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경찰은 금방 왔다. 학력고사 날이니 경찰이 총동원되어서 여기저기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으니 사고 전달은 순식간에 되었을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경찰에게 수험표를 내밀었다. "저 시험 보러 가야 돼요." 그는 나를 보더니 일단 상처 치료부터 받으라고 했다. 경희대가 코앞인데, 바로 옆 경희의료원 응급실로 가라는 거였다. 다른 경찰들에게 무전을 쳐보더니 여의치 않았던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서, 이 학생 경희 의료원 응급실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질렀다.
5분도 안되어 경희 의료원에 도착했다. 수험표를 내밀고 피가 흐르는 채로 응급실에 들어가니,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의사가 바로 와서 내 얼굴을 꿰매 주기 시작했다. 턱 밑으로 상처가 꽤 깊게 난 것 같다. 중간에 직원이 와서 의료보험 카드가 있냐고 물었다. 있을 리가 있나.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얼굴이 너무 아파서 대답하기도 힘들었지만, 대답하기도 싫어서 그냥 수험표만 내밀었다. 어느 학교냐, 주소가 뭐냐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서 그냥 묵묵 보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긴급 처치가 되고 나는 시험장까지 뛰어가야 했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치료비 계산은 안 했지만, 이날 아침 모든 수험생에게는 "저 시험 보러 가야 돼요"라는 한마디 말 하나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 매직 파워가 있어서, 응급실 문을 그냥 나설 수 있었다.
경희대에 들어서서는 역시 수험표를 들이밀면서, "저 어디로 가면 돼요?"를 외치면서 시험장을 찾아갔다. 시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옷에 피가 묻은 수험생이 얼굴에 붕대를 하고 달려오니 다들 잘해주었다. 시험 감독 선생님처럼 보였던 어떤 분은 말로 어디로 가라고 설명해 주다가, 답답했는지 그냥 같이 뛰어 주기도 했다.
시험장에는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다들 나를 한 번씩 흘낏흘낏 쳐다보긴 했는데, 다들 긴장해서 인지, 아무도 나에게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중간에 감독관 한 분이, 아침에 사고 난 거냐고 물어서, 예라고 대답한 게 전부였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얼굴은 욱신욱신 쑤셔오고, 진통제를 먹어서인지 정신이 몽롱해지기도 했다. 보통 2교시 수학, 사회 과목은 제일 편안한 시간이었는데, 이날은 머리가 아주 복잡해서 문제를 풀 마음이 안 생겼다. 사장님이나 선생님 상태는 어떠실까? 경찰도 다 왔을 텐데 혹시 발각된 것이 아닐까? 머리가 복잡했다.
시험을 다 보긴 했지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마무리하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일 면접장에는 가야 하나? 여러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호텔 방으로 전화가 왔다. 선생님이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고 했다. 사고 직후 상대방 차에서 구호 조치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피를 흘리는 것은 보았는데 괜찮아 보여서 일단 안심이었다고 했다. 사장님은 어떠신지, 내일 면접은 예정대로 가냐고 물으니, 사장님은 부상이 좀 있는데,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내일 면접은 당연히 예정대로 가는 거라고 했다. 내일 아침에 자기가 와서 체크 아웃 하고, 면접장에 같이 가 준다고 했다.
대학 입시 면접이란 게 그때는 워낙 요식적인 것이라 별로 부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면 어떨까 걱정은 했었다. 예를 들어 성장 환경이나 가족 관계, 대충 둘러대면 되지만 혹시 거짓말이 탄로 나면 어떡하냐는 그런 걱정 말이다.
