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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Dec 29. 2019

시간이 눈처럼 소복소복 쌓인 절 , 부안 내소사

#1

온전한 겨울은 눈이 펑펑 쏟아져야 완성된다는 생각을 했다. 함박눈이 소복히 내린 오래된 절을 걷고 싶어 찾은 곳은 내소사였다. 대학을 갓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받은 첫 월급으로 고등학교 동창들과 여행을 가서 엄청난 눈을 만난 곳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모든 것을 백(白)으로 덮은 고요함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그 고요함이 당혹스러웠고, 감동적이었으며, 편안했었다.  


그냥 거기에 자리 잡고 있을 마당과 석탑, 법당을 쌓인 눈의 무게로 휘청하며 소리를 내는 풍경을 들으며 걷고 싶었다. 그냥 무작정 걷고, 달을 보고, 까만 밤을 하얗게 만드는 눈을 맞으며 저물어가는 한해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2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눈 위로 달을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댓돌에 쪼그려 앉아 푸르스름한 달을 만났다. ‘제가 여기 계신 달님 보러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하니 달은 역시 푸른 웃음을 지었다. 다시 방에 들어가 남은 잠을 자기엔 아쉬운 새벽이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법당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이 따뜻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지붕에 쌓인 눈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던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고 가만히 누워 눈을 들었다.


#3

어제 오후 도착했을 때부터 대웅보전 창호의 꽃무늬에 마음을 빼앗겼다. 색이 모두 바래고  나무결마저 오랜 시간을 덮고 있었지만, 그 정교함이 놀라웠다. 창호를 만든 목수가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절집에 있는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 폐사지에도 부서진 석물이나 석탑, 당간지주는 남아 그 자리의 시간을 이야기해준다. 부처의 얼굴이 남아 있지 않은 석불, 흐릿한 연꽃문양, 날개의 일부가 남은 비천상 등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었을 과거의 시간을 상상하고, 내 마음대로 선명했던 그 모습을 그려 넣어본다.


가만히 창호에 손을 올렸다. 볕을 받은 나무꽃의 기운이 손을 타고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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