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잇는 다리
1화 전수와 혁인
삼백 년 전, 조선에 최공(崔空)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릴 적 왼쪽 눈이 실명하여 애꾸였던 그는 바둑에 있어 엄청난 고수였다.
그는 수읽기가 굉장히 빨랐다. 그래서 호가 전수(電手)였다. 전수는 번개 같은 손놀림을 의미했다.
한양의 사대문 안에 살았는데 성내(城內)는 물론이려니와 도성 밖에서도 그를 이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천재였던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수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쌍룡법(雙龍法)’이었다. 그것은 두 마리 용이 서로 이리저리 꼬여 단단히 뭉친 것처럼 용맹한 공격과 철통같은 수비를 자랑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국수(國手)는 최공이 아니라 천원화였다.
천원화의 이름은 드높았다. 백두산이 보이는 압록강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에서부터 땅끝 마을의 모를 심는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조선 팔도에서 국수는 오직 독고혁인 천원화(獨孤弈人 天元華)였다.
그의 바둑이 얼마나 강했으면 이웃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명성이 퍼졌을까?
바둑을 좋아했던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는 그의 무심법(無心法)을 배우고 싶어 했다. 무심법은 바둑의 세계를 새롭게 연 천원화의 능기로서 천하에 당해 낼 자가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조선에서 동지사(冬至使)가 오면 무심법에 대해 물어볼 정도였다.
장원급제를 한 최공은 암행어사를 거쳐 입궁하였다.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던 해의 궁궐은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우며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정조는 최공을 아껴 규장각 제학(提學)으로 썼다.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정조가 규장각을 찾았다. 최공은 그가 옆에 온 것도 모른 채 선왕인 영조(英組)의 시문(詩文)을 정리하는 일에 온통 정신이 빠져있었다.
정조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임금이 온 것을 안 최공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그를 맞이했다. 정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 제학. 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전하. 말씀하시옵소서.”
“그대의 바둑이 한양에서 제일이라고 들었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보잘 것 없는 재주입니다.”
정조는 짖굳은 표정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며칠 전, 좌의정이 말하길 최공의 바둑은 찰나에 열 수 앞을 내다본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조선 팔도에 바둑이 가장 센 이가 누구요? 그대요 아니면 백성들이 말하는 천원화요?”
최공은 임금의 물음에 갑자기 마음속에서 강렬한 승부욕이 꿈틀거렸다.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전하. 사람들이 천원화가 조선의 국수라 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사옵니다. 당돌하오나 저는 그를 이길 자신이 있사옵니다.”
정조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허…. 국수가 둘 일 수는 없지 않은가? 둘이 한번 두어 보시게. 이기는 사람이 국수인 게지. 허허.”
정조가 말하자 최공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승부욕은 임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맞물려 꿈틀거렸다.
당시 천원화는 전라도 전주부(全州府)에 머물고 있었다. 정조는 그를 궁궐로 불러 들였다. 그리하여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규장각에서 천원화와 최공이 대국(對局)을 벌였다.
돌을 가리니 최공이 흑이었다. 백여 수가 물 흐르듯 진행됐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공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돌소리도 드높게 반상에 흑돌 하나를 내리꽂았다.
“따악!!!”
천원화의 큰 대마를 잡기 위한 천라지망(天羅地網)의 한 수였다. 최공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큰 승부처에서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두 마리 용이 백 대마를 양쪽에서 꽉꽉 조여 숨을 멎게 하듯 그의 쌍룡법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천원화는 돌부처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는 가볍게 백돌을 바둑판에 살짝 놓았는데 임금이 바로 옆에서 보고 있어도 전혀 긴장하는 내색이 없었다.
그는 무심법을 통해 있는 듯 없는 듯 허허실실의 행마로 흑의 포위망을 귀신같이 뚫어버렸다. 최공은 속으로 탄식했다.
‘끄응…. 명불허전이로군. 내 포위망을 뚫다니….’
천원화는 최공의 포위망이 헐거워진 틈을 이용하여 무시무시한 힘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드디어 이십 개가 넘는 최공의 흑 대마가 잡혔다.
임금은 감탄했다. 최공이 돌을 던지며 고개를 떨구자 정조가 천원화에게 말했다.
“그대의 바둑은 참으로 오묘하오. 숨이 끊어지는 법 없이 자유롭소.”
“황송하옵니다 전하. 운이 좋았사옵니다.”
“그래 무심법은 어떤 이치를 담고 있소?”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무심법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옵니다. 오히려 마음을 갖는 것이옵니다.”
“허허. 마음을 갖는다…. 알쏭달쏭 하구려.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소?”
천원화는 두 눈을 반쯤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정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갔다.
“그대는 정말로 조선의 국수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내 다 들어줄 테니.”
옆에서 왕과 천원화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공은 갈수록 얼굴이 붉어지고 귀가 빨개졌다. 바둑을 진 것이 못내 분했던 것이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흥분이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필상아. 쌍룡반(雙龍盤)을 내오거라!!”
집에 돌아온 최공은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며 청지기인 유필상에게 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높았다.
“네 나리.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청지기는 최공이 대답을 안 하자 급히 창고로 내달렸다. 그는 최공의 수족과 같은 사람이었다. 머리가 비상한데다 상전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쌍룡반은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바둑판이었다. 귀한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 주위를 두 마리의 용이 서로의 꼬리를 물며 빙 둘러져 조각되어 있었다.
청지기가 서재에 바둑판과 바둑알을 내려놓자 그는 의관을 벗지도 않고 그 앞에 앉았다. 얼굴이 벌게져 있던 그는 천원화와 두었던 바둑을 다시 놓아보기 시작했다.
때가 되어 저녁상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지자 촛불을 켠 후, 밤이 새도록 놓아보고 다시 또 놓아보기를 반복했다. 새벽닭이 울 무렵, 그의 하나뿐인 눈은 무섭도록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애석하구나. 하늘이 나 말고도 또 한 명의 천재를 내셨구나….”
그의 입술은 밤새 물 한 잔 먹지 않아 이곳저곳 갈라져 있었다.
국수 國手: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바둑 실력을 가진 사람.
동지사 冬至使: 조선시대 동지에 청나라에 보내던 사절 또는 파견된 사신.
제학 提學: 조선시대 예문관 · 집현전 · 홍문관 · 규장각 등의 종2품 관직.
시문 詩文: 시가와 산문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전주부 全州府: 전라북도 전주시의 조선시대 명칭.
천라지망 天羅地網: 하늘에 새 그물, 땅에 고기 그물이라는 뜻으로, 아무리 하여도 벗어나기 어려운 경계망을 뜻한다.
청지기: 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 중인의 신분으로 집사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