조금 있다가 선생님이 도착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방 차는 택시였는데, 그 택시가 중앙선을 침범해서 좌회전을 시도했는데, 택시기사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승객은 중상이었다 했다.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턱이 욱신거리고 아침에 꿰맨 부분이 너무 아파서 입을 제대로 벌릴 수 없었다. 선생님이 죽을 먹어보라고 권했다. 호텔에서 전복죽이란 걸 처음으로 먹어보게 되었다. 난 그때만 해도 죽은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을 때 엄마가 해주시던 미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건 그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얼굴이 더 심하게 부어 있었다. 턱 밑을 꿰 멘 것 말고도, 마치 한 방 크게 얻어맞은 마냥 왼쪽 눈퉁이가 부어 있었고 안구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고 첫날은 몰랐는데, 다음날은 왼쪽 무릎이 많이 불편해서 절룩거렸다. 아마 사고 순간 무릎이 기사석 뒤쪽에 강하게 부딪혔던 모양이다 (후유증으로 그 이후 십여 년 동안 무릎 때문에 고생 좀 했다) 막상 면접장에 그 몰골을 하고 나타나니, 면접 교수들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건가? 어제 시험 보러 오다가 바로 요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허허 참, 고생이 많다. 가서 쉬어라. 이게 다였다.
면접이 끝나고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사장님은 좀 더 안정을 취해야 되고, 물리치료도 해야 해서 당장은 만날 수는 없는데, 이 와중에도 사고 처리를 깔끔하게 했다고 대단한 분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고 처리란, 경찰에게 적당히 돈을 먹여서 사고를 당한 사람이 수험생 "희찬"이가 아닌 "신원 미상의 수험생"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응급실 치료비에 대해 물으니, 그건 선생님이 직접 어제 오후에 가서 현찰로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했다. 수험표와 위조 주민등록증은 원래 사장님에게 반납할 예정이었는데 선생님에게 돌려주었다.
"그나저나, 그 몸으로 시험은 잘 봤냐?"
"저도 별로 자신이 없어요."
"그래, 워낙 큰일이 있었으니, 이번은 네 잘못이 아니고… 아무튼 두고 보자."
그런데 문득 든 생각, 이대로 집에 들어간다면? 어머니가 내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 거짓말도 정도껏이지, 아마 사실을 다 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그 얘기를 하니, 내가 원하면 바로 집으로 가지 말고 근처 병원에서 안정하는 의미에서 한 4-5일 입원했다가 들어가는 게 좋다고 하셨다.
"그 병원에서 턱에 꿰맨 실밥도 떼면 되겠네."
"그런데 뭐라고 말씀드리죠?"
"내가 잘 말씀드리마. 경운기 타고 어디 가다가 조종을 잘 못해서 논구렁에 빠져서 다쳤다고 하면 되겠네."
"경운기 타다가 그렇게 되기도 하나요?"
"그럼 인마, 경운기도 꽤 빨라. 조종 잘 못하면 그렇게 돼."
계속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후기 학력고사는 전기에 비해서 월등히 쉽게 출제되었다는 평가를 뉴스에서 보았다. 평균점수나 커트라인이 15점에서 20점가량 상승할 거라는 예측도 있었다. 아직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 시험 후 열흘정도 지나서 ㅎ사장을 ㅈ선생과 함께 다시 만났다. 그는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고 거동이 조금 불편해 보였는데 현재 물리치료 중이라고 했다.
그의 소식통에 의하면 내 점수가 많이 낮게 나왔다고 했다. 경희대 의예과의 커트라인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부상 투혼" 같은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ㅎ사장은 내 잘못이 아니니 너무 실망하지는 말라고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내년에는 반드시 성공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이제 대학 들어가면 아르바이트 같은 것 하지 말고, 운동권 학생들하고도 어울리지도 말고, 공부나 착실히 하면서 내년 입시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십만 원권 자기 앞수표를 내게 쥐여주면서, "일단 이거 쓰고, 돈 떨어지면 언제라도 내 사무실로 찾아와라"라고 했다.
난 ㅈ선생과 ㅎ사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용돈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에게 돈 좀 달라고 하면 맨날 없는 살림에 돈 타령하지 말라는 핀잔을 받으면서 자라온 탓에, 사실 언제부터인가 부모님한테 돈 달라는 말도 잘 안 해왔던 터였다. 그랬던 나에게 이렇게 든든한 스폰서가 생기니 기분이 좋았다. 더 이상 친구들한테 없는 티를 안 내도 되는 것이 좋았다. 마음대로 "한턱"을 쏘고 다니니, 친구들이 이젠 나를 다르게 보는 것 같았다.
