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0년쯤 전에 서울 성수동에 살았었다.
요즘 가장 핫하다는 그 동네다.
그때는 공장지대였는데 공장들이 점점 빠져나가며 막 슬럼화되기 시작하는 때였다.
남편과 나는 거기서 유명 브랜드 제과 체인점을 했다. 첫 자영업이었다.
빵집은 매일 6시에 문을 열어 새벽 1시가 돼서야 문을 닫았다.
돈은 제법 잘 벌었던 것 같은데 남편과 나는 거의 매일 싸웠다.
길고 쉼 없는 노동에 지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빠져나가는 공장들을 볼 때마다 지금 장사가 그런대로 될지라도 우리도 언제 망할지 두려움에 하루하루 버티는 날들이었다.
사실 우리는 둘 다 금수저는 아니라도 은수저 정도 되는 가정에서 자라 아르바이트도 한번 안 해보고 시집에서 사업자금을 지원해 줘서 차린 체인점이었다.
그런데 돈을 번다는 것이 원래 그렇게 힘들고 미래가 불확실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을 그때는 전혀 몰랐다.
나는 돈은 거저 가만있어도 누가 주는 것이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최소한의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남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나는 다섯 살쯤 된 아들을 제대로 멋지게 키워내는 게 최고의 꿈이었는데 현실은 하루하루 손님들 치다꺼리하느라 밥도 제대로 먹질 못했다. 아이에게도 아침으로 케이크를 먹였다. 집 주변은 공장지대라 좋은 보육 시설도 없었다. 한강을 건너 강남에 유아를 위한 영어유치원이 처음 생겨 내가 직접 일주일쯤 데리고 가며 보내다가 나도 지치고 아이도 흑인 선생님만 보면 자지러지게 울어서 그냥 관두고 말았다.
결국 빵집 근처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그냥 놀게만 하는 놀이방에 보냈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일 년에 설날과 추석 당일 딱 이틀만 쉬는, 전산 같은 게 잘 발달하질 않아 현금으로만 결제하던 당시에 아르바이트생에게 매장을 맡길 수가 없어 남편과 내가 교대로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나마 가족이 외식이라도 하려면 영업이 끝난 새벽 한 시 이후여야 가능했다.
우리는 잠시라도 그곳을 벗어나 좋아하는 안주에 소주라도 한잔하고 싶었지만 그 시간에 영업을 하는 식당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데리고 술집을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겨우 가게 된 곳이 마장동 포장마차 곱창집이었다.
포장마차 바깥에서 연탄불에 돼지곱창을 직접 구워 우리는 먹기만 하면 됐었는데 그 곱창집 할머니가 곱창을 내어주고 자신은 천막 밖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모습이, 그리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곱창집을 하기엔 뭔가 세련되고 예민한 느낌의 할머니였는데 자주 가는 바람에 단골이 된 우리와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이제 마지막 손님인 우리가 다 먹기를 기다리며 마감준비를 하던 할머니에게 "담배를 정말 맛있게 피우시네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몹시 무안해하며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 연탄불에 고기 구워주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했다.
"끊어야 되는데.. 내가 두 딸을 아주 잘 키웠어요.. 하나는 선생이고 하나는 이대 미대 나와 방송국에서 무대설치하는 피디"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대단하시다"라고 했는데 사실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왜 그 나이까지 이 고생을..
할머니도 그걸 느꼈는지 "애들이 맨날 장사 접어라 담배 끊어라 하는데 그럴 수가 있어야지.."라고 뒷말을 흐렸다.
나는 얼마 전 상전벽개한 성수동과 마장동을 가보았는데 예전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거리와 재개발로 달라진 모습만 보고 왔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담배를 피우던 할머니와 어린 아들과 젊은 부부가 새벽녘 포장마차에서 곱창안주로 소주 한잔 기울이던 그 시절이 왜 그리 낭만적으로 추억되는지 모르겠다.
나도 두 아들을 나름 잘 키워냈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미래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리고 각종 자영업을 두루 거치며 IMF와 금융위기와 코로나를 겨우 이겨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대책 없는 불안한 미래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나도 예전 그 할머니처럼 담배 한 개비와 같은 것에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돼 있음을.. 자식을 잘 키워도 여전히 고생을 면치 못하는 그 할머니의 흐린 뒷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