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스와 무어가 남긴 실리콘 밸리의 혁신 DNA
1957년 9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8명의 젊의 과학자들이 마운틴 뷰의 한 변두리 사무실에 모였다. 그들은 막 쇼클리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이제 새로운 회사의 설립 문서에 서명하려 했다. 로버트 노이스가 펜을 들었다. 29세의 아이오와 출신 물리학 박사. 그는 팀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다. 조리있게 말을 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요령있는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리더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그의 매력은 출중한 외모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옆에는 고든 무어가 있었다. 28세의 조용하고 사려 깊은 화학 박사. 그는 말이 적었지만, 그의 말은 언제나 무게가 있었다. 후덕한 외모 덕에 그가 깊이 사색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나머지 6명도 모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젋은 학자들이었다.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인재들은 쇼클리에게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이제 새로운 것을 만들 차례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겠다는 각오와 함께.
회사 이름은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로 정했다. 150만 달러를 투자한 셔먼 페어차일드의 이름을 딴 것이다. IBM의 대주주이자 항공 사진 회사의 창업자였던 그는 전쟁을 겪으면서 큰 돈을 벌었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으면서도 연구의 자율성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계약 조건은 특이했다. 페어차일드는 8명의 창업자에게 150만 달러를 대출해주고, 8년 이내에 페어차일드 반도체 전체를 300만 달러에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실패 확률이 큰 프로젝트이긴 했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싼 값에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계약 구조였다. 이후에 크게 번창한 창업투자 방식의 초기 모형이었다. 8명의 창업자는 각자 500달러를 투자하여 100주씩 받았다. 당시 기준으로는 2~3주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이어서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남부에서 떠오르는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는 주요 임원과 연구원을 위한 스톡 옵션(Stock Option)을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8명의 창업자들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이를 알았고, 페어차일드가 적절한 스톡 옵션을 보장했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첫 사무실은 팔로알토의 허름한 건물이었다. 한때 과일 도매상점이었다는 소리가 있었고, 벽은 금이 갔으며,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삐걱 소리가 들리는 창고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실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쥴리어스 블랭크는 흥분해서 방방 뛰기까지 했다. “우리만의 실험실이야!, 아무도 우리에게 뭘 하라고 명령하지 않는 우리만의 실험실.” 로버트 노이스도 거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할 거야. 쇼클리가 보여준 것과 정반대로.”
로버트 노이스는 쇼클리와 모든 면에서 달랐다. 쇼클리가 권위적이었다면, 노이스는 민주적이었다. 쇼클리는 사람을 의심했지만, 노이스는 항상 신뢰를 표현했다. 쇼클리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지만, 노이스는 몇 가지만 제외하면 전적인 자유를 부여했다. 회사 설립 이후 가졌던 첫 전체 회의에서 노이스는 회사의 근무 방식을 이렇게 선언했다.
“규칙 1. 임원 전용 주차장 없음. CEO든 신입 엔지니어든, 누구나 같은 주차장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직급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중요합니다.”
“규칙 2. 모든 사무실 문은 열려 있어야 함. 더 좋은 건 사무실 자체를 없애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에서 일합니다.”
“규칙 3. 나쁜 소식을 빨리 전하는 사람을 보상. 문제를 숨기면 처벌받고, 빨리 알리면 칭찬받습니다.”
진 호이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노이스와 일하는 것은 마치 감옥에서 벗어난 것 같았어요. 우리는 과학자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 존중받았습니다. 자유와 존중이 부여되자, 우리의 창의성은 곧바로 폭발했습니다.”
