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한 협박 편지

친구 유섭

by BJ Kwon

그러던 중, 심유섭(가명)을 다시 만났다. 유섭이와는 좀 특이한 인연이 있다. 방송부에서 좀 놀던 친구였는데,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1년 내내 별로 친하지 않았다. 교실에 앉는 자리 나 평소에 어울리던 친구들이나 별 공통점이 없어서, 그다지 어울릴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학력고사를 본 이후, 겨울방학이 시작하기 전 수업일수를 채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며칠 동안 학교에 나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놀았던 적이 있었다. 다른 학교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이 기간 동안 학교에서 비디오 영화 상영 등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 없이,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 같은 가져와서 읽으라고 했었다. 이 기간 동안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주로 떠들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서로 싸움질하거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게 아니라면 선생님들은 아무 터치를 하지 않았다. 이 며칠 동안 유섭이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유섭이는 어디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거침이 없었다. 수완도 좋았다. 언젠가 극장에 친구들 여럿이 영화 보러 갔는데, 표는 매진되었고 암표상들은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놈은 암표상으로부터 표를 시가보다 싸게 구하고는 반대편으로 가서 암표를 웃돈을 받고 파 미친(?)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그 돈으로 우리는 저녁을 사 먹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본인만의 독창적인 식견이 있었다. 글 재주도 좋았고, 달변에 아나운서 스타일의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람을 감화시키는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었다. 활빈당이라는 문학 서클을 만들었었는데, 그들이 만든 회지도 나에게 보여주었다.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도 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는 앞으로 큰 조직의 총수가 될 것이라고 했었다. 하루는 이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미래를 보는 눈이 좀 있는데, 가까운 미래에 네 주변에 어떤 귀인이 나타나서 후견인이 되어 줄 거야.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네 능력을 키우기만 하면 돼. 통을 크게 가져"


이어서 말했다.


"그 후견인을 내가 하고 싶은데, 난 아직 내 내공을 키우는 중이라 당장은 힘들 것 같아. 그런데 나보다 더 훌륭한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난다. 미래가 또렷이 보여. 기회가 생기면 잡아. 잘 되면 좋고, 잘 안되어도, 그렇게 경험을 쌓아나가는 거지. 그러다가 때를 잘 맞으면 같이 큰일을 해보자고. 나는 기획, 경영, 마케팅을 하고 너는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거야."


잠깐,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이거 좀 수상한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제대로 읽으신 거다. 맞다. 이 친구에게 사기꾼 기질이 있다. 본인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자기는 사기꾼이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더 큰 사기를 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다만 자기 혼자 좋자고 사기를 치는 게 아니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기를 치고 싶다고. 상대방을 즐겁게 하고 도움을 주면서 자기도 이익을 취하는 것, 원래 비즈니스라는 게 그런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다. 그리고 자기는 앞으로 5년 내에 아주 큰 사기를 칠 거다. 그리고 그 사기는 "좋은 사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우리는 87년 12월 말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시덕거리고 놀았었다.


88년 2월에도 유섭이를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난 적은 있었는데, 3월에 되어서야 단둘이서 만나게 되었다. 3월 첫째 주, 동급생들이 문무대로 들어갔을 때였다.


"야, 유섭아, 저번에 네가 말하던 것 있잖아. 앞으로 귀인이 나타나서 내 후견인이 될 거라는 거"


나는 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ㅈ선생이나 ㅎ사장이 네가 예언하던 내 후견인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는 정색을 하며 반응했다.


"넌 지금 이 길이 맞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엔 아닌데"


그는 지난 2월에 만났을 때, 평소와 달라진 내 모습과 행동을 보면서 당황했다고 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눈치를 챘다고 했다.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ㅈ선생은 내 후견인이 절대 아니라고. 그는 나에게 물었다. ㅈ선생과 ㅎ사장에게 가서 다음 해 입시 때 이 일을 다시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냐고. 대답을 확실히 못하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그냥 나한테 맡겨."


며칠 뒤에, 우리 집으로 수신자 나, 송신자는 불명인 편지가 왔다. 내용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편지의 수신인은 ㅈ선생과 ㅎ사장으로 되어 있었다. 내용은, 당신들이 학력고사를 막 끝낸 고등학생에게 접근하고 돈으로 회유해서 대리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증거를 다 수집해 놓았다는 것이다. 입을 다물어 줄 테니 몇 월 며칠에 어디로 돈 오백만 원을 갖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누가 쓴 편지인지 물론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사실 아주 허접하게 쓰인 편지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짜 협박 편지와는 많이 달랐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제삼자 입장에서 기술된 글을 보니, 아, 내가 정말 큰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겁이 나고 소름이 끼쳤다. 유섭이 이놈 이렇게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면도 있네. 그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맞다, 지가 쓴 거란다. 똑같은 편지를 우리 고등학교 교무실 ㅈ선생님 책상에도 배달시켜 놓았다고 했다. 아, 참, 근데 겁도 없이 어른들 상대로 이렇게 협박해도 되냐.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불량배들한테 끌려가서 해코지당하는 거 아냐. 난 벌벌 떨었다. 유섭이는 겁내지 말란다. 절대 나를 건드리진 않을 거란다. 그런데 그들이 편지에 대해서 물어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무조건 잡아떼라고 했다. 그래야 나한테 아무 일이 없을 거란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에 집으로 ㅈ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담 날 좀 보잔다.


약속장소에 가니 이미 ㅎ사장과 ㅈ선생이 있었고 한참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분위기가 싸늘했다. 한사장은 편지를 내밀면서 이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유섭이가 말해주었던 대로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전 전혀 몰라요, 이 일은 아무에게도 얘기 안 했는데요. 저도 겁나요…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한사장이 전선생에게 눈으로 신호를 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연락하지 마라. 이제 우리는 모르는 사이다"


옆에 있던 ㅈ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유식이를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뭐가 뭔지 몰랐다. ㅎ사장 말투가 하도 냉정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서 날 어떻게 할 것 같기도 했다. 가는 길에 혹시 뒤를 누가 따라오는지 계속 돌아다보았다. 유섭이는 나를 보자, 이제 됐다고, 걱정할 거 없다고 했다. 유섭이와 나는 이날 밤늦게까지 시간을 같이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다. 난 그에게, 협박 편지를 써도 그렇게 허접하게 쓰냐고, 이건 어린애가 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일부러 그런 거라고 했다. 만약에 제대로 협박 편지를 써서 혹시나 ㅎ사장이 돈 오백만 원을 보내고 나를 내보내지 않는다면 더 문제이지 않겠냐고 했다. 난 그놈이 그렇게 다음 몇 수까지 쳐다보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미 예상했지만, 며칠 후 협박 편지에 써놓은 장소와 시간에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대충 눈치를 채면서 나를 더 이상 대리시험 선수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바로 우리가 바라던 바였다.


이제 용돈을 받을 데가 없어졌고, 예전의 궁색했던 나로 돌아가게 되었다. 두어 달, 있는 척하면서 살고, 남 앞에서 없이 보이지 않아서 괜찮았지만, 뒤가 켕기는 게 영 아니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 입으려 했던 기분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그동안 어깨에 짓눌렸던 부담감을 덜어내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죄짓고는 못 사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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