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 씨의 생활백과사전 이야기
1. 조선 시대에도 음식 레시피 책이 있었다.
(감을 말려서 음식의 단맛을 내다.)
“이 떡의 이름은 석탄병이래요. 아낄 석에 삼킬 탄자를 써요. 삼키기 아까운 맛이 난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네요.”
아주머니들은 귀한 떡을 어찌 먹느냐고 소란을 피웠다. 덕주도 떡의 모양을 요리조리 살피고는 입에 쏙 넣었다. 달콤한 떡은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서 입안에서 금세 사라졌다. 소라니댁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쩜 이리 달까? 이렇게 달콤한 건 처음 먹어 보네.”
“감을 말린 가루로 단맛을 내는 거래.”
조선 최초의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 씨’를 중요한 등장 인물로 하고 있는 채은하의 장편 동화 <이웃집 빙허각>의 한 대목이다. ‘빙허각’은 이 씨가 11 세에 직접 지은 호이다. 기댈 빙(憑) 빌허(虛) 집각(閣) 글자를 쓰는데, ‘허공에 기대다’, 곧 ‘아무 데도 기대지 않는 사람’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빙허각 이 씨는 50세가 되던 1809년에 <규합총서>라는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에는 위와 같은 음식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옷 짓는 법, 염색하는 법, 가축 기르는 법, 육아와 응급처치법, 길흉을 점치는 법 등 그야말로 생활대백과 사전이라 할 정도로 방대한 분야의 내용이 담겨 있다.
2. <규합총서>는 생활대백과사전이다.
음식에 관해서만 보면 빙허각 이 씨에 앞서 양반 가문을 중심으로 그 집안에 전해오는 음식레시피를 적은 필사본, 혹은 인쇄본이 다수 있기는 하지만, 빙허각 이 씨의 <규합총서>처럼 고증학적 체계를 갖춘 책은 없다고 한다.
“건강을 지키고 집안을 다스리는 법, 살림에 관한 모든 지식을 담은 총서가 될 것이다.”
빙허각 이 씨의 <규합총서>는 총 5권으로 되어 있는데, 1권 주사의(酒食議, 음식조리법)에는 390 여종의 음식. 약주제조법, 장 담그는 길일, 야채를 오래 보관하는 법, 겨울에 야채를 기르는 법 등의 내용이 있다고 하며, 이외에도 봉임측(縫紝則, 바느질 관련), 산가락(山家樂, 재배 및 가축 사육 관련), 청낭결(靑囊訣, 육아·구급 관련), 술수략(術數略, 집방향 길흉, 택일, 부적 관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빙허각 이 씨는 한국실학학회가 선정한 우리나라 33인의 실학자 중 유일한 여성이고, 2019년에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교과서에 등재되기도 했다.
3. 규합(閨閤, 여인들이 거처하는 곳, 안방)에 어찌 인재가 없으리오?
“학문이란 결국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여인이다.”라는 생각으로 살림 전반에 도움을 주고자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빙허각 이 씨(1759~1824)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여자이지만 아버지 이창수에게서 소학 등을 배웠으며 계녀서, 열녀서 등도 읽을 수 있었다. 15 세에 서유본이라는 사람과 결혼한 후에는 남편, 시동생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고, 시아버지(서호수, 해동농서), 시동생(서유구, 임원경제지) 등이 모두 실학과 관련된 서적의 집필자들이다. 시숙부가 옥사에 연루되어 한양을 떠났으며, 집의 규모도 줄고 가정 경제가 어려워지자 빙허각은 직접 차나무를 길러서 가정 경제를 책임졌다고 한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자식들도 떠나고 이 씨는 자신이 살면서 공부한 것들 외에 살림법을 보태어 책을 집필할 결심을 하는데, 시할아버지, 시아버지의 저술은 물론이요, 주역, 맹자, 동의보감 등 80여 종의 서적을 참고하여 <규합총서>를 저술하게 된다.
4. <규합총서>는 언문으로 쓰겠다.
“한문을 진짜 글자, 진서라고 부르는 건 대대로 물려줄 만한 귀한 지식을 담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언문은 가벼운 편지나 재미난 소설 따위에 쓰일 뿐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아. 만약에 내가 언문으로 글을 쓴다면, 다들 여인이니 으레 언문으로 썼다고 생각할 것이고, 학문의 체계와 논리를 갖추었다고 한들 그 글 또한 가벼이 여길 것이다. 네 말은 알겠으나, 나는 오래 남을 책을 쓰고 싶구나.”(위의 책 81쪽)
“그날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책을 보여 주고 싶은 얼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더구나. 딸과 며느리는 물론이요, 어릴 적 함께 놀던 동무들과 담 너머로 알고 지내던 부인들까지.”
“기왕 언문으로 쓰기로 했으니, 그간 공부한 내용에다가 내가 아는 살림법을 보태서 새로운 책을 써 보자꾸나.”(위의 책 88, 89쪽)
빙허각 이 씨가<규합총서>를 언문으로 쓰게 된 이유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재미있게 표현한 부분이다.
빙허각 이 씨와 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규합총서>에 관한 이야기는 신문과 방송에 소개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국립한글박물관이나 각 지역의 문화센터 등에서도 짤막짤막하게나마 계속 소개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이웃집 빙허각>이라는 책을 통해 빙허각 이 씨라는 실학자를 알게 되었는데, 의외로 다른 매체에도 관련 자료가 많았다. 실학자의 이름을 많이 보고 듣고 외우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성실학자 빙허각 이 씨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로 ‘한국대표실학자 33인’을 인용해 둔다.
이수광. 김육, 윤휴, 유형원, 박세당, 조성기, 정제두, 이익, 유수원, 신경준, 안정복, 서명응(빙허각 이 씨의 시할아버지), 원중거, 위백규, 황윤석, 홍대용, 서호수(빙허각 이 씨의 시아버지), 박지원, 이덕무, 이가환, 박제가, 정조(임금), 빙허각 이 씨, 정약용, 서유구(빙허각 이 씨의 시동생), 유희, 홍길주, 김정희, 이규경, 최한기, 박규수, 남병철, 최성환 (한국실학학회 제공, 동아일보 2015. 01. 30.)
참고 자료
*채은하 장편동화 이웃집 빙허각, 창비출판사 간행, 2024.
*〔한국사 探〕조선시대 사회 변화를 꿈꾼 여성 지식인/YTN 사이언스
*〔조선의 걸크러쉬 2〕조선 최초, 유일한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 씨와 규합총서, 히스토리야 31회, 딜라이브 TV
*〔규합총서〕송절주와 솔향기과편, 윤숙자의 손맛
*빙허각 이 씨와 생활경제백과사전 규합총서, 세종대왕신문, 2022
*우리가 몰랐던 역사 속 위대한 여성들 ‘Herstory 한국사’ 서초여성가족플라자 잠원센터_여가플 2021
*여성실학자가 한글로 쓴 생활백과사전, 국립한글박물관, 2022
2025. 0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