1957년 12월, 페어차일드의 첫 위기가 찾아왔다. 한 엔지니어가 실수로 실리콘 기판 전체를 망친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실험한 연구 결과가 날아갔다. 수천 달러의 손실과 함께. 쇼클리였다면, 쥐잡듯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이스는 다르게 반응했다. 그는 팀 전체를 모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엔지니어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온도 조절을 잘 못 했고, 전적으로 자신의 실수임을 인정했다. 노이스는 담당자를 다그치는 대신 문제를 개선하려 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개선해야 합니까?” 이에 팀원들은 논의를 시작했고, 온도 센서 개선과 체크리스트 작성 등 실질적인 방안을 빠르게 도출했다. 페어차일드의, 더 나아가서, 실리콘 밸리의 기업 문화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실험에 성공하면 작은 것을 배우지만, 실패하면 더 큰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 실패를 공유하고, 개선에 대해 모두 토론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젊은 혁신가들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 시작했다. 혁신이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첫 과제는 명확했다.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것. 당시 대부분의 트랜지스터는 초기의 연구 성과에 기반해 게르마늄으로 만들어졌다. 게르마늄은 다루기 쉬었지만, 온도에 민감한 치명적 한계가 있었다. 75℃만 넘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실리콘은 달랐다. 150℃ 이상에서도 문제 없이 작동해, 군사용 장비, 자동차, 산업 기계 등 활용 폭이 매우 넓었다. 무엇보다 실리콘은 모래를 정제하면 얻을 수 있어서 원재료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그러나, 실리콘은 다루기 어려웠다. 효율을 위해서는 순수한 실리콘 결정으로 정제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고, 어쩌다 성공한 실리콘 결정에 불순물을 주입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고든 무어가 이 문제를 맡았다. 화학자로서 그의 전문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완벽주의자였다. 우선, 실리콘 제조 공정의 모든 단계를 하나하나 해부하듯이 분석했다. 더 좋은 트랜지스터를 제조하려면 실리콘이 순수해야 했다. 99.9999999%, 즉 9가 9개가 되는 정도로 순수하기를 희망했다. 놀라운 도전 목표였고, 그로 인해 무어는 실험실 한편에서 잠을 자고 남은 시간은 모두 연구에 쏟아 부었다. 미친 사람 같았지만,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온도를 조금씩 바꾸고, 압력을 조정하며, 실리콘 정제 과정을 수백 번 반복했다. 더디지만, 화학적 처리 방법이 조금씩 개선되었다. 어느 날 그를 걱정한 동료가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으므로, 내일 다시 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현미경을 통해 실리콘 결정을 관찰하던 무어는, 이후 실리콘 밸리 연구원과 창업자들의 금언이 된 말을 남겼다.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먼저 할 수도 있어.” 조용하고 사려깊은 외모의 샌님같은 학자였지만, 무어는 매우 집요하고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실리콘 결정은 완벽하게 규치적인 원자 배열을 가져야 했다. 그래야 트랜지스터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모래를 녹이고 정제하면서 실리콘 결정을 천천히 이끌어내야 한다. 지금도 실리콘 기판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초크랄스키(Czochralski) 공정을 개선하는 것이 무어의 또 다른 도전이었다. 용융된 실리콘에서 천천히 결정을 끌어올리는 기술을 위해 회전과 끌어올리는 속도, 온도 기울기 등 모슨 변수를 최적화했다. 보기 쉽고 자세하게 작성된 그의 실험 노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 매뉴얼이 되었다.
또한, 실리콘 결정에 N형과 P형의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확한 양의 불순물을 주입해야 했다. 불순물을 주입해 반도체의 에너지 밴드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불순물이 너무 많으면 트랜지스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너무 적어도 마찬가지였다. 무어는 불순물을 주입하는 법과 반도체 결정 틈으로 확산하는 공정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개선하고자 했다. 인류 역사상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상상하는 것도 힘들었다. 사실 무어도 다르지 않았다. 쇼클리 시절부터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가 있었지만, 너무 부족했다. 무어는 반복된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되면 온도, 시간, 농도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학적 모델을 만들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1958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첫 번째 시리콘 트랜지스터를 출하했다. 고든 무어가 이 말도 안되는 일들을 1년 만에 해낸 것이었다. 초기에는 게르마늄 트랜지스터보다 비쌌지만, 곧 가격은 내려갈 것이었다. 성능은 물론 훨씬 뛰어났다. 누구보다 미국 국방부가 주목했다. 미상일과 인공 위성에 쓸 트랜지스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극한 환경에서 작동하는 뛰어난 트랜지스터. 배신자로 낙인 찍힌 청년 창업가들은 자신들이 옳았음을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진 호어니(Jean A. Hoerni, 1924~1997)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네바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는데, 특이하게 물리학 박사 학위를 두 곳에서 받았다. 제네바 대학과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이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호어니 같은 천재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졸업 이후, 그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쇼클리를 만나 그의 연구팀에 합류했다.
