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프랑스 와인
호스텔에서 차를 타고 대형마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쌀과 빵, 물, 과일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한참 영업을 했던 까르푸가 눈에 띄자 우리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까르푸다!”를 외치는 바람에 서로 크게 웃었다. 겨울 세일을 맞아 대부분이 50%이상 할인을 하고 있어 당장 필요 없는 물건에도 여기저기 눈이 쏠렸다. 각자 필요한 물건을 사고 30분 후에 식료품 코너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두리번거리다가 깜빡 늦었다. 그녀는 여러 종류의 쌀을 찾아들고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나라 쌀하고 가장 비슷한 걸 사야겠죠? 통통하게 생긴 거요.”
“네, 그럴 것 같아요. 길쭉한 쌀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이 속이 비어서 뻥튀기를 먹는 것 같더라고요.”
그녀가 키득키득 웃으며 500그램짜리 쌀을 수레에 담았다. 까르푸를 보고 반가워 서로 크게 소리치고 웃은 덕분에 약간은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미 쇼핑 수레엔 내일 아침에 먹을 바게트 빵과 잼, 치즈, 오렌지주스, 물 등이 들어 있었다.
“오늘 축하 건배라도 가볍게 어때요? 프로방스엔 좋은 와인이 많다고 들었어요.”
“좋아요, 근데 저도 와인 잘 몰라요. 많이 마시지도 못하고요. 달달한 걸로 겨우 한두 잔 정도 마셔요.”
“저도 그래요. 아까 지나오면서 봤는데 와인코너가 엄청나더라고요. 같이 가 봐요.”
과연 와인의 도시다웠다. 우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양의 포도주 앞에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간간히 영어도 있었지만 대부분 프랑스어로 표기된 것들이라, 우리 입맛에 맞는 와인을 찾기가 영 어려웠다. 서울서 김서방 찾기였다. 매장 직원도 보이질 않았고 선반에 빼곡한 와인을 들었다 놓았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코너 끝에서 와인을 고르고 있는 프랑스 여자가 한명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손짓 발짓과 와인을 마시고 씨익 웃는 내 표정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이 신중한 태도로 선반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프랑스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 프랑스 여자는 오랜 고심을 마치고 두 종류의 와인을 꺼내 이리저리 살피며 혼잣말을 했다. 뭐든 괜찮다는 의미로 미소를 띠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쪽 와인도 선뜻 권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갑자기 등 뒤의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애인인지 남편인지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다시 내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프랑스 여자는 그 남자와 다시 와인에 대한 심각한 토론을 시작했다. 여자가 선택한 와인을 두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던 남자는 그것을 원래 자리로 가져다 두고는 새로운 와인을 찾기 시작했다.
이방인에게 프랑스 와인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려는 프랑스인의 드높은 자부심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들이 서로 와인 취향이 다른 데서 오는 의견 대립일까? 나는 상황이 이렇게 오랫동안, 진지하게 이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간단하게 평범한 와인 하나 추천해줬으면 했던 것뿐인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 됐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아닌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와인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는지, 한참 후 남자는 다시 새로운 와인 두 병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여자도 남자의 선택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두 연인의 아버지로 보이는 백발의 멋진 신사분이 새로운 패널로 합류한 것이었다. 프랑스 여자는 노신사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고 나는 어색한 웃음과 눈인사를 건넸다. 프랑스 여인은 자신이 처음에 선택한 와인 두 병을 다시 꺼내 노신사에게 보여주고 그녀의 애인은 자신이 새롭게 고른 와인 두 병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노신사가 또 다른 와인을 선택하여, 새로운 국면의 토론이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행히 노신사는 남자의 와인 중에 한 병을 골라 우리에게 트로피처럼 수여했다. 매우 짧고 명쾌한 결론이었다. 나는 와인을 추천해 준 것에 대한 감사도 감사지만 우선 긴 망설임과 토론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준 것에 대해 땡큐와 메르시를 번갈아가며 연발했다. 그녀와 나는 냉큼 와인을 사가지고 도망치듯 서둘러 마트를 빠져나왔다. 자동차로 돌아와, 차문을 닫은 후에야 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내내 와인 이야기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고민 끝에 그들이 골라준 와인의 맛은 최악이었다.
이제껏 우리나라의 대형마트에서 만원도 되지 않은 가격에 산 어떤 와인보다 몹쓸 맛이었다. 그렇지만 작은 냄비에 지은 2인분의 밥과 구운 김, 김치, 라면, 그리고 이야기는 풍성하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