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반하다. 4화

남한산성(김훈 지음)

by 망초

소설 《남한산성》을 읽은 사람이나 영화 《남한산성》을 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은 아련하거나 분개했던 장면들은 각자 다를 것이다.


피난하는 임금 일행을 자신의 배로 건네주었고 김상헌 자신도 건네주는 수고를 하고 있는 뱃사공, 예닐곱 살의 어린 딸을 둔 그 사공을 칼로 베는 장면, 음력 1월의 혹한에 비천한 신분의 젊은 군병들이 보리밥 한 그릇에 뜨거운 간장 국물 한 대접을 마시고 다시 성첩으로 올라가는 장면, 성첩에서 뒤집어쓰고 눈비라도 막으라고 군병들에게 나누어준 가마니를 도로 거두어 굶어 죽어가는 말에게 먹이자, 말자 언쟁하는 장면, 임금은 침구가 없어 입었던 옷을 벗지 않고 그냥 누워서 자는데 성 밖의 12만 청병들은 민가에서 약탈해 온 알록달록 원앙금침을 밟고 지나다니거나 조선의 여인들에게 술시중과 몸시중을 들게 하는 장면.


송파나루에서 언 강을 건널 때 달구지 바퀴가 얼음에 빠져 독이 깨졌을 때 늙은 상궁들이 눈보라 속에서 우는 장면, 겨우 닭다리 두 개를, 또는 취나물 무침을 임금의 수라상에 올리는 궁핍한 성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해가 바뀌었다고 세찬(歲饌)으로 소 두 마리와 술 10병을 보내었으나, 조선의 소와 술이 다 우리 것이니, 궁핍한 성안의 임금이나 먹이라고 돌려보내는 장면.

대장장이이자 옹기장이인 서날쇠가, 고립무원의 성안에서 호미 한 자루만 가지고 배수구 구멍을 통해 쥐도 새도 모르게 성 밖으로 나가서 임금의 격서를 전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장애인으로 가장하면서까지 구원병의 참패 사정이나 청 군막 내의 분위기를 파악해 성 안팎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들어오는 장면.


아홉 개의 단을 쌓아 그 단 위에 우뚝 높이 앉아 있는 청 태종 아래에서 우리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장면.


20260125_102432.jpg 문봉선 화백의 그림. 책 378-379쪽을 촬영하였습니다. 책의 접힌 부분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임금이 보입니다.

이러한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생명이 희생된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결코 가벼운 장면이 아니지만, 병자호란의 주된 원인이기도 하고 호란이 끝난 뒤에도 후폭풍이 거세었던, 임금의 항복 문서 작성의 '피'가 튀어 오르는 장면, '말'이 칼이 되는 장면을 이 소설의 명장면으로 소개한다.


밤중에 임금이 최명길을 침소로 불렀다. 질청에 기거하는 정 칠 품들이 자정 무렵에 승지를 따라 행궁으로 올라가는 최명길을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늙은 당하관 세 명이 내행전 마루에 먼저 와 있었다. 정오품 교리, 정오품 정랑, 정육품 수찬 들이었다. …… 환갑이 넘은 나이에 품계는 당하에 머물렀으나 벼슬길이 험난할수록 그들의 문장은 말을 다져서 단아하고 명료했다. …… 늙은 당하관 세 명의 면면을 보면서 최명길은 임금이 밤중에 부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임금은 사흘 안으로 칸에게 보낼 국서를 지어서 올리라고 했다. ……

- 저들이 나를 성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구나. 지켜서는 살 수가 없고 살려면 허물어야 하는데……. 문구를 공손히 해서 저들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내 뜻을……

최명길이 임금의 말을 막았다.

- 전하, 말씀 마오소서. 이미 신들이 알고 있으니…….

정육품 수찬이 말했다.

- 신들은 늙고 병들어 사리에 어두우니 막중한 국사를 면하여 주소서.

임금이 말했다.

- 아니다. 경들은 이미 늙고 병들어서 살 날이 많지 않으니 스스로 욕됨을 감당하라.