한 2주나 지났나? 돈이 떨어졌다. 돈 필요하면 자기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했으니, 한번 가 봤다. 종로 서적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 거기로 찾아온 나를 보더니 그는
"어, 왔어? 용돈 필요해?... 미스김, 이 학생 한 장 줘."
용돈을 받는 게 이렇게 쉽다니. 나는 그 돈으로 종로서적에 가서 보고 싶은 책도 사고, 대학로 소극장에 가서 연극도 보고 그랬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재정적 자유로움이다.
그 이후로도 두 번 정도 더 사무실로 찾아서 용돈을 더 받았다. 한사장이 부재중일 때라도 경리 직원이 알아서 잘 챙겨 줬다. 재정적 자유로움이라, 말은 그럴싸한데, 이는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았다. 지갑은 풍성해졌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러한 재정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다음번 입시 때 떳떳하지 못한 이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느껴버린 이 달콤한 돈 맛, 놓고 싶지 않았다. 돈이란 유혹에 서서히 중독되어 감을 느꼈는데, 그러한 나 자신이 싫어졌다.
지난 거사를 실패하고 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 얼굴 뵙기가 영 민망했었다. 선생님 시골집에 가서 2박 3일 동안 놀러 온다고 하더니만, 마지막날 다쳤다고 며칠 더 쉬었다고 오겠다? 무언가 냄새가 나는 스토리이다. 그때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께서는 따져 물으셨다.
"너, ㅈ선생한테 까불다가 얻어터졌냐?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있었냐?"
"아뇨, 그런 거 없어요"
"그럼 뭐야?"
"…"
"설사 선생님이 애한테 무슨 해코지를 했겠어요" 라며 엄마는 아버지의 더 이상의 추궁을 막으셨다.
사실 2월 한 달을 정서적으로 혼돈 상태에서 보냈었다. 최고의 대학 서울대, 남들이 다 우러러보는 좋은 학과에 합격했지만, 합격의 기쁨도 잠시, 인생을 뒤흔들 만한 경험을 하고 나면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에게 짜증도 많이 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왜 이렇게 돈에 얷메여 사세요? 우리 이제 이렇게 살지 말아요. 이게 뭐예요, 구질구질하게.
돈이 없는 걸 어떡하니, 넌 앞으로 잘해라.
이런 대화가 오고 가면서 집안이 나 때문에 자주 시끄러워졌다. 그러다가 3월 1일, 문무대 입소 전날이었다 (당시에 교련 과목 이수를 위해서, 대학 1학년때 문무대에, 2학년 때 전방부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 훈련과 교육을 받는 것이 있었는데, 서울대는 첫 번째로 3월 2일에 가게 되어 있었다). 집에서 누나와 크게 한바탕 싸우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마룻바닥을 주먹으로 크게 내리쳤다. 그 결과 손가락뼈 두 개가 골절되었다.
부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쟤가 요즘 좀 이상해. 그렇게 말도 잘 듣고 모범생으로 잘 지내던 애가, 요즘에는 말도 삐딱하게 하고 저렇게 흥분도 자주 하고, 왜 저러나"
나를 앞에 두고 수군대셨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ㅈ선생님과 관련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눈치를 채신 것 같다. 내가 1,2월 동안 난생처음 새로운 것을 경험했던 것처럼, 부모님 역시 그동안 나를 키우시다가 처음 겪어보는 일에 휘둥그레지신 것이다.
3월 2일 아침, 문무대 입소를 위한 집결장소에 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더니, 교관은 나를 보더니 다음 해에 오라고 했다. (주: 그다음 해 89년도에는 대학교의 교련 과목이 영구히 폐지되어서, 나는 문무대를 안 간 몇 안 되는 88학번 남학생이 되었다).
관악 캠퍼스에는 한 주일 동안 1학년의 모든 수업은 없었다 (여학생들은 있었지만, 남학생 전체가 빠졌으므로 수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학교에 가보니 우울해서, 서울 시내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