는 미친듯이 인재를 모집했다. 특히, 중국계 엔지니어로 해외 기업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우선 채용하기 시작했다. TI 근무 경력이 있던 허팅보(何庭波)도 이 무렵 귀국해 화웨이에 입사했다.


그는 우선 팀을 조직했다. 중국의 명문대 졸업생들과 화웨이 내부의 인재들을 뽑아 반도체 설계 팀을 구성했다. 모두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청년 엔지니어들이었다. 화웨이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이들은 조용히 일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해외 기술을 분석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을 축적했지만, 왠만하면 해외 기업들과의 충돌을 회피하는 철저한 ‘외로운 늑대’ 전략을 추구했다.


2000년이 넘어서면서, TSMC는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화웨이로부터 칩 생산을 의뢰하는 빈도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모두 통신 장비용 칩이었고, 아직까지는 범용 칩이어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화웨이는 조금씩 TSMC의 중요한 고객이 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중국의 칩 산업에 변화가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특히, SMIC가 이제 막 시작한 무렵이어서 중국의 변화는 기존 반도체 칩 산업의 강자들에게는 불리한 조짐을 내포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2004년 화웨이가 반도체 설계 부문을 분사해 HiSilicon을 설립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국의 전략이 이제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철저한 투 트랙 전략. 칩 설계는 HiSilicon, 칩 생산은 SMIC. 해외 선도 기업들, 그 중에서도 TSMC에게는 커다란 경쟁자의 등장이었지만, 견제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고, 내수 위주의 사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웨이의 완제품인 통신 장비는 활발하게 수출되고 있었다. 이 부문은 견제가 가능할 것 같았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보안과 관련된 점을 꼬집어 화웨이의 통신 장비에 대한 여러 소문이 퍼져나갔다. 화웨이와 인민 해방군의 끈끈한 관계가 소문의 신빙성을 높여 주기도 했다.


HiSilicon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사업 시작과 동시에 산업의 전환기에 도달했다. 2000년대 중반은 반도체 칩 산업의 주류가 컴퓨터에서 모바일 분야로 이동 중이었다. 이로 인해 영원할 것만 같았던 [Intel-IBM-Microsoft] 연합은 상당히 완화되었고, Apple이 다시 기회를 잡아 가고 있었다. HiSilicon에게는 기존의 강자들과 충돌할 필요 없이 새로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던 셈이었다. 기술 부문을 이끌던 허팅보는 휴대폰용 칩 개발에 돌입했고, 이는 모회사 화웨이 뿐만 아니라 휴대폰 사업을 개발중인 여러 중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되었다. 중요한 칩을 해외 의존하지 않고 받을 수 있다면, 중국의 엄청난 수요를 충족시킬 휴대폰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HiSilicon은 2008년부터 모바일용 칩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 중국 기업들이었다. 주문에 따라 칩을 설계하고, 생산은 TSMC에 요청하는 방식이었다. TSMC로서는 HiSilicon의 부상이 조금 미심쩍었지만, 이런 것들은 엄청난 물량 주문에 묻혀버렸다. 중국은 본격적으로 휴대폰이 확산되는 시기였으며, 엄청난 규모로 인해 전체 산업 생태계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기린(麒麟)은 중국의 신화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동물로, 사슴의 몸과 용의 머리를 가진 형태로 표현된다. 극도로 온화하고 자비로운 동물로 평화와 안정을 상징한다. 모바일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HiSilicon은 자신들의 칩이 기린과 같은 역할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산업 질서와 충돌하기 않으면서 새로운 생태계를 평화롭게 구축하는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 되돌아보면 허망하기 그지없는 이런 바램으로 인해 2013년 그들이 야심차게 출시한 새로운 칩은 Kirin이라는 브랜드로 통일되었다. 특히, Kirin 970은 매우 상징적인 칩이었는데, AI(인공지능)에 최적화된 NPU(Neural Processing Unit)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칩 덕분에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의 휴대폰 제조사들은 AI 서비스가 탑재된 스마트폰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Kirin 970은 세계를 긴장시켰다. 글로벌 산업은 엔비디아의 GPU 칩을 기반으로 AI. 산업 생태계가 조금씩 형성되어 가던 시기였다. Kirin 970은 이 산업 생태계의 선두 자리를 중국이 선점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중국 봉쇄 전략이 가동되었다. 글로벌 산업계는 중국의 반도체 칩 생태계를 철저하게 중국 내수용으로 한정시키려 했다. HiSilicon과 SMIC의 수출 길을 차단할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이든 동원했고, 이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이 나팔수가 되었다.