……

- 아니다. 여럿이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여럿의 글을 보고 하나를 취하려 한다. 재론하지 않겠다. 이판이 두루 챙겨서 시행하라.(321-323)


남한산성에 들어간 지 사십여 일. 아직도 주화냐, 척화냐의 논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임금은 이판 최명길을 위시한 4명에게 항복 문서의 작성을 명했다. ‘의’가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명분이 추위와 굶주림의 이 산성 내에서 아직도 큰 소리로 울리고 있는 지금은 물론이고, 이 호란이 끝나고 제대로 된 세상이 와도 ‘화(和)’ 곧 ‘불의’의 문서를 작성하는데 제 이름을 새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20260125_102640.jpg 문봉선 화백의 그림. 책 324-325쪽을 촬영하였습니다.


정육품은 붓을 들어 쓰기 시작했다.


신은 어려서 공맹(孔孟)과 퇴율(退栗)을 읽었으나 먼 말류를 더듬었고, 나이 들어서는 성은으로 출사하여 어두운 두메에서 목민하였으나 아무런 치적이 없었나이다. 공 없이 늙어가는 천한 몸에 병마저 깊어서 하릴없이 성안에 들어와 곡식을 축내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몸 안에 물기가 다 말라서 비듬으로 부서져 흩어지고, 물을 자꾸 마셔도 이내 오줌으로 다 나와서 몸 안에 머물지 못하나이다.

……

또 가끔씩 자다가 아래가 저절로 열리고 대소변이 새어 나와 더러운 거름 위에 뒹굴고 있으니 어찌 국서를 적을 수 있으며, 어찌 어전에 나아갈 수 있겠나이까?

……

아침에 임금이 정육품 수찬의 차자를 읽었다. 임금은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임금이 김류와 최명길을 불러서 정육품의 차자를 보였다.

김류가 나장을 보내 정육품을 묶어서 북장대로 끌어왔다.

- 네가 너의 분뇨와 액즙의 일을 문장으로 적어서 어전에 고하였느냐?

……

- 과연 더러운 놈이다. 매우 쳐라.

똥물이 피와 뒤섞였다. 곤장이 볼기를 칠 때마다 똥물이 튀었고, 곤장이 치솟을 때마다 피똥이 허공에 흩어졌다. 중곤 스무 대에 정육품은 실신했다.

……

임금이 최명길에게 말했다.

- 추하고 안쓰럽다. 육품 수찬의 일을 면해 주어라.

최명길이 대답했다.

- 육품 수찬이 이미 곤장으로 몸이 망가져 붓을 쥘 수 없으니. 수찬은 제 뜻을 이룬 것이옵니다.


……

정육품 수찬이 죽던 날 저녁에 정오품 교리가 죽었다. 칸에게 보낼 국서를 지어 올리라는 어명에 교리는 눈앞이 캄캄했다. …… 문장이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글이 간택되어 칸에게 보내지면 후세 만대로 이어질 치욕이 교리의 눈앞을 절벽으로 가로막았다. 임금이 정한 시한은 사흘이었다. 첫째 날 교리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교리는 지팡이를 짚고 밖으로 나와 저무는 논둑을 거닐었다. 주저앉을 듯이 다리가 후들거렸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교리는 오래된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

달이 저물었다. 교리는 한기를 못 이겨 지팡이로 땅을 밀고 일어섰다. 일어선 교리는 허리를 펴기도 전에 다시 땅으로 쓰러졌다. 교리의 심장이 터졌다. 교리는 논둑에서 죽었다.

……

최명길이 임금에게 정오품 교리의 죽음을 아뢰었다.

- 본래 심근이 부실한 자로 천명이 다한 것이옵니다.

- 겨울을 용케 났구나. ……국서는 썼다던가?

- 종이를 펼쳐놓고, 먹은 갈지 않았사옵니다.

- 시작은 한 것인가?

- 종이를 펼쳤으니…….

임금이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교리가 복이 많구나.


정랑은 간택되지 않을 글을 지어서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고, 달리 길은 없었다.

또 대륙과 소방의 역사를 살피건대, 지금부터 일천 년 전에 당의 황제가 고구려를 징치하고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

돌아가는 황제에게 절하며 전송의 예를 갖추었으니, 돌아가고 또 보내는 예법이 아름다움을 알 것입니다. 하물며 이 작은 산성은 황제의 일산을 향해 욕을 한 적이 없었고 삼전도 본진을 겨누지도 않았으며……

정랑은 남한산성에 갇혀서 안시성을 끌어대고 있었다. ……

정랑이 미쳤나? 정랑이 미쳤구나. 늙어서 병들고, 무거워서 일어설 수 없고, 갇혀서 내디딜 수 없고, 막혀서 보이지 않아 정랑은 미쳐버렸구나.