전자 회로는 전자들이 움직이는 길과 전자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엔지니어들은 전자들이 길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세라믹이나 플라스틱 부도체에 구리선을 붙이는 방법으로 회로를 구성해왔다. 1955년 칼 프로쉬(Carl Frosch)와 링컨 데릭(Lincoln Derrick)은 이산화규소를 활용한 얅은 막 부도체를 발견하고 특허를 받았다. 이 막을 반도체 기판 위에 입히고, 전자 선을 붙이면 효과적인 트랜지스터 개발이 가능했다. 1956년 12월, 쇼클리는 진 호어니를 비롯한 모든 팀장급 직원에게 프로쉬와 데릭의 기사 인쇄본을 배포했다. 호어니와 뒤에서 소개할 아탈라는 뭔가 새로운 공정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1958년 호어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당시 트랜지스터 제조는 지저분했다. 각 소자를 개별적으로 만들고, 금선으로 연결하고, 밀봉했다. 수작업이 많았고 수율이 낮았다. 자연스럽게 비용이 매우 높아졌다. 호어니는 이산화규소 막을 사용하면 사진 인화처럼 트랜지스터 공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실리콘 기판을 산화시켜 표면에 산화실리콘(SiO2) 막을 만든다.
산화실리콘 막 위에 감광제(Photoresist)를 골고루 바른다.
전자 회로 패턴이 있는 마스크를 만들어 감광제 위에 설치하고, 그 위에 빛을 쬔다.
빛을 쬔 영역은 화학적 성질이 변해, 산 화합물에 담그면 그 부분만 제거된다(현상 작업).
산화막이 제거된 표면에 불순물을 확산시켜 반도체 특성을 강화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복잡한 구조를 만든다.
이 과정은 모든 것이 실리콘 기판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평면적이다. 그래서 공정 이름도 ‘평면 공정(planar process)’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IC 칩 생산 공정의 핵심인 사진인화(Lithography) 공정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제기했을 때, 노이스는 즉시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것은 게임 체인저야!” 실제로 평면 공정의 장점은 엄청났다. 하나의 기판 위에 수백 개의 트랜지스터를 동시에 만들 수 있었고, 사진 공정이므로 매번 같은 결과가 나왔다. 산화막이 실리콘을 보호하기에 신뢰성이 높았고, 마스크 패턴을 미세하게 만들면 더 세밀한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호어니의 아이디어는 바로 실험에 들어갔고, 현실화되었다. 1959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평면 공정으로 만든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출시했다. 누가 봐도 게임 체인저였다. 실제로 이후의 모든 반도체는 이 평면 공정에 기반해 최적화되었다. 호어니는 반도체 공정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1958년 여름부터 1959년 여름까지, 두 곳에서 또 다른 돌파구가 모색되었다. 텍사스는 몇십 년 전부터 석유 산업의 최전선이었다. 유전이 있을 만한 곳에 땅을 사고 채굴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한 곳이라도 석유가 나오면 큰 부자가 되는 방식이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도 이런 기업들 중의 하나였다. 1941년에 창업한 이 기업은 다행이 몇 곳의 유전에서 석유가 나와 큰 돈을 벌었고 사업을 다각화해 전쟁 기간 동안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라디오가 곧 모든 가정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그에 따라, 라디오 생산을 연구하는 부서를 마련하고 팀을 구성했다. 잭 킬비(Jack St. Clair Kilby, 1923~2005)는 이제 막 입사한 신입 엔지니어였다. 1958년 여름, 다른 팀원들은 모두 휴가를 갔지만, 킬비는 신입이어서 휴가가 없었다. 킬비의 목표는 하나였다. 그가 보기에 라디오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고, 앞으로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기능이 구현되려면, 라디오 전자 회로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십 개의 트랜지스터가 필요했고, 그만큼 고장이 날 확률이 높아졌다. 흔히 말하는 ‘폭정의 법칙(tyranny of numbers)’이 나타나는 것이다. 복잡해지면, 작은 문제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면 전체 기기가 작동을 멈추게 된다. 