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SFET을 개발한 강대원 이야기
1960년 뉴저지의 벨 연구소. 29세의 한국인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혼자 일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동양인은 매우 드물어서, 그는 항상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강대원 박사. 그의 책상 위에는 실리콘 웨이퍼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얇은 산화물 층, 그리고 금속 전극. 옆 방에서는 이집트 태생의 동료 마틴 아탈라(Martin Atalla)가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강대원은 전압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만든 트랜지스터에 전압을 걸었다. +5볼트. 전류가 흘렀다. 전압을 0으로 내렸더니 전류가 멈췄다. 다시 전압을 거니 전류가 흘렀다. 완벽한 스위칭이었다. 그것도 전기장만으로 구현된 것이었다. 아탈라가 다가와서 작동하는지 물었다. “완벽해” 좀처럼 감정 표현이 없던 강대원이 환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으로 이민 온 2명의 청년 과학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날이었다. 그 유명한 쇼클리도 실패했던 것을 13년만에 두 명의 이민자가 해냈다.
전기장에 의해 조절되는 트랜지스터라는 의미로 ‘전계효과 트랜지스터(Field-Effect Transistor)’라고 불리는 새로운 소자가 개발되었다. 특히, 이들은 실리콘 기판 위에 산화막 층을 형성한 후, 사진 인화 공정에 의해 제작된 ‘Metal-Oxide-Semiconductor Filed-Effect Transistor(MOSFET)’을 성공시켰다. 기존 트랜지스터가 전자회로의 신호등이라면, 그들이 만든 모스펫은 일종의 지하차도였다. 덕분에 회로에 부품을 장착하는 것이 아니라, 기판을 직접 가공해 부품을 내재화할 수 있게 되었다. 페어차일드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개발된 평면 공정과 합쳐지면, 외부에서 만든 트랜지스터를 전자 회로에 부착하는 것이 아닌, 실리콘 기판 위에 직접 트랜지스터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실리콘 기판 위의 전자 회로가 깔끔해졌다. 모든 부품이 사진 공정을 거쳐 칩 위에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MOSFET이 없었다면, IC 칩이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서러운 세월을 극복한 이민자들이 역사를 바꾼 것이었다.
강대원은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평범했지만 강인한 여성이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지만, 부모님의 헌신 덕에 어린 강대원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과학책을 좋아했는데,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위인전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1945년, 조국은 해방을 맞았고, 강대원은 해방 몇 달 전에 불과 14세의 나이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해방 이후 바로 서울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쫓아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학교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195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강대원의 가족은 운 좋게도 부산으로 피난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19세가 된 강대원도 혼란스러웠다.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강대원의 재능을 알고 있던 그의 부모는 조용하지만 총명한 아들을 계속 격려했다. 다행히, 마음을 다잡은 그는 피난지에서도 학업을 이어갔고, 마침 그의 학교도 임시로 수업을 이어갔다. 1951년, 그는 최우수 성적으로 학부를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학교에 남아 교수들을 도와주면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게 전부였다. 2년 후에 전쟁은 끝났지만, 강대원은 그 사이 굳게 다짐했다. '더 나은 학자가 되기위해 미국으로 가야겠다.'
문제는 돈이었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미국 유학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부모는 필사적이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의 자식만큼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 어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아버지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관련 기관들을 찾아 다녔다. 힘든 시기였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강대원의 탁월한 성적을 알아본 사람들에 의해 장학금이 모였다. 1955년, 24세의 그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 동부의 오하이오 주로 향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그의 입학을 허가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체물리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어릴 때 읽은 페러데이와 맥스웰의 영향이 컸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그에게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 인종적 멸시 등의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었다. 그는 조용하고 사려깊은 성격이어서, 눈의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동료 학생들과 교수들은 그의 연구 능력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강대원은 주말에도 계속 실험실에 출근했다. 실험실에서 그는, 페러데이처럼 끈질겼고, 맥스웰처럼 총명했다. 마침 세상은 트랜지스터의 광풍이 불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분야였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쉼없이 공부했고, 미친듯이 실험했다. 뜨거운 찬사와 따가운 질시가 함께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59년, 미국에 온지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논문은 실리콘 표면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전계효과 트랜지스터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선택한 연구 주제였고, 후에 평생의 연구 방향을 결정했다.
