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러 유럽에 간건 아닌데..16화

녹색 신호등의 이면

by 배종훈

5시에 드골광장 회전목마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폴 세잔과 에밀 졸라가 자주 찾았다는 레 뒤 가르송 카페를 찾아가 노천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고 플라타너스의 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을 얼굴 가득 받고 있으니 나른해졌다.

레뒤 가르송 카페에서


눈을 감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의 발소리, 다른 테이블의 수다와 웃음을 들었고, 점원이 들고 지나가는 쟁반 위의 신선하고 진한 에스프레소향을 맡으며 여행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니 카페 앞 도로에 있는 작은 건널목 신호등 녹색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도 신호등이 있는 것 같다. 녹색불이 켜져 거칠 것 없이 달릴 때도 있지만, 빨간불이 켜지면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어야만 한다. 누구든 자신의 삶에는 녹색불만 켜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 신호등이 녹색불만 계속 된다고 해도 사는 게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숨차고, 바쁘고,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겠지. 녹색의 이면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놓치게 되는 것이다. 또 내 앞의 신호등이 녹색이면 누군가의 신호등은 빨간불일 수밖에 없다는 순리도 까맣게 잊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을 위해 평생 빨간 신호등 앞에 서 있어야 했던 사람들의 진심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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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고 있는 거리 풍경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 있다. 건물의 반은 어둠으로 반은 노을로 노랗게 물들고 있는 풍경. 찬란한 색의 조화에 넋을 놓고 걷다보면 얼마 가지 못해 걸음을 멈추게 된다. 가다 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되는 느린 걸음. 해질녘에 나타나는 나의 보행 속도다.

거리 바닥에 표시된 ‘세잔 아뜰리에’ 표식을 찾으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중심가를 벗어나 한적한 길로 들어서 있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며 가끔 뒤를 돌아본다. 멀리 엑상프로방스도 붉게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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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아뜰리에 마당은 겨울의 기운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낙엽이 가득한 바닥에 놓인 철제 의자는 더 차갑고 쓸쓸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아뜰리에 건물을 둘러싼 작은 산책길을 걷기도 하고 세잔과 관련된 영상이 상영되는 미디어실에 앉아 짧은 홍보영상을 살펴보고, 그가 남긴 정물화와 풍경화 화첩도 살펴봤다. 하지만 세잔의 흔적을 찾아온 여행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무엇보다 엑상프로방스의 해질녘 풍경이었다. 그 순간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아뜰리에 입구로 그녀가 들어섰다. 높은 곳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 결이 같지 않을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녀도 내가 이곳에 앉아 있으리라고 짐작했다는 듯 웃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더 붉고 진하게 물들어가는. 세잔도 매일 이 순간을 보며 하루를 마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그림을 그렸겠지.


여행자의 하루가 깊어지면서 그리움이 또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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