킬비가 보기에 해법은 하나였다. 모든 부품을 하나의 기판에 만들면 어떨까? 전자회로, 트랜지스터, 저항, 커패시터 모두를. 그는 게르마늄 조각을 가지고 실험을 시작했다. 1958년 9월, 그는 상사들 앞에서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작은 게르마늄 조각에 완전한 전자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테스터기를 연결해보니, 오실로스코프에 사인파가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이 흥분했다. 기존의 복잡하고 덕지덕지 붙은 전자회로를 대신할 ‘마이크로 칩(Micro chip)’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1959년 2월 킬비는 이 발견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리더, 노이스는 호어니의 평면 공정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우리는 실리콘 기판 위에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어. 그리고 사진 공정으로 패턴을 만들 수도 있어. 그렇다면, 전자 회로도 같은 방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노이스는 건축 설계사처럼 연필과 스케치북에 그의 아이디어를 그려봤다. 반복해서 그려보니, 아이디어가 점점 더 구체화되었다. 실리콘 기판 위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 산화막으로 절연, 그 위에 알루미늄 선을 증착하여 전자회로 구성. 비싼 금선이 필요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제조 공정에서 만들어졌다. 1959년 7월 노이스는 특허를 신청했다. 킬비와 노이스는 서로를 몰랐지만, 같은 문제에 직면했고, 거의 같은 해결책을 찾았다. 다만 특허 신청은 킬비가 노이스보다 빨랐다.
이렇게 만든 IC 칩은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비용도 1/10에 불과했다. 전자 산업의 시대, 더 나아가 이제 막 아이디어가 확산되는 컴퓨터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업계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특허 전쟁을 숨죽이면서 봤다. 이기는 편이 산업을 장악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두 기업의 특허전은 팽팽했고, 10년간 이어졌다. 아이디어는 비슷했지만, 공정에 차이가 있으므로 양측 모두 타당한 주장이었다. 1969년, 법원은 드디어 판결을 내렸다. 팽팽한 10년에 비하면 결론은 김빠지게 단순했다. 법원은 양 측 모두 독립적으로 발명했다고 판결했다. 킬비는 ‘직접회로의 개념’에 대한 특허를, 노이스는 ‘실용적인 직접회로 제조 방법’에 대한 특허를 가질 수 있었다. 기업들의 분쟁과는 별도로, 킬비와 노이스는 서로를 매우 존중했고, 친구가 되었다. 훗날 킬비는 이렇게 말했다. “노이스의 방법이 세상을 바꿨습니다. 나는 아이디어를 냈지만, 그가 실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2000년 킬비는 이 발견에 대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노이스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10년 전인 1990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회로에 의한 마이크로 칩은 호어니의 평면 공정 개발과 두 사람의 공로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노이스와 킬비 뿐만 아니라 호어니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열렬한 등산가였던 호어니는 파키스탄의 카람코람 산맥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난하지만 소박한 현지 사람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곤 했다. 반도체 분야의 선구자로 이미 상당한 부를 쌓은 그는 현지 마을에 학교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했고, 100만 달러의 기부금으로 중앙아시아 연구소를 설립해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계속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그와 등산을 같이 한 사람들은 호어니가 놀라운 지구력을 가졌으며, 적은 양의 물과 식량으로 오랫동안 하이킹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호어니는 그 자체가 대단히 효율적인, 반도체적인 사람이었다.