이 분야를 전공한 학생들은 인기가 많았다. 우수한 논문을 쓴 강대원은 특히 더 인기가 많았다. 미국의 여러 연구소와 기업에서 좋은 제안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명확했다. 트랜지스터의 기원, 벨 연구소. 1959년 가을, 파란 하늘과 멋진 공원이 있는 뉴저지 머리힐(Murray Hill)의 벨 연구소를 방문했다. 입사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면접관의 질문은 간단했다. “여기서 무슨 연구를 하고 싶습니까?” 강대원의 대답도 간단했다. “전계효과 트랜지스터입니다.” 면접관은 살짝 놀랐다. “그것은 13년째 실패하고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1947년부터 쇼클리, 바딘, 브래튼이 시도했지만,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습니까?” 강대원은 대답했다. “정확히 그 이유 때문입니다. 13년 동안 실패했다는 것은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이었다. 벨 연구소 입장에서는 오랜 기간 표류하던 프로젝트의 적임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1947년, 바딘과 브래튼은 오랜 시간을 거쳐 전계효과 트랜지스터의 원리르 발견했고, 구현했다. 그러나, 소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쇼클리는 접합 방식의 트랜지스터를 개발해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들은 모두 노벨상을 받았고, 업계의 거장이 되었지만, 전계효과 트랜지스터에 대한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49년, 마틴 아탈라(Martin Atalla, 1924~2009)가 벨 연구소에 입사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카이로 대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미국 퍼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표면 물리학의 전문가였다. 마침, 실리콘이나 게르마늄의 표면을 깨끗하게 처리해 전계효과를 구현하는 것이 뜨거운 관심사였다. 그러나, 배율이 적은 현미경으로 미세한 표면을 다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투용 장검으로 사과를 깍아야하는 일이었다. 아탈라는 다르게 접근했다. '표면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면, 표면에 막을 입혀 보호하는 것은 어떨까?'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모래가 반짝이는 이유는 실리콘과 산소의 화합물, 즉 이산화실리콘(SiO2)의 단단하고 매끈한 표면때문이다. 아탈라는 산소를 가득 채운 반응기에서 실리콘을 가열했다. 표면에서 얇은 이산화실리콘 층이 자라났고, 표면에 의한 문제를 극적으로 줄였다. 산화물은 완벽한 절연체여서 실리콘 표면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했고, 불순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표면의 원자 배열을 안정화시켰다. 10여년의 연구 끝에, 1958년 아탈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실리콘 산화물에 의한 표면 상태의 안정화(Stabilization of Silicon Surfaces by Thermally Grown Oxides)>. 이 논문은 조용히 업계를 흔들었다. 페어차일드의 진 호어니가 이것을 읽고 깨달았다. ‘이 것으로 평면 공정을 만들 수 있어!’ 그리고,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강대원도 생각했다. ‘이것으로 전계효과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어!’
강대원이 더 좋은 제안을 뿌리치고 벨 연구소로 간 것은 대단히 전략적인 일이었다. 벨 연구소의 명성도 중요했지만, 그곳에는 아탈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벨 연구소에 합류한 후 강대원은 아탈라를 찾아갔다. “박사님, 저는 당신의 산화물 기술로 전계효과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탈라는 흥미를 보였다. “어떻게?” 강대원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습니다. “실리콘 위에 산화물을 성장시킵니다. 산화물 위에 스위치 역할을 할 얇은 금속 막(게이트)을 증착합니다. 게이트에 전기장을 걸면, 전기장이 산화물을 통과합니다. 산화물은 절연체여서 전기를 흐르게 하지는 않지만, 전기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전기장은 산화막 밑의 실리콘 표면에 영향을 미쳐 표면의 전화 농도를 조정합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금속-산화막-반도체(Metal-Oxide-Semiconductor)’ 순서의 구조였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아이디어였다. 둘은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두 이민자의 프로젝트는 벨 연구소 전체의 관심을 끌었다. 위대한 과학자들이 끝내 성공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중동과 동양에서 온 과학자들이 호기롭게 해결하려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심은 곧 사그라들었다. 실패했다는 소식만 들렸기 때문이었다. 역시 안되는 일이라는 의구심이 다시 대세를 이루었다. 강대원과 아탈라는 포기하지 않아다. 산화막의 두께를 미세하게 조절하고, 게이트 금속을 바꿔가면서 최적의 조합을 탐구했다. 오랜기간 이 아이디어를 다듬어온 강대원에게는 거듭된 실패가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그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식민 시대와 전쟁을 겪으며 어렵게 미국에 온 그의 인생을 볼 때, 이 정도의 난관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이집트 이민자로 온갖 설움을 간직한 아탈라의 의지도 꺽이지 않았다. 1960년 초 그들의 실험 노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실패는 데이터다. 실패가 쌓이면, 성공의 방향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지 점점 더 잘 알게 되었다. 곧 무엇이 작동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1960년 여름, 모든 조각이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100나노미터의 산화물 두께. 충분히 얇아서 전기장이 통과하지만, 또한 충분히 두꺼워서 절연성을 유지. 1,000℃의 건식 산화. 