……

정랑은 미친 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미친 척을 하고 있다면 정랑은 미치지 않았구나. 정랑은 제정신으로 제 앞을 내다보고 있겠구나. 임금은 또 지는구나. 정랑이 이기는구나. 정랑이 임금을 이기고 묘당을 이기고 남한산성을 이기고 칸을 이기는구나. 매 맞은 정육품 수찬이 이기고, 죽은 정오품 교리가 이기고, 미치지 않은 정오품 정랑이 이기는구나…….(327-334)


최명길이 먹을 갈았다. 남포석 벼루는 매끄러웠다. 최명길의 시선이 벼루와 먹 사이에서 갈렸다. 새카만 묵즙이 눈에서 나오는가 싶었다. 묵즙이 흘러서 연지에 고였다.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최명길이 붓을 적셨다. 최명길이 젖은 붓을 종이 위로 가져갔다.

소방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시문과 담론에 스스로 눈이 멀어 천명의 순환에 닿지 못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명을 아비로 섬겨 왔는데, 그 섬김의 지극함은 황제께서 망월봉에 오르시어 친히 보신 바와 같습니다.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皇極)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소방의 군신들이 들불처럼 휘몰아오는 황군의 위무를 차마 영접하지 못하고 우선 몸을 피해 산성으로 들어왔으나 어찌 감히 대국에 맞서려는 뜻이 있겠나이까. 쫓기는 작은 짐승이 굴속으로 숨어든 일을 황제께서 기어이 군사를 움직여 꾸짖으신다면, 소방은 황제의 은덕에 닿지 못하여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옵니다. 또 성벽에서 닭싸움하듯 소소한 다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한 줄기 허술한 돌담을 지켜보려는 미망이었을 뿐 어찌 황제의 군사에 대적할 뜻이 있었겠나이까.

황제께서 친히 여러 강을 건너시어 이 궁벽한 산골로 내려오시니, 오셔서 소방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복되고 또 기뻐서 달려 나가 배알하려 하나 황제의 크신 노여움과 깊으신 근심이 또한 두려워서 소방은 차마 나아가지 못하고 돌담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옵니다.

이제 스스로 새로워지고 기뻐서 따르려는 소방의 뜻이 돌담 안에서 시들지 않도록 살펴주시옵고, 모든 생령의 살고자 하는 기운을 거두어서 기르시는 황제의 천하에 소방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

황제의 품에 들고자 하는 소방이 황제의 깃발을 가까이 바라보면서 이 돌담 안에서 말라죽는다면 그 또한 황제의 근심이 아니겠나이까. 하늘과 사람이 함께 귀의하는 곳에 소방 또한 의지하려 하오니 길을 열어주시옵소서…….(336-337쪽)


김상헌이 앞으로 나왔다.

- 전하,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인데, 이 문서가 과연 살자는 문서이옵니까?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임금을 다그쳤다.

- 전하, 이제 칸을 황극으로 칭하였으니 문서가 적에게 가면 전하는 칸의 신이 되고, 신들은 칸의 말잡이가 되며, 백성들은 칸의 종이 되는 것이옵니까?

……

-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김류가 말했다.

- 명길이 제 문서를 길이라 하는데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글과 같을 수야 있겠나이까. 하지만 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

임금이 겨우 말했다.

- 영상의 말이 어렵구나. 쉬고 싶다. 다들 물러가라.

밤중에 임금이 승지를 불러 문서에 국새를 찍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이 소설을 읽은 것은 2008년. 초판 발행이 2007년 4월이었다고 하니, 거의 초판본을 읽은 것이라 추정된다. 이번에 다시 읽은 책은 100쇄 출판을 기념하여 아트에디션으로 발행된 책이다. 한국화가 문봉선 화백의 그림 27점도 삽입되어 있고, 약 35쪽 분량의 못다 한 말이 실려 있는데, '삼전도비' 즉 '대청황제공덕비'의 비문을 짓는 일을 죽음보다 더한 치욕으로 여긴 4명의 학자들의 실제 이야기가 소설화되었음에 대한 소개 글이 있었다.)


202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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