1960년 어느 금요일 오후, 페어차일드의 전통적인 ‘맥주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노이스의 아이디어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모든 직원이 모여 맥주를 마시며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주제는 정하지 않았다. 일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고, 스포츠나 영화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등장했다. 노이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잡담, 그 자체였다. 이날, 한 신입 엔지니어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트랜지스터를 더 많이 집적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무어가 대답했다. “물리적 한계는 아직 멀었습니다. 원자 크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가야할 길이 멉니다. 실리콘 원자의 크기가 0.2 나노미터인데, 우리의 선폭이 5,000나노미터이니, 이론적으로는 25,000배 더 작아질 수 있습니다.” 무어는 사려 깊은 사람이지만, 남을 웃기는 재주는 없었는데, 이날은 예외적이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너무 거대한 비전이어서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이스도 가볍게 웃기는 했지만, 그는 조금 더 비즈니스적인 면이 있었다. “물리적 한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있습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경제성입니다. 얼마나 작게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싸게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흥겨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대화였으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1965년 초, <Electronics> 잡지 편집지가 무어에게 연락했다. 이 당시 이미 업계의 거물로 존중받던 무어에게 반도체의 미래에 대한 특별 기사를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무어는 산업의 미래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예측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편집자는 매우 끈질긴 사람이었다. 거듭된 부탁으로 무어의 동의를 받아 내었다. 그러나, 무어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959년부터 1965년까지 6년간의 데이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프 용지에 X축은 연도를, Y축은 IC 칩에 직접된 트랜지스터의 수를 표시했다. 곧이어 Y축을 로그 스케일로 변경했다.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직선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959년: 1개
1962년: 10개
1963년: 20개
1964년: 50개
1965년: 60개
생각보다 깔끔한 선으로 정리되었다. 선을 연장하면, 1970년 1,000개, 1975년 65,000개로 늘어났다. 너무 큰 수에 무어도 멈칫했다. 아무도 믿을 것 같지 않았지만, 데이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 논리도 뒷받침했다.
무어는 기사를 썼다. 제목은 편집자가 정했다. “Cramming More Components onto Intergrated Circuits” (직접 회로에 더 많은 부품을 쑤셔 넣기). 무어는 칩의 직접도와 생산 비용의 관계를 신중하게 분석했다. 트랜지스터가 많아질수록 수율이 떨어져 칩당 제조 비용이 올라가지만, 트랜지스터당 비용은 감소했다.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그는 IC 칩의 미래를 이렇게 전망했다. “복잡도의 증가 속도는 단기적으로 볼 때 거의 일정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속도가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단기적으로 볼 때 복잡도가 매년 대략 두 배씩 증가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는 그래프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75년까지 하나의 IC 칩에 65,000개의 트랜지스터가 구현될 것으로 추정했다. 신중한 만큼 무어는 자신의 추정을 뒷받침할 근거를 세 가지 제시했다. “세 가지 기술이 개선되고 있다: 더 큰 칩을 만들 수 있는 능력, 더 세밀한 패턴을 만들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더 영리한 회로를 설계하는 능력. 이 세 가지가 모두 기여하고 있다.” 기사는 1965년 4월 19일 Electronics에 실렸다.
매년 두 배. 처음에는 큰 반향이 없었다. 업계 사람들만 흥미롭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추정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심지어, 무어의 기사 이후 5년이 지난 1970년 캘리포니아 공대의 카버 미드(Carver Mead) 교수는 이를 “무어의 법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법칙이 등장했지만, 무어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관찰일 뿐이고, 경헙적 추세라며 거창한 이름이 붙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이름은 정착되었다. 놀랍게도, 그의 예측이 계속 맞았기 때문이었다.
1975년, 인텔 8080 프로세서. 6,000개의 트랜지스터. 무어의 예측보다 조금 적었지만, 같은 차원이었다.
