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의 작가인 서머싯 몸이 가장 매력적인 도시를 꼽은 그 길. 바로 람블라스 거리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시작해 콜럼버스 기념탑이 있는 파우 광장까지 이어진 약 1km의 길이다. 원래 하천이었던 곳을 매립해 만들어 거리 이름이 아랍어인 ‘Raml’에서 유래했는데 ‘강’, ‘물이 흐른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바닥에는 물결무늬 블록이 깔려있어 운치를 더했다. 가장 뜨거운 8월, 무성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노천에 펼쳐진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이 여행자들의 가슴을 더욱 뒤흔들었다. 복잡한 거리를 싫어해서 대도시를 되도록 피하려 하지만 람블라스 거리는 그 혼란함이 매력인 것처럼 보였다. 거리의 화가들과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행위예술가의 모습도 멋졌다.
그래서였을까? 람블라스 거리의 풍경에 완전히 매료된 나는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분명 잠시 넋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유럽의 복잡한 대도시에서는 특히 소매치기와 가방 도둑 등을 조심하라는 수많은 책의 주의사항과 여행자들의 경험담을 잊지 않고 여행 내내 어디서나 가방과 카메라 등의 소지품에 신경 쓰고, 현금과 카드 등은 앞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하지만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우디의 건축물과 멋진 가로등, 거리의 장식과 사람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이 우선 내 정신을 반쯤 빼앗았고, 나머지 절반은 지난 여행 기간 중 우려했던 상황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느슨함이 빼앗아갔다. 이쪽저쪽 정신없이 감탄하며 카메라로 촬영을 하다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실내 카페로 들어섰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안경으로 바꾸려고 뒤로 돌려 둔 작은 가방을 앞으로 가져왔는데 가방이 열려 있었고 안에 있던 선글라스 케이스가 사라지고 없었다.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어느 순간이었는지 몰랐다. 누군가 내게 가까이 접근한 기억도, 부딪치거나 한 일도 없었는데 대단한 솜씨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행 기간이 아직 일주일 정도가 남았는데 여분의 다른 안경이 없이 도수가 들어간 선글라스뿐이었다. 낮이건 밤이건 선글라스를 쓰고 남은 기간을 보내야 했다.
우선 안경을 맞추는 게 급해 가까운 안경점을 찾았다. 그러나 안경 제작 기간은 빨라야 5일이라고 했다. 몇 군데를 다 돌아봐도 상황은 같았다. 오늘 주문을 하고 프랑스에서 렌즈를 제작해 오면 그 시간이 가장 빠른 것이라고 했다. 헉! 소리가 자동으로 나왔다. 바르셀로나에서 여정이 겨의 하루 남았는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안이 없었다. 길가 벤치에 앉아 생각을 해봤지만 잘 때 빼고 선글라스를 끼고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오전에 헤어진 일행들로부터 문자가 왔다. 저녁 무렵 내가 차를 주차장에서 빼서 구엘공원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복잡한 대중교통에 장시간 도보로 지쳤는지 람블라스 거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이 버거운 모양이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다. 이미 잃어버린 안경은 어쩔 수 없었고 남은 시간 가우디의 건축물을 돌아봐야 했다. 저녁에 일행을 만나 오늘의 소매치기 사건과 앞으로 벌어질 하루 종일 선글라스를 써야 하는 충격적이고 재미난 이야기를 해줄 생각에 웃음이 났다.
포기할 것은 빨리 버려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이 날의 바르셀로나 사건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나와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구엘 공원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주차장에 출입구로 들어가려면 발권한 주차권이 있어야 했다. 아침에 일행들과 헤어질 때 여행 예산을 담당하는 동료가 주차권을 소지했고, 나는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당연히 오후에 람블라스 거리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주차장에서 나오는 사람도 들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일행은 구엘 공원에 도착했는데 너무 지쳐 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오기 힘들다고 했다. 위험하지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자동차가 들어가는 길. 자동차가 나가고 들어올 때 울리는 경광등이 켜지지 않은 것을 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지하로 뛰어들어갔다. 일을 하고 있던 관리인과 부딪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욕도 실컷 먹었다. 그래도 일단 들어왔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음은 주차권을 다시 발급받아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관리소를 찾아 손짓 발짓해가며 겨우 설명을 했고 마침내 주차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것은 거의 탈출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하루 종일 다녀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설명을 마치고 차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 등이 축축할 정도였다.
