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진짜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세비야에 있는 스페인 광장을 찾아 걸으며 스페인에 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생각을 했다. 스페인에는 스페인 광장이 왜 그리 많은 것일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산타크루즈 데 테네리페 등뿐 아니라 심지어 스페인이 아닌 로마에도 스페인 광장이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답을 찾지 못하고 세비야 광장 앞에 도착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여러 스페인 광장 중에 가장 아름다운 광장은 아무리 살펴봐도 세비야가 최고였다.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 바로 앞에는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있다. 왕비였던 마리아 루이사가 산 텔모 궁전의 정원 절반을 세비야에 기부하여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오페라의 도시답게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건물도 로시니의 오페라〈세비야의 이발사>의 무대였다. 루이사 공원을 돌아보면서 한참을 걸어야 넓은 스페인 광장을 만나게 된다. 스페인 광장의 주건물은 1929년, 이베르 아메리카 박람회 장소로 쓰기 위해 건축된 것이었다. 넓은 광장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고,인공적으로 만든 강물이 광장을 감싸고 흐르고 있었다. 강 뒤로 아름다운 반원형의 주건물이 있는데 설명을 듣지 않는다면 궁전으로 보이는 게 당연할 만큼 크고 화려했다.
겨울이었지만 한낮의 태양은 역시 스페인다웠다. 더운 날씨에 겉옷을 벗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계단 중간쯤에 앉아 가만히 햇볕을 쬤다. 로마의 스페인 광장처럼 특별한 이야기는 없지만 잉크를 풀어 둔 푸른 하늘과 적당한 햇볕,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좋아하는 음악이 있는 세비야 스페인 광장은 내가 기억하는 스페인 광장 중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예약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플라멩코 공연장에 도착했다. 밝게 불을 밝힌 공연장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사진에 담고 스케치를 했다.
기타 연주가 시작되고 음의 높이가 점점 높아졌다. 무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멈춘 듯 섰다.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애틋한 눈빛과 작은 손놀림이 플라멩코의 순간을 그리려 했던 내 마음을 가져가 버렸다. 바닥을 구르는 발놀림에 멍하니 그녀의 춤에 빠져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춤에는 슬프다, 애절하다, 감동적이다 등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너머의 것이 있었다.
플라멩코는 춤,노래,연주의 종합예술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공연이라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세비야 등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다. 집시들이 살던 동굴집에서도, 전문 공연장에서도, 심지어 작은 마을의 술집에서도 볼 수 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그라나다에서도 플라멩코를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플라멩코는 세비야에서 보고 싶었다. 세비야는 이번 여행의 동행과 헤어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는 내일 아침 세비야에서 열차를 타고 포르투갈로 들어가고 나는 남은 스페인 여행을 더 할 생각이었다. 호텔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예약하고 거리가 좀 있었으면 걷기로 했다. 관람료에 음료가 포함되어 있어 샹그리아 한 잔을 주문했다. 공연은 사진 촬영이나 비디오 녹화가 되지 않는다고 유의사항을 적은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여행 책자에도 자주 나오는 곳이라 그런지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이 꽤 눈에 띄었다.
사진 촬영은 불가능하지만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상관없다는 웨이터의 말을 듣고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잠시 후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위엔 기타 연주자 둘과 한 남자만 서 있었다. 박자에 맞춰 남자가 발을 구를 때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촛불이 흔들렸다. 모든 공기는 무대 위 남자의 발 끝에 모이는 것 같이 팽팽했다. 기타와 발 구름이 빨라질수록 좁은 무대가 점점 거대한 공간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여자 무희의 공연과 단체 공연 등이 이어졌지만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첫 번째 그 남자였다.
공연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중에 동행과는 아무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공연의 여운에 빠진 것인지 헤어져야 하는 순간에 대한 아쉬움인지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들어간 숙소에서 마지막 와인이라며 부딪친 것이 한 잔, 두 잔 늘어 결국 밤을 새우고 새벽에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고 멈추었다.
그날의 플라멩코는 음악도, 무희의 움직임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남자의 눈빛, 발을 구르는 진동만은 심장 박동처럼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