한편, SMIC를 제소한 TSMC는 2005년 1월 첫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SMIC는 총 1억 7천5백만 달러를 6년간 분할해 TSMC에 지급하면서 특허를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억울학지만, 사업의 연속성을 위해 합의한다.” 장루이징은 기자회견 장에서 이렇게 말했고, 이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열패감을 대변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TSMC는 집요했다. 합의 후에도 그들은 증거를 계속 모았는데, 실제로 SMIC의 한 엔지니어가 TSMC의 내부 기술 문서를 소지하고 있다는 게 발각되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다시 제소했고, 2009년 또 다시 승소 판정을 받았다. SMIC는 2억불을 즉시 지급하고, 주식 8%를 양도하라는 판결을 받아야 했다. 중국 정부는 매우 당황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술 훔치기에 대한 의심이 높은데, SMIC도 기술을 계속 훔쳐왔다는 내용이 판결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루이징에 대한 믿음이 싸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장루이징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SMIC의 회장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중국 곳곳에 4개의 반도체 생산 라인을 건립하면서 중국 굴기의 상징이었던 사람의 퇴장이었다.


장루이징의 퇴장 이후, SMIC는 한동안 암흑기를 보내야했다. 조직 장악력과 혁신, 그리고 비전이 사라진 자리에 중국 정부의 낙하산들이 내려왔다. 기술 생태계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이들은 인사권을 통해 조직을 장악하는 것에만 몰두했으며, 이 과정에서 기술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인 ‘관료주의’가 단단하게 자리잡았다. 쓸데없는 회의와 느린 의사결정으로 인해 장루이징이 애써 키워낸 핵심 인재들이 해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차츰 SMIC는 저가 시장에서만 생존하는 전형적인 중국 기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내부적으로 활력과 혁신은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HiSilicon을 대상으로 국제적인 압박이 거세지자, 중국 정부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SMIC의 역량을 다시 끌어올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자리만 차지하던 얼치기들을 다 쓸어내고, 혁신 전문가를 영입해야 했다. 이런 바람 속에,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양멍쑹이었다.


1950년 대만에서 태어나 미국의 UC Berkeley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실리콘 밸리의 혁신 DNA를 만끽하며 AMD에서 1992년까지 근무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인 대만의 TSMC는 가슴 뿌듯한 기업이었다. 망설임없이 귀국한 그는 17년간 근무하면서 3차원 구조의 트랜지스터(FinFET)와 20nm 이하의 기술 혁신을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팀의 집요한 기술 혁신과 놀라운 속도는 글로벌 산업 전문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비슷한 개발 전략으로 유명한 삼성전자도 미세 공정만큼은 TSMC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던 양멍쑹에게 뜻하지 않는 소식이 들려왔다. 2009년 TSMC의 차기 R&D 수장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된 것이었다. 자신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는 매우 실망했고, 경쟁자가 선택되었기 때문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TSMC를 떠나, 그의 혁신 리더십을 눈여겨보던 삼성전자로 이직했다. 삼성전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의 팀은 FinFET를 주도했고, 2014년 14nm FinFET을 출시해 삼성전자의 공정 수준을 단숨에 도약시켰다. 지지부진했던 파운드리 서비스 분야에서 삼성은 이제 TSMC와 경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연히, TSMC는 분노했고, 양멍쑹과 삼성전자를 기술 유출 혐의로 제소했다.


판결 결과는 미미했다. SMIC로부터 실질적인 항복 선언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이번 판결은 양멍쑹을 삼성전자로부터 분리하고, 3년간 반도체 업계 취업을 금지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양멍쑹 개인에게는 큰 불행이었지만, 산업 경쟁의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양멍쑹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었다. 그의 헌신과 기여를 생각한다면, TSMC의 조치는 개인적으로 매우 가혹한 것이었고, 그는 TSMC를 꺾음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2017년 10월, 3년간의 취업금지 기간이 끝났다. 그는 자유가 되었고, SMIC의 부활을 꿈꾸던 중국 정부와 의기투합했다. 한 달 후, 11월 그는 SMIC의 공동 CEO로 취임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야전 사령관이 되었다. 중국 정부는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하며 그에게 무한대의 의사 결정권을 주었다. TSMC는 경악했다. 장루이징에 이어 또 하나의 배신자가 SMIC로 옮겨 자신들의 목을 조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금방 사실로 드러났다.


양맹송은 혁신을 위해 조직을 재편성했고, 최첨단 장비로 라인을 업그레이드했다. 해외로 떠났던 인재들을 다시 불러왔고, 불이 꺼지지 않는 실험실 체제를 추진했다. 응어리진만큼 그는 미친듯이 일했고, 조직의 역량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연구자들은 집보다 회사에서 자는 시간이 많아졌다. 양멍쑹은 이들을 위해 아예 실험실 옆에 숙직실을 마련하기도 했다.