1985년, 인텔 80386. 275,000개의 트랜지스터
1995년, 인텔 펜티엄 프로. 5,500,000개의 트랜지스터
2005년, 인텔 펜티엄 D. 291,000,000개의 트랜지스터
2015년, 인텔 브로드웰. 1,400,000,000개의 트랜지스터
거의 정확하게 18~24개월마다 하나의 IC 칩에 구현된 트랜지스터의 숫자는 두 배로 증가했다. 무어의 법칙은 산업계 내에서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하나의 로드맵이 된 것이다. 무어의 법칙을 실현해야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모든 회사가 무어의 법칙을 맞추기 위해 미친 듯이 투자했다. 더 나은 장비, 더 세밀한 공정, 더 큰 제조 공장 등. 어떤 과학 법칙보다 무어의 법칙은 더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창업 이후 잠깐의 준비 기간이 지난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당연히 페어차일드는 권리 행사를 통해 300만 달러에 회사를 완전히 인수했다. 8명의 창업자들도 큰 수익을 얻었지만, 그들의 주식은 달랑 100주 뿐이었다. 쇼클리를 떠나고, 산업 및 학계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 피와 땀을 바친 회사의 성장 과실은 대부분 투자자에게 돌아갔으니, 자신들의 수익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심리적으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페어차일드 팀의 간섭도 심해지고 있었다. 돈이 벌리기 시작하니, 멋진 양복을 입은 재무 담당자들이 사무실과 연구실을 드나들고, 과학과 기술의 영역을 제 멋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갖 양식을 들이밀며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재촉했다. 노이스와 무어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쇼크리를 떠났는데, 또 다른 쇼클리가 나타난 것이었다.
1968년 7월, 노이스와 무어는 페어차일드를 떠났다. 그들은 벤처 캐피탈리스트로 명성을 쌓아가던 아서 록(Arthur Rock)을 찾아 갔다. 사업계획서조차 없었다. 단지 2쪽짜리 메모만 있을 뿐이었다. 그 메모에는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아이디어만 있었다. 황당해진 록은 시장 분석이나 재무 예측 자료가 있는 지 물어봤다. 노이스는 겸언쩍었지만, 페어차일드를 막 떠난 시점을 강조했다. 제법 경력이 쌓인 만큼, 이럴 때 강하게 부딪쳐야 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노이스와 무어입니다. 우리가 하면 성공합니다.” 그의 말은 록을 설득시켰다. 노이스와 무어라는 이름은 업계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록은 즉각 투자자들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100만 달러를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노이스와 무어의 명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불과 하루만에, 250만 달러가 모인 것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깐깐한 투자자들이 이번에는 별다른 내용을 묻지도 않았다. 그저, 노이스와 무어라는 이름이면 충분했다. 모두가 새로운 회사의 등장을 기대했고, 그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사 이름은 ‘Integrated Electronics’를 줄인 ‘Intel’이었다.
노이스와 무어는 페어차일드의 문화를 인텔로 가져왔다. 그리고 더 발전시켰다. 인텔 본사에는 개인 사무실이 거의 없었다. CEO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든 동등한 업무 공간을 배정받았다. 노이스의 철학이었다. 벽은 소통을 막을 뿐이다.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흐르는 공간, 시시껄렁한 농담과 잡담이 오가는 공간. 좋은 아이디어는 그런 공간에서 불쑥 튀어나온다고 믿었고, 그의 믿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후, 모든 벤처 기업들의 문화가 되었다.