구엘 공원은 바르셀로나 시가지와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정말 멋진 곳에 있었다. 해질 무렵 자연과 어우러진 공원을 거닐다 보니 오늘 하루 겪은 이런저런 사고는 그냥 재미있는 일들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 밝은 햇살 아래 반짝이는 타일 모자이크와 조각, 독특한 벤치 등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가우디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구엘이 왜 다른 곳을 모두 제쳐두고 이곳에 묻히길 바랐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가우디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친구 구엘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구엘은 자신의 돈으로 가우디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가우디의 천재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가우디가 원한다면 수익성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를 지지하고 비용을 지불했다. 아무리 가우디가 뛰어난 천재 건축가라고 해도 자신을 무한 신뢰하고 지지하는 친구 구엘이 없었다면 그 결과를 우리가 이렇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가우디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지지해 준 구엘을 생각하며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교사라는 직업도 만족할 만큼 뛰어난 결과를 보이지 못하면서 불교를 쉽게 전하는 만화와 그림을 그리겠다고 시작한 게 13여 년, 여행을 담은 그림을 통해 여행이 사람들에게 주는 에너지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회화 작업이 8년이다.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해 허덕이고, 흔들리고 있지만 말없이 지켜보고 지지하는 가족과 주변의 친구들이 있기에 내 부족한 작업도 지속되고 있음을 새삼 떠올렸다. 내가 이렇게 스페인 구엘 공원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그들의 무한한 응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노고와 응원을 위해서라도 내 작업과 신념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을에 빠져 있을 때 급하게 전화가 울렸다. 문자로 중요한 용건만 주고받던 일행의 전화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 터졌음을 의미했다. 전화기 너머 일행의 목소리는 매우 급했다. 주차해 둔 우리 자동차가 견인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날다시피 뛰어서 주차해 둔 곳으로 달려갔다. 구엘 공원에 들어올 때 시간도 늦은 데다 여행객도 거의 없으며, 잠시 둘러보고 나갈 것이란 생각에 근처 골목에 주차를 했다. 정식 주차장은 아니었지만 바닥에 주차구역이 그려져 있어 한 시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낮에 그런 허술함과 방심이 소매치기를 당하는 상황을 불러왔음을 반성해 놓고 겨우 한나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 자동차가 견인되고 있는 모습은 동네 구경거리였다. 마을 주민들과 택시 운전사들, 여행객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고 일행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차는 견인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견인자동차에 실리기 직전이었다. ‘아임 쏘리’와 ‘페르돈’을 수 십 번은 말한 것 같다. 잠시 주차한 것이고 바로 나가려고 했다는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고 견인 담당자는 심지어 영어도 못 알아 들었다. 내게 견인된 자동차가 보관되는 약도와 주소, 전화번호가 남긴 안내문을 건네는 그 사람의 표정도 딱하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우리는 눈 앞에서 자동차가 실려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구엘 공원 안에 있는 나머지 일행을 연락해 공원 입구에 모였다. 모두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즐거운 여행담으로 회자될 것을 알기에 웃는 게 전부였다. 이미 자동차는 가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택시를 타고 견인 보관소를 찾아가 벌금과 보관료를 물고 자동차를 찾았다. 낮에 소매치기를 당해 안경을 잃어버리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사연과 앞으로 되도록 밤 운전을 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길 나누며 숙소인 타라고나의 캠핑장으로 출발했다. 선글라스를 잃어버린 이야기, 주차권이 없어 고생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렌터카를 견인당한 것까지 오늘 겪은 세 가지 이야기를 다시 나누며 돌아가는 길은 웃음으로 가득해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캠핑장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텐트에 누우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텐트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루 만에 10년을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오늘 일들을 돌아봤다. 피식피식 웃는 것 말고는 어찌할 수 없는 가장 긴 하루였다고 여행 기억 창고에 담아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