느린 성장이지만, 결함이 거의 없어서 고품질 산화막 생성. 알루미늄 게이트. 저온 증착 방법을 개발하여 산화막과의 반응을 차단. 그 외 불순물 도핑 공정 등이 모두 최적화되었다. 최적의 조합을 찾기 위한 과정, 강대원의 실패가 담긴 실험 노트는 이후 IC 칩 공정 개발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의 정밀한 실험과 꼼꼼한 노트는 그의 모국인 한국이 반도체 산업이 중심지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강대원과 아탈라의 성공 소식은 벨 연구소와 실리콘 밸리를 강타했다. 강력한 노벨상 후보라는 소문도 돌았다. 반면,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다. 분명 노벨상을 기대할 만한 발견이지만, 상용화하기엔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보였다. IC 칩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도 계속 제기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벨 연구소 자체에 있었다. 그들은 이미 다른 방식의 트랜지스터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생산 라인이 깔렸고, 사람들도 이미 뽑아서, 되돌리기엔 너무 위험이 큰 상황이었다. 새로운 기술은 기존 투자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다. 아무도 이런 결정을 하려 하지 않았다. 강대원은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신뢰성과 생산성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벨 연구소의 이런 결정이 산업의 지도를 바꾸었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첨단 산업의 주도권은 실리콘 밸리로 넘어갔고, 벨은 이후로 다시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이 즈음 페어차일드의 노이스와 무어는 IC 칩의 생산을 고민하고 있었고, 강대원의 MOSFET이 그들의 고민을 풀어 주었다. 미국 대륙의 양 끝단에 있던 천재들이 새로운 전자 산업의 시대에 시동을 걸었다.
초기 MOSFET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잘 작동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특성이 변했다. 대략 4~6주 정도가 지나면 문제가 발생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강대원은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시 연구실에 틀어 박혔다. 다행히 원인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범인은 나트륨 이온(Na+)이었다. 나트륨은 어디에나 있다. 사람의 땀에도, 공기 중에도, 실험실 장비에도. 강대원은 이 나트륨 이온이 실리콘 산화막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전기장에 의해 이동하고, 이것이 트랜지스터를 움직이는 전압을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해법은 모든 나트륨 오염원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모든 실험 장비를 스테인레스 스틸로 바꾸고, 사용하는 화학약품의 순도도 높여야 했다. 무엇보다 생산 라인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의 아이디어로 인해 현대의 반도체 클린룸이 탄생했다. 작은 먼지도 걸러내고, 모든 작업자들은 방진복을 입고 에어 샤워를 한 후에야 클린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강대원의 노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산화막 위에 보호막을 추가하여 나트륨 이온의 침투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인(Phosphate)이 도핑된 산화막(phosphosilicate glass)이 개발되었다. 1959년 벨 연구소에 입사한 후 약 4년이 지난 1963년, 강대원은 IC 칩 대량 생산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실리콘 밸리에서 강대원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있던 동부 뉴저지에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전문가들만 인정하는 훌륭한 과학자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성격과 잘 맞았다. 그는 조용하고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며, 모두가 우러러보았지만, 자신을 뽐내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의 관계자들은 그의 연구결과를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1963년, 한 때 전자산업의 거인이었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의 연구원들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것은 옛날 일이 되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MOSFET이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RCA의 법무팀은 재빠르게 벨 연구소를 찾아갔고, 강대원과 아탈라의 특허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N형과 P형 MOSFET을 이어 붙이면, 논리회로 구성에 큰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RCA의 프랭크 완라스(Frank Wanlass, 1933~2010)는 조용히 이런 발견을 발표했고, 또 하나의 혁명을 앞당겼다. 1964년, RCA은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현한 CMOS(Complementary MOS)를 출시했다. 초기 반응은 시원치않았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노이스와 무어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MOSFET에 의한 평면 공정에 열광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CMOS를 활용한 논리회로는 산업의 지도를 바꿀 혁명적인 것이었다. 즉시, 전체 엔지니어를 소집해 CMOS 세미나를 개최했고, 여기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메모리 IC 칩에 완벽히 어울린다.” 그 이후의 일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인텔은 산업을 선도했고, 번창했으며, 실리콘 밸리를 혁신의 용광로로 만들었다.
