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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제대로 5화

친정 엄마에게 특별 용돈 100만 원을 드렸어요

by 망초

이번 설날에 구순 노모에게 특별 용돈 100만 원을 드렸다. 평소 드리는 수준에 비하면 두세 배로 큰 액수였다. 귀가 살짝 어두운 엄마가 봉투 받을 당시에는 금액을 제대로 듣지 못하셨는지, 집에 돌아가셔서 동생을 시켜 전화를 했는데, 용돈을 많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 왔다.

그 100만 원을 받은 엄마는 고마워하셨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당당히 받으셔도 되는 돈이다. 1934년생이신 엄마는 줄줄이 딸 넷을 낳고 아버지로부터 소박을 당하셨다. 지금은 대구광역시에 편입된 달성군 옥포면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신 아버지에게 엄마는 늘 부족하고(?) 소박을 당해도 되는 존재였다.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아 준 나의 서모는 아버지가 우리 자매와 엄마에게 주는 생활비도 끊고 일가친척들에게는 상냥하고 후한 소실, 아니 정실 노릇을 했다. 남편을 빼앗긴 것에 더해진 일가친척들로부터 냉대, 절대 빈곤에서 엄마도 나도 극한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방 하나에 다섯 식구가 엉겨 붙어 지내는 중에도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 얻어서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왔다. ”엄마가 공부시켜 줘서 내가 이만큼 살고, 또 아재한테 인정받은 돈이니 엄마가 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거야.”

이번의 그 100만 원은 그 친척 중 한 분에게서 내가 특별히 받은 용돈이다.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족보를 지금의 후손들과 연결되게 보완하는 책을 만들어 준 일종의 사례비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 절망하지 않고 공부하여 엄마에게 힘을 준 네가 대견하다, 그리고 집안의 족보를 들여다보고 내용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유일하게 네가 연구하고 또 후손들이 족보를 이어서 기록해 나갈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용돈을 주시면서, 일가친척에게 나의 공을 치하하시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아들이 아니어서 엄마와 함께 네 자매가 모두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일가친척들로부터 2차 가해까지 받았으나, 나는 자수성가(?)하였고 또 친정 집안의 숙원사업(?)을 해결해 준 것이다.



나의 사춘기는 오직 가난으로만 기억된다. 중학교 신입생 교과서를 새 책이 아닌 헌책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당당하게 책을 펴놓을 수가 없었고, 계속 진행되는 근시는 안경 교체를 계속 요구했으나 불가하여 맨 앞줄에 앉아서도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친구 노트를 보고 필기해야 했고, 방천이라는 개울 바람을 맞으며 코트 없이 교복 재킷 하나로 등하교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로 알려진 작가 정지아를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 정지아 작가도 사춘기의 가난을 작품 속에서 재생해 내고 있었는데 전혀 생소하지 않고, 기억 저편에 자리 잡고 있던 나의 사춘기 가난을 소환해 내기에 충분했다. 학급 환경미화를 한다고 방과 후에 남을 때는 친구들과 떡볶이라도 사 먹어야 하는데 매번 친구 신세를 져야 했을 때의 그 비참함,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것을 알고 고향 구례를 떠나,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익명의 서울에서 잘살아보려 했으나 엄마도 빨갱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심하게 방황하였다는 이야기. 방황할 때 밤늦게까지 서점에, 영화관에 있었으면서 엄마에게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도 안 하는 고의적인 반항. 사춘기 소녀가 겪어야 했던 절대적이면서 또 상대적이기도 한 가난과 넘을 수 없는 이념의 벽은 소녀를 거듭거듭 절망하게 했다.


빨치산의 딸 책 표지.jpg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부분이지만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빨치산의 역사를 정지아 작가는 소설의 형식으로 재현해 내고 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가죽 혁대 삶은 물까지 먹고, 신발이 없어서 헝겊 쪼가리로 칭칭 싸매고 다니던 발은 너나없이 동상에 걸려 잘라내야 할 지경이었으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 그냥 싸우다 죽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빨치산이 다녀갔다고 빨치산에게 식량을 주었다고 마을 전체가 죽임을 당하던 이야기들이 부모에게서 들은 실록소설의 형태로 실려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작성한 2024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34,472달러, 세계 8위라고 한다. 1980년의 1,715달러와 비교하면 20 배 가량 커졌으나, 상대적인 빈곤감이 빨갱이 낙인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필자나 정지아 작가가 그러했듯이 배우고자 하는 어린 영혼들이 좌절하지 않고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의 책무이다.


김장 배추까지 내어준 내 주말농장에 심어 놓은 마늘이 영하의 추위, 눈보라에도 생명의 씨를 소중히 보듬고 있다가 겨울 끄트머리 봄볕을 알뜰히 모아 싹을 틔웠다. 사람이 들어가 고의로 밟지만 않는다면 생명은 스스로 살아내고 가꾸는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는 가르침도 잊지 않고서... 2025. 04. 07

2025 마늘 새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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