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렘과 즐거움을 더욱 크게 주는 것은 예상치 않은, 예측이 불가능한 여행이 아닐까?
경주 기림사에서의 하룻밤은 어쩌보면 굉장히 즉흥적으로 결정되었다. 원래도 철저하게 계획된 여행을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여정도 이유도 없이 가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하루 전날 기림사에 템플스테이를 예약하고 열차를 예매했다. 그냥 경주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덜컥 예약이 끝나니 걱정이 뒤따라 들어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출발 직전의 비행기에 태워진 기분이었지만 마음이 홀가분했다.
#2
혼자 떠난 여행의 최대 장점은 침묵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말을 줄이면 생각이 깊어지게 마련이고 생각이 깊어지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작은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살펴보게 된다.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을 하나라도 줄이면 그만큼의 여백으로 자신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긴다. 소리없는 법당에 앉아 있는 무료함이 따뜻하고 편안했다.
#3
길이 없던 곳에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세상의 길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의 걸음 아래 있었다. 우리가 매일 걷는 동네의 골목길도 역사를 따져보면 수 백년, 수 천년의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길이 세계문화유산이 되거나 전 세계인이 열광하며 찾는 곳은 아니다. 특별한 길이 되는 것은 그 길에 담긴 의미와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만든다.
신라 문무왕의 장례의 길이었고,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을 때 걸었던 왕의 길이 템플스테이 숙소 뒤편에 있었다. 한적한 숲길을 걷으니 2010년 처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첫걸음을 내었을 때 두근거렸던 순간이 다시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세상의 소리를 모두 삼키는 용연폭포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불면(佛面)바위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4
잠깐 누워 있으려 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에 눈을 떴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파랗던 하늘과 강렬했던 태양은 물러서고 있었다.
걸음은 서둘러 걷었지만 내가 만드는 걸음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냥 이대로 오래 걷고 싶었다.
갑자기 마음이 동해 달려온 기림사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다 특별한 것만 같았다. 하루를 쪼개고 쪼개 사느라 허덕이면서 막상 이 느긋한 순간에 일상의 소중함, 특별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