MOSFET의 발견 이후 계속 개선 작업에 몰두한 강대원과 달리 아탈라는 자신들을 우대하지 않는 벨의 처우에 실망했다. 그가 보기에 동부는 너무 차분했다. 반면, 서부는 한창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이에 1962년 벨 연구소를 사직하고 뭔가를 만들려고 애쓰는 HP(Hewlett Packard)에 입사해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후 1966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로 이직했고,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혁신을 이끌어냈다. 실리콘이 아닌 다른 반도체 물질들을 조합해 발광 다이오드(LED)를 연이어 발표한 것이었다. 그의 연구가 발판이 되어, 후에 얇은 디스플레이와 광통신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아탈라는 매우 지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1972년 Atalla Corporation을 설립하고, 데이터 보안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다. 그 사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탈라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라면 이런 변신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회사는 원격 개인 식별 번호(PIN)을 활용한 은행 자동화 장비(ATM)에 주목했고, 이를 지원하는 아탈라 박스(Atalla Box)를 출시했다. 현재 동네마다 있는 ATM 기기들을 생각한다면, 아탈라가 이 분야에서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후 그는 금융 보안 시스템의 개선에 집중했고, 이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강대원은 벨 연구소에 남아 연구를 계속 했다. 1992년, 61세가 된 강대원은 벨 연구소에서 은퇴했다. 거장의 은퇴식은 매우 소박했다. 오랜 동료들을 그의 뉴저지 집에 초대해 같이 케이크를 자르고, 축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의 요청에 그는 짧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는 단지 흥미로운 문제를 풀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은퇴 후의 삶도 단조로웠다. 교회를 다니고, 정원을 가꾸었다. 강대원은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강대원의 업적을 기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의 발견은 산업에서 너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2003년, 전기전자공학회(IEEE)는 그에게 전자공학 분야 최고의 영예인 ‘Medal of Honor’를 수여했다. 시상식에서 그는 IC 칩 산업의 발전과 한국의 성장, 그리고 아탈라 및 동료 과학자들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2010년 강대워은 미국 국가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 통계를 보면, 이런 상찬은 당연한 것이었다. 2017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생산된 MOSFET의 수는 약 10^21개 (1,000,000,000,000,000,000,000)이다. MOSFET이 발명된 1960년부터 2017년까지 생산된 MOSFET의 총 개수는 약 10^23개로 추산된다. 이것은 지구의 모래알보다 많고, 우주의 별과 비슷한 숫자이다. 단연코, 인류가 만든 가장 많은 인공 구조물은 MOSFET이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5월 16일, 뉴욕타임스에 작은 부고 기사가 실렸다. “Dawon Kahng, Inventor of MOSFET, Dies at 85” 4줄짜리 간단한 기사였지만, 누군가 그의 기사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이 과학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우리는 모두 매일 그의 발명을 사용한다. 스마트폰, 컴퓨터, 모든 전자기기. 강대원 없이 현대 문명은 불가능했다.”
작가 소개
작가는 삼성전자 연구소에서 반도체 설계를 담당한 후 다수의 다국적 화학 기업에서 신사업 설계와 글로벌 확장 전략에 집중했다. 친환경 기술혁신의 글로벌 사업화를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속 가능 사업 전략과 순환 경제 확산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고 컨설팅하고 있다. 또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면서 시민사회 단체와 함께 공동체의 기술 시민성과 회복 탄력성 향상 방법을 연구중이다. 주요 저서로 <기후위기+행동사전>,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혁신기술 마케팅 전략>, <화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