결실은 금방 나타났다. 마침 TSMC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졌던 HiSilicon이 새로운 칩 생산을 SMIC에 의뢰했다. 2019년 9월, 양멍쑹이 합류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화웨이는 새로운 칩이 탑재된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소비자들은 화웨이가 홍보하는 각종 기능에 관심을 가졌지만, 산업 전문가들은 이 폰에 탑재된 칩, Kirin 710A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기능도 탁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설계한 화웨이가 HiSilicon에 칩 설계를 의뢰했고, 설계가 마무리된 후 SMIC가 생산했다. 중국 정부가 보기에 이는 완벽한 산업 생태계였다. 특히, 이 칩은 14nm FinFET이 적용되었다. 이미 7nm 공정에 성공한 TSMC에 비하면 여전한 격차가 있지만, 양멍쑹은 불과 1년 9개월만에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화웨이-HiSilicon-SMIC 연합이라는 새로운 강자를 맞이한 글로벌 산업은 큰 충격을 받았고, 반면 중국은 자신들의 비전이 달성된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해했다. 이제 10nm 이하의 공정을 달성하면, 세계 시장에서 겨뤄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양멍쑹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들의 목표는 2년 내에 7nm 공정을 개발한다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홍보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도전적인 홍보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반도체 칩 산업의 특징은 소수의 국가만이 산업 생태계의 일원이고, 이들 국가는 이 산업 발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트랜지스터 개발 이후부터 줄기차게 유지되던 것이었다. 미국 중심의 질서에 일본이 도전했다가 크게 고전했고, 한국과 대만은 철저하게 미국 중심의 생태계에 순응하면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유럽은 생태계 밖에 있거나 이 생태계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모든 혁신은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다른 국가들은 이 혁신을 현실화하는 데 일조하면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 질서에 중국이 끼여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나, 2019년을 기점으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HiSilicon과 SMIC의 부상은 초원의 늙은 사자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더 크기 전에 지금 짓밟아야 한다는 인식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영토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협에 사자들은 끈질기게 대응했고 과감하게 연합했다. 2018년의 트럼프 정부가 그 시작이었다. 이들은 화웨이와 중국 인민해방군의 비공식적 결탁을 근거로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이에 화웨이 제품에 대한 무역 제재가 현실화되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런 기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바이든 정부 초기에는 장비 및 기술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가 이뤄졌다. 이 조치가 특히 뼈아팠는데, 새로운 공정 개발을 위해 필요했던 장비들이 중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면서, SMIC를 비롯한 기업들의 혁신 속도가 늦춰졌고, 자연스럽게 경쟁사들과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바이든 정부는 생태계 조력자들(한국, 일본, 네덜란드)에게도 협조를 빙자한 협박을 했고, 이로 인해 중국은 반도체 칩 산업의 국제 무역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어서, 트럼프 2기에는 AI 개발에 필요한 칩들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외부의 압박은 중국 내부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HiSilicon은 더 이상 TSMC에 칩 생산을 의뢰하지 않고 SMIC를 비롯한 중국 내부 기업에게 의뢰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2021년 12월, 양멍쑹은 자신의 계획이 좌절된 것에 대해 크게 낙심했고, 사퇴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그를 만류했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그마저 떠나면 회생의 기회조차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를 잘 다독여 조용히 기회를 노리고자 했다. 항상 그렇듯이 시간은 젊은 사자의 편이다. 몇 년만 지나면 늙은 사자는 틈을 보일 것이고, 그 때쯤이면 반격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2023년 8월, 아무런 사전 예고없이 화웨이의 새 스마트폰이 출시되었다. Hawei Mate 60 Pro. 사전 판매 시작. 항상 그렇듯이 이 스마트폰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곧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는데, 여기에 포함된 Kirin 9000S 칩이 7nm 공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를 방해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김이 빠지는 소식이었다. 새로운 장비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모두가 달려들어 분석했고, 곧 중국이 미국 제재를 우회할 기술적 해법을 찾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완벽하지 않고 수율도 낮았지만, 중국은 자립의 계기를 스스로 마련했다. 조용한 출시와는 대조적으로 몇 개월이 지나 중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 산업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은 다 정치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과학 발견과 기술 혁신이 정치의 도구로 변해버린 듯한 모습이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주요 기업들이 이런 상황을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다.


상황은 계속 진행중이다. 중국은 자립하기위해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한 발 뒤쳐저 있다. 이제는 74세가 된 양멍쑹은 더 이상 예전같은 열정을 보이고 있지 않다. 정치의 도구가 된 듯한 자신의 모습에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HiSilicon의 허팅보도 비슷하다. Kirin 9000S가 출시된 후 그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었지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있다. 5nm와 3nm 칩 설계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도 더이상 자신이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듯 하다.


SMIC와 HiSilicon 연합의 역사는 자국 산업을 첨단 산업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중국 정부의 염원이 담겨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도전을 반복하며, 높은 성과를 이뤄냈지만, 외부 환경은 여전히 막막한 상황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포기는 그들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계속 갈 것이다. 너무 많이 투자했고, 너무 중요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 지쳐있는 1세대 선배들을 제치고,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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