헝가리 이민자 출신으로 후에 또 다른 전설이 되는 앤디 그로브(Andy Grove, 1936~2016)는 ‘건설적 대립(constructive confrontat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2차 대전 중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나 미국으로 이민온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살았다. 화학공학 박사를 딴 후 페어차일드에 입사했는데, 동경하던 노이스와 무어가 인텔을 창립하는 것을 보고 이듬해 그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로브의 내면에는 어린 시절의 끔찍한 억압과 미국에서 경험한 자유로운 상상이 공존하고 있었고, 인텔의 기업 문화도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전해야 합니다. 당신의 상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다면, 주장해야 합니다. 직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데이터와 논리가 중요합니다.” 그로브는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처음에는 불편했다. 자신의 상사와 논쟁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많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이스와 무어가 나서야 했다. 그들은 연구실에서 논쟁을 유도했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자신의 과오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무어의 의견을 반박하고, 더 나은 논리를 제시한 사람들이 내부에서 스타가 되었다. 무어는 틈만 나면 그런 사람들을 칭찬했다. 기업 문화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어는 깐깐한 사람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를 장려했지만, 반드시 데이터에 기반해야 했다. “생각이 아니라 보여주세요. 실험하고, 측정하세요. 데이터로 증명해요.” 이것은 의사결정을 빠르게 했다. 누구의 의견일 옳은지 파악하기 위해 회의실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의견 싸움이 사라진 자리에, 데이터에 의한 의사결정이 자리 잡았다.
노이스는 속도를 강조했다. 무어 자신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무어의 법칙이 통하는 세상이었다. 이에 따라, 노이스는 반복해서 강조했다. “80%의 제품을 오늘 출시하는 것이, 100%의 제품을 내년에 출시하는 것보다 낫다.” 경쟁자가 먼서 출시하면, 완벽한 제품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빨리 실패하고 빨리 배우며, 빨리 개선하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었다.
컴퓨터가 그저 빠른 계산기라는 인식을 넘어서려면 메모리 반도체가 필요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전원이 끊겨도, 일정한 전기적 신호를 보관할 수 있었다. 메모리가 있어야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당시의 메모리는 ‘자기 코어 메모리(magnetic-core memory)’ 방식이었다. 작은 철 고리(코어)와 자석을 엮어 만들었고, 코어 하나가 1비트의 정보를 저장했다. 수작업이 필요해서 비쌌고, 느렸다. 또한, 용량을 늘이기위해 부피를 키웠고, 그만큼 많은 전력이 필요했다. 조엘 케츠(Joel Katz)가 새로운 메모리 구조를 제안했지만, 복잡했다. 1비트를 위해 6개의 트랜지스터가 필요했다. 해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텍사스 시골에서 태어나 헛간에서 공부했지만, 전기공학 박사 확위를 받은 로버트 데너드(Robert Dennard, 1932~2024)는 IBM에 입사해 메모리 반도체를 연구했다. 그의 목표는 최소 트랜지터를 사용한 효율적인 메모리였는데, 어느날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 출원을 완료하고 인텔을 찾아갔는데, IBM에서 제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어를 찾아간 데너드는 1개의 트랜지스터와 1개의 커패시터만으로 1비트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커패시터에 전하를 저장합니다. 전하가 있으면 1, 없으면 0. 트랜지스터는 스위치의 역할만 합니다. 읽거나 쓸 때만 켜집니다. 커패시터의 전하가 누설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충전만 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Dynamic RAM, DRAM이라고 부릅니다.” 무어는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이해했다. 이것이야말로 게임체인저구나. 1970년 인텔은 DRAM을 출시했다. 1,103.1킬로비트가 하나의 IC 칩에 구현된 것이었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1972년, 1103 DRAM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IC 칩이 되었다. 새로운 메모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인텔은 메모리 회사로 성공했다. 그 즈음 또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전자 계산기의 새로운 공급처로 떠오른 일본의 기업, 비지콤(Busicom)이었다. 그들은 계산기용 칩 세트를 원했다. 12개의 맞춤형 칩.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페데리코 파긴(Federico Faggin)과 학부 과정부터 천재로 유명했던 테드 호프(Ted Hoff)가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들이 보기에 12개의 칩은 너무 복잡했다. 이를 개선할 아이디어가 필요했는데, 고심끝에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 올랐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무어에게 미팅을 요청했고, 바로 만날 수 있었다. 12개의 맞춤형 칩이 아닌, 하나의 범용 칩에 대한 설계를 제시했다. 중앙처리장치, 제어 유닛, 메모리 인터페이스를 하나의 칩에 넣는 대담한 설계였다. 무어의 대답은 간단했다. 즉시 해보라는 것이었다. DRAM을 출시한 지 1년이 지난 1971년 11월 15일, 인텔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2,300개의 트랜지스터, 4비트 프로세스, 740kHz 클럭 속도를 가진 Intel 4004. 세계 최최의 마이크로프로세서. 광고 카피는 이렇게 말했다.
“Announcing a new era of integrated electronics: A microprogrammable computer on a chip!”
(“집적 전자공학의 새로운 시대를 알립니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컴퓨터가 하나의 칩 위에”)
처음에 인텔은 4004가 얼마나 중요한지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들은 메모리 회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주문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계산기만이 아니었다. 교통 신호등 제어기, 엘리베이터 제어 시스템, 산업 로봇 등 응용 분야는 넘쳐났다.
1972년, Intel 8008. 8비트 프로세서
1974년, Intel 8080. PC 혁명의 시작
1978년, Intel 8086. X86 아키텍처의 탄생
무어는 깨달았다. 인텔의 방향은 메모리가 아니라 프로세서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1980년대를 거치며 인텔은 확고부동한 IC 칩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페어차일드의 DNA는 인텔로만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인텔을 거쳐 수 많은 IC 칩 기업들이 생겼지만, 클라이너 퍼킨스 같은 사람은 초기 투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시기를 지나, 수백 개의 벤처 투자사들이 생겼고, 은행들과 투자 회사들은 열심히 돈을 모아 혁신적인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자유로운 잡담과 치열한 토론, 눈부신 성공과 쓰라린 실패, 엄청난 수익과 자본 이익. 이런 이야기들이 이 골짜기에 하나하나 쌓여갔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유망한 청년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실리콘 밸리는 최첨단 산업의 생태계가 되어갔다.
1990년 6월 3일, 노이스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제 62세의 노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활발하고 유쾌한 혁신가였다. 그러나, 그는 이날 밤 호텔 방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손쓸 틈없이 사망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새로운 혁신을 전파하던 업계의 거장의 죽음치고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 천명이 참석했다. 실리콘 밸리의 모든 CEO가 온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들 모두는 노이스의 유산이었다. 오랜 동료이자 형제였던 무어가 추모사를 낭독했다.
“그는 단순히 IC 칩을 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일하는 방식을 발명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가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뢰가 통제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실리콘 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리콘 밸리 문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는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노이스가 떠난 후, 무어가 인텔을 이끌었다. 그는 2000년까지 인텔 회장을 역임했고, 이후에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인텔은 계속해서 혁신의 대명사였고,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다. 그러나, 인텔도 관료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0년 이후의 모바일 혁명에서 뒤쳐진 것이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인텔이 아닌 애플로 모였다. 인텔의 번영과 쇠퇴는 기업을 탐구하는 경영학 분야에 큰 과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노이스와 무어의 유산인 ‘혁신 DNA’는 실리콘 밸리에 여전히 남아 있다.
1957년 페어차일드가 시작한 팔로알토의 그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서있다. 그리고 2023년 역사적 건물로 지정되었다. 배신자 8인에 대한 작은 명판이 붙었다. 매년 수천 명의 방문객이 이 곳을 찾는다. 기업가들, 학생들, 관광객들. 그들이 찾는 것은 낡은 건물이 아니라, 가능성일 것이다. 여덟 명의 젋은이가 거대한 권위에 도전했던 이야기. 자유가 통제를 이겼다는 증거. 작은 시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작가는 삼성전자 연구소에서 반도체 설계를 담당한 후 다수의 다국적 화학 기업에서 신사업 설계와 글로벌 확장 전략에 집중했다. 친환경 기술혁신의 글로벌 사업화를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속 가능 사업 전략과 순환 경제 확산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고 컨설팅하고 있다. 또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면서 시민사회 단체와 함께 공동체의 기술 시민성과 회복 탄력성 향상 방법을 연구중이다. 주요 저서로 <기후위기+행동사전>,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혁신기술 마케